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지난달 26일 산불 관련 대국민 담화를 위해 정부서울청사 브리핑룸으로 이동 중인 모습. 한 대행은 지난 8일 트럼프 미 대통령과의 통화를 시작으로 관세와 방위비 분담금을 포괄한 협상 작업에 들어갔다. /뉴시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8일 밤 통화는 미국 측 요청으로 성사됐다고 한다. 이 통화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와 방위비 분담금 등을 망라한 ‘패키지 딜’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우리 정부도 한 대행의 지휘 아래 본격 대응에 나섰다. 전문가들은 조기 대선까지 남은 두 달 동안 ‘한덕수호(號)’가 마련할 대미(對美) 통상 전략이 트럼프 임기 4년간 한미 관계를 사실상 좌우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한 대행은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통화 직후 백악관을 통해 “무역 협상에서 한국과 일본 같은 동맹을 우선하라”고 지시를 내린 점을 주목한다. 관세 전쟁으로 미국 주가가 폭락하고 물가 상승 조짐이 보이자 트럼프 행정부는 당장 보여줄 수 있는 성과가 필요해졌고, 이에 따라 관세 정책에 상대적으로 반발이 덜한 한국 등을 대상으로 우선 협상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미국이 시간에 쫓기는 만큼 한국 목소리를 더 반영할 여지가 생겼다는 분석이 나왔다. 정부는 이에 따라 조선업 같은 우위 산업을 바탕으로 협상력을 확보하고, 주한 미군 방위비 분담금은 유연성을 보이면서 관세를 완화하는 전략을 쓸 전망이다.

총리실 고위 관계자는 9일 기자들과 만나 미국과 하는 협상에 대해 “관세 조정이 최우선 목표”라며 “조선, 액화천연가스(LNG), 무역 균형 등 경제 통상 관계가 한 묶음으로 엮여서 관세와 협상이 된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밝혔다. 정부는 조선, LNG, 무역 균형 문제는 한 대행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먼저 언급했다고 한다. 세 분야 모두 미국이 해결해야 할 과제로, 우리가 협상 우위인 분야다.

그래픽=정인성

특히 조선업은 미국의 안보와 직결된 시급한 문제다. 미 해군 전력을 유지하려면 함정 유지·보수 정비(MRO)가 필수인데, 조선업이 쇠퇴한 미국은 자체적으로 MRO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정부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조선업 역시 ‘미국 땅’에서 부활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관련 산업 인프라를 갖추는 데만 수십 년이 걸릴 것”이라며 “현실적으로 한국 조선 업계의 도움을 받거나 한국에서 MRO를 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LNG를 언급한 건 미국의 알래스카 개발 프로젝트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지만, 이에 맞춰 미국산 LNG 수입을 늘리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한국은 중소 국가로서 유일하게 초음속 전투기까지 만들 역량을 갖췄고, 반도체 등 핵심 산업에 우위가 있으며, 미국 상품과 서비스를 살 구매력도 있다”며 “미국의 통상 전쟁에 전면전으로 맞서기보다는 협상의 칩을 바탕으로 대화에 나서면 된다”고 했다. 정부는 한국의 우호적 태도가 몇몇 우방국이 미국과 대립하는 모습에 대비되는 효과를 보고 있다고 분석한다.

정부는 이날 한 대행과 트럼프 대통령 통화의 뒷얘기도 일부 공개했다. 한국 정부는 지난달 24일 한 대행 복귀 때부터 트럼프 대통령과 통화하고자 타진했는데, 미 측에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8일 미국 측 요청으로 통화가 전격 성사됐다. 미 측이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심판 결과가 확정되자 한 대행을 실질적 대통령 권한대행자로 인식하게 됐고, 상호 관세 발효를 앞두고 주요 상대국과 개별적으로 협상을 시작하는 모습을 다른 나라에 보여주고자 한 것 같다는 해석이다.

방기선 국무조정실장은 “통화가 전반적으로 우호적 분위기에서 진행됐다”며 “한 대행이 트럼프 대통령과 초반에는 통역을 거쳐 대화하다가 후반에는 바로 영어로 이야기했고, 트럼프 대통령이 한 대행에게 ‘아름다운 영어(beautiful English)’를 쓴다고 칭찬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한 대행은 이날 페이스북을 통해 “게임 이론에서도 개별 플레이어들이 이기적인 선택을 반복하면 당장은 이익을 볼 것 같지만 결국은 모두가 손해를 보게 된다”며 “보복 관세로 강경 대응하는 나라도 있지만, 한미 동맹을 안보 동맹이자 경제 동맹으로 격상시켜 나가는 것이 보다 슬기로운 해법”이라고 했다. 한 대행은 “최선의 방식은 차분하게 상대방과 소통하면서 서로의 이익을 모두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을 끈질기게 찾아 나가는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