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30대 전직 국회의원의 페이스북 글이 화제가 됐다. 불과 10개월 전 ‘의원님’으로 불렸던 인물이 편의점, 쿠팡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는 내용이었다. 김은희(34) 전 국민의힘 의원이 그 주인공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테니스 선수로 엘리트 체육을 해왔던 그는 경기 고양시에서 테니스장을 운영하며 코치로 활동했다. 그러다 2016년 우연히 한 테니스 대회에서 10세 때 자신에게 성폭력 범죄를 저지른 코치를 만났다. 큰 충격을 받은 그는 가해자를 고소했고, 대법원은 가해자에게 강간치상 혐의를 인정해 징역 10년형을 선고했다. ‘체육계 미투 1호’가 된 김 전 의원은 2020년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 청년인재로 영입됐다.
그해 치러진 21대 총선에서 비례대표 23번을 받아 낙선했다. 2024년 1월 허은아 당시 국민의힘 의원이 탈당하면서 의석을 승계받았고, 약 5개월간 국회의원직을 수행했다. 자신의 제1호 법안으로 보복 범죄를 방지하고 성폭력 피해자의 2차 피해를 예방하기 위한 이른바 ‘범죄 피해자 보호 3법’을 대표 발의했다.
미디어에는 현직 국회의원들이 매일같이 등장한다. 그러나 국회의원직에서 물러난 이후, 그들의 삶이 조명되는 일은 드물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꺼진 뒤 평범한 시민 ‘김은희’는 예상치 못한 어려움들과 마주했다. 지난 14일 그가 운영하는 경기 고양시 테니스장에서 만난 김 전 의원은 지난 10개월을 “극복의 시간”이라고 불렀다.
◇“거절했던 5개월 국회의원…성폭력 피해자를 위해 나섰다"
Q. 테니스 선수 출신 코치로 활동하다가 20대에 정치에 입문했습니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A. 2016년 우연히 테니스 대회에 갔다가 초등학생 때 저에게 성폭력을 저질렀던 가해자를 마주하게 됐습니다. 그런 사람이 아직도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법적 다툼을 시작했고, ‘체육계 미투 1호’가 되었습니다. 가해자는 2018년 징역 10년형의 대법원 판결을 받았어요. 많은 분이 도와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했고, 이후 저와 비슷한 일을 겪은 피해자들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2020년 총선 때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 청년 인재로 영입됐어요.
Q. 2024년 1월 허은아 당시 국민의힘 의원이 탈당하면서 비례대표직을 승계하게 됐습니다. 임기가 148일 남은 때였는데요.
A. 사실 의원직을 맡지 않겠다고 했었어요. 남은 임기가 짧아서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을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성폭력 피해자들에게는 제가 국회의원이 되는 게 상징성이 있을 것 같더라고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뭐든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짧은 시간, 의원으로서 제가 할 일은 기록을 남기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발의한 법안이 기록으로 남을 테고, 통과는 못 되더라도 다음 국회에서 제 법안을 참고해서 비슷한 법안이 발의될 수 있을 테니까요. 아동복지법, 체육인복지법, 아동‧청소년 성보호법 등 5개월 동안 10개 넘는 법안을 대표 발의했습니다.
◇“전직 국회의원 타이틀, 30대 청년에게는 짐이었다”
Q. 어떤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신 것 같아요. 정해진 임기가 끝난 후의 계획도 있었나요?
A. 지금 생각해보면 막연하게 ‘어떻게든 되겠지’ 했던 것 같아요. 제가 국회에 있는 동안 직원이 테니스장을 맡아서 운영하고, 다시 돌아가면 되겠거니 생각했어요. 정말 너무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거죠.
그런데 정치인 김은희로 살다가 다시 생업으로 돌아왔을 때 많은 게 달라져 있었어요. 나를 가르쳐주는 사람이 ‘국회의원’이었다는 게 테니스를 배우는 사람들에게는 장점이 아니더라고요. 국민들이 가진 국회의원의 이미지는 예상보다 너무 부정적이었고, 정치인이라는 걸 먼저 알게 되면 부담스러워하거나 꺼리는 사람들이 더 많았어요.
정치인을 꿈꾸는 분들이 꼭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 저처럼 시민들과 마주하는 일을 생업으로 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정치인 경력이 결코 장점이 아니라는 걸요.
Q. 테니스장 운영이 아무리 힘들어졌다고 해도 아르바이트를 하는 게 쉽지는 않은 선택이었을 것 같은데요.
A. 제 밥벌이는 어쨌든 테니스였고, 테니스장을 포기할 수는 없었어요. 어떻게든 운영하려면 다른 일을 해서 테니스장의 적자를 메워야 했어요. 비교적 쉽게 시작할 수 있는 게 편의점과 쿠팡 알바였어요. 편의점은 코치 일을 마친 후 야간에 할 수 있었고, 쿠팡은 제가 원할 때에만 신청해서 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죠. 20세 이후로는 부모님 지원 없이 살아왔기에 알바 자체는 익숙했어요.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던 건 사실입니다. ‘나를 실패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저를 괴롭혔어요. 사실 제 나이에 투잡으로 알바하는 사람들은 많고, 그게 창피할 일이 전혀 아니잖아요. 그런데 국회의원이었던 사람이 알바를 하면 ‘정치 기웃거리다가 망한 사람’이라고 조롱하는 게 너무 싫었던 것 같아요.
한 번은 테니스 회원을 편의점에서 만났어요. “선생님이 왜 여기 계세요?”라는 물음에 뭐라고 답할 수가 없더라고요. 같은 상가에 계시는 사장님은 절 마주치고는 울먹이면서 위로해주시는데, 그게 더 슬펐어요. 진짜로 제가 불쌍한 사람이 된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사장님 가시고 그날 편의점에서 펑펑 울었어요. (이때 이야기를 하며 김 전 의원은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그때 ‘전직 국회의원’이라는 타이틀은 제게 버겁기만 했어요. 차라리 평범한 30대 시민이었다면 그저 열심히 사는 청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거잖아요.
◇“알바, 힘들었지만 배운 것 많아…노력하면 극복할 수 있다"
Q. 알바를 금방 그만두고 싶었을 것 같은데요. 얼마나 일했어요?
A. 편의점 야간 알바는 작년 8월부터 4개월 정도 일했고, 쿠팡 알바는 비슷한 시기에 시작해서 지금도 하고 있고, 앞으로도 주말에 시간이 날 때마다 할 거예요. 힘들기도 하지만 배운 것도 많았거든요.
쿠팡에서는 여러 일을 하게 되었어요. 낮에는 주로 짐이 실린 엄청 큰 카트를 나르는 일을 했고, 밤에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나오는 짐들을 카트에 싣는 일을 했어요. 봉지에 쌓인 여러 물건을 번호에 맞게 분류하는 작업, 엄청 큰 랩을 제 몸에 감싸고 물건을 포장하는 일도 했습니다.
그곳에서 숙련된 분들을 보면 정말 로봇처럼 일 처리가 빨라요. ‘전문가가 멀리 있는 게 아니구나’ 생각했어요. 그분들도 자신들의 분야 전문가인 거죠.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분들의 땀과 노력이 충분히 인정받아서 적절한 보상으로 돌아오고, 계층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싶더라고요. 지금의 내가 열심히 일하면 내일의 나는 더 나아진다는 희망이 있어야 노동의 가치가 더 올라가는 거잖아요.
안 될 거라고 불평만 하면 달라지는 건 없어요. 하루하루를 열심히 사는 분들을 내 눈으로 직접 보는 게 좋았어요. 저도 그래서 더 열심히 했어요. 제가 일하는 파트마다 “계속 일하지 않겠냐”면서 스카우트를 받았어요. 그럼 ‘오늘도 잘 살았구나’ 하면서 뿌듯해지죠.
Q. 인터뷰하는 장소인 테니스장 상태가 좋아 보이는데요. 지금은 상황이 달라진 건가요?
A. 생계를 위해 알바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테니스장 운영이 안정됐습니다. 알바하면서 돈만 번 건 아니었어요. 꾸준히 자기 개발을 했습니다. 편의점 알바하면서 손님이 없을 때에는 책과 동영상을 보면서 마케팅 공부를 했어요. 테니스를 잘 가르치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라 그걸 어떻게 홍보하느냐도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쿠팡 알바를 하면서는 오디오북으로 ‘세이노의 가르침’을 계속 들었습니다. 세 번은 반복해서 들은 것 같아요. 저자에게 계속 혼나는 기분이었어요. 정신 차려야지, 그래 여기서 멈출 수는 없지,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렇게 몇 달을 보내다 보니 이제는 웃으면서 그때를 이야기할 수 있을 상황이 됐고, “극복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습니다.
◇“쇼한다고 오해하는 이들도…전직 국회의원이면 꼭 높은 자리 가야 하나요?"
Q. 국회의원의 알바 경험담이 화제가 됐어요. 많은 사람이 관심 가질 걸 예상했나요?
A. 글쎄요, 한편으로는 전직 국회의원이 알바하는 게 왜 특별한 일이어야 하나 싶었어요. 사실 주변에서 “왜 알바하냐. 어디 좋은 자리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권력을 가진 사람들끼리 인맥을 이용해 한 자리 차지하고, 전직 국회의원이 되어서도 어려움 없이 산다는 게 사람들이 가진 이미지인 것 같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제 글을 보고 ‘쇼한다’고 오해하는 분들도 있었어요.
저 같은 사람이 당연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회의원도 자리에서 물러나면 평범한 시민이 되는 거고, 생계를 위해 다시 직업을 갖고 일하는 게 당연한 세상이요. 나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나를 대변해주는 세상이 되었을 때 국민은 정치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