정치권의 권력 구조 개편 개헌(改憲) 논의가 가속화하고 있다. 여야 양쪽에서 “차기 대통령 임기는 3년으로 단축하고, 2028년에 총선·대선을 동시에 치르자”는 구체적인 구상까지 속속 나오고 있다. 학계에서도 “국민 상당수가 대통령이 비극적 결말을 반복하는 정치 체제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에 공감하고 있다”는 여론이 커지고 있다. 지금이 ‘87체제(1987년 구축된 현행 헌법 체제)’를 바꿀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국민의힘에선 오세훈 서울시장, 유승민 전 의원, 한동훈 전 대표가 ‘임기 단축 개헌론’ 구상을 밝혔다. 오세훈 시장은 28일 YTN라디오에서 “우리 당에서 어떤 후보가 되더라도 그다음 총선(2028년) 시기에 맞춰서 대통령 임기를 3년만 하고 물러나자”면서 “국민의힘 후보가 차기 대선에서 당선된다면 다수 의석인 더불어민주당은 대통령 임기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개헌 논의에 나설 것”이라고 했다. 유승민 전 의원도 본지에 “민주당 반대로 (권력 구조 개편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다음 대통령 임기 초반에 개헌을 하자”며 “2028년 총선에 맞춰 대통령 임기를 3년으로 단축하고, 개헌하는 대통령은 중임(重任)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라고 밝혔다. 한동훈 전 대표도 언론 인터뷰에서 “만약 올해(조기) 대선이 치러지면 새 리더는 4년 중임제로 개헌하고, 자신의 임기는 3년으로 단축해서 2028년에 총선·대선을 함께 치러야 한다”고 말했다.
◇“4년 중임제 위해 총선·대선 주기 맞춰야" 임기 줄이자는 정치인들
이들은 임기 단축 개헌이 이뤄진다면 행정부(대통령)와 입법부(국회)의 권력 충돌을 사전에 막을 수 있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야권 주요 정치인 중에서는 김동연 경기지사, 김두관 전 의원이 3년 임기 단축 개헌을 공개적으로 제안했다. 김동연 지사는 지난 27일 대구에서 열린 ‘2·28 민주운동기념사업회’ 초청 특강에서 “분권형 4년 중임제 대통령, 책임총리제 등을 포함한 권력 구조 개편이 필요하다”며 “조기 대선이 이뤄진다면 다음 대통령은 차기 총선과 주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임기는 3년으로 단축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김두관 전 의원도 차기 대통령 임기를 2025년부터 2028년까지 3년으로 단축하되 중임할 수 있도록 단서 조항을 만들자고 주장했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사회 전반적으로 “현행 5년 단임(單任) 대통령제가 수명을 다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학계를 중심으로 분권형 대통령제(이원집정부제), 4년 중임제, 내각제 등 다양한 권력 구조 개편 방안이 제기됐다. 정치권에선 임기 단축 개헌론으로 차츰 무게가 실리는 모양새다. 정치권 관계자는 “1987년 이후 숱하게 개헌 논의가 있었지만 여야를 불문하고 유력 대선 후보들은 부정적이었고, 실제 대통령에 당선되면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면서 “개헌이 이뤄지려면 최고 권력자의 자기 희생이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임기 단축 개헌론이 부상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김영수 영남대 교수도 “‘87년 체제’ 이후 집권 세력이 대통령 임기 도중에 치러지는 총선을 치르느라 장기 국정 과제에 집중하지 못했던 것이 엄연한 현실”이라며 “그런 차원에서 총선·대선을 같이 치르자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방법론에선 일부 이견이 있지만 ‘개헌 필요성’에는 주요 정치인들이 동의하고 있다.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달 3일 기자회견에서 “제왕적 대통령제를 분권형으로 개헌하고 선거구제도 개편해야 한다”면서 “2026년 지방선거일에 맞춘 개헌 국민투표를 제안한다”고 했다. 안 의원은 차기 대통령 임기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4년 중임제 방식의 개헌 방식을 선호하고 있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단계적 방식의 개헌론 구상을 공개했다. 차기 정부가 2028년 총선일에 개헌 국민투표를 동시 실시하고, 이로부터 2년 뒤인 2030년 지방선거에선 차차기 대선도 함께 치르자는 구상이다. 홍 시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총괄적 헌법 정비에 드는 시간이 두세 달 갖고는 안 될 것”이라며 “미국식 4년 중임제, 정·부통령제, 의회 양원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했다.
야권에선 김경수 전 경남지사가 ‘한국형 연정(연합정부)’을 개헌 골격으로 제시했다. 여야가 새 정부 출범 때 인수위원회에 함께 참여하고 내각도 공동으로 구성하자는 것이다. 김부겸 전 국무총리는 지방분권 개헌에 주목하고 있다. 지난달 15일 김부겸 전 총리는 “권력 구조 개편을 위한 개헌뿐만 아니라, 지방분권형 개헌 논의도 필요하다”며 “2026년 지방선거까지 개헌이 완성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와 대조적으로 야권의 유력 대선 주자인 이재명 대표는 개헌에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재명 대표는 전날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만난 자리에서 “현재로는 내란 사태에 집중해야 하지만 (개헌 의견 수렴 기구 설치) 제안에 대해 고민해 보겠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2022년 대선 때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이와 관련, 김동연 경기지사는 이날 이재명 대표를 만나 “제7공화국을 만들기 위한 개헌이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유감이다”라며 “권력 구조 개편, 경제 개헌, 또 이를 위한 임기 단축 개헌 논의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했다. 개헌 논의에 소극적인 이 대표를 직접 겨냥한 발언이다.
정치권 일각에선 “이재명 대표 1강(强) 체제가 구축된 상황에서 여야 대선 주자들이 ‘개헌 연합 전선’으로 대항하고 있는 것”이란 시각도 존재한다. 박성민 정치 컨설팅 ‘민’ 대표는 “나머지 대선 주자들이 임기 단축을 고리로 연합 전선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또 다른 여론조사 전문가는 “이 대표가 개헌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자체만으로 유권자들에겐 ‘권력에 집착한다’는 인상이 생길 수 있다”며 “나머지 후보들은 바로 이 점을 파고들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4년 중임제
대통령 임기를 5년에서 4년으로 줄이되, 한 차례 재선이 가능하도록 해 국정 운영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제도. 미국이 4년 중임제를 시행하는 대표적인 나라다. 재선 성공을 전제로 하면 8년 임기가 주어지기 때문에 안정적인 국정 운영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대통령 임기 첫 4년 동안 재선을 위해 임기 중 성과가 나오는 단기 정책에 치중할 우려가 있다는 단점도 제기된다.
☞이원집정부제
대통령과 총리가 권력을 나누어 행사하는 제도.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은 외교·국방을, 국회 다수당의 지지를 받아 선출된 총리는 국내 행정과 경제·교육·복지 등을 담당하는 식이다. 이원집정부제는 대통령의 권력을 분산해 양 권력(대통령·국회)이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제도이지만, 대통령과 총리 간 갈등이 발생할 경우 국정 운영이 파행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