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왕 대신 조선-전하 격하/"어전회의 아무 이의제기 없었다"
/서지수집가 이종학씨 초대조선총독 데라우치가 한국침탈병합의 전말을
작성해 일본내각총리에게 보고한 한국병합시말 이라는 문건이 12일 공
개됐다. 지금껏 출판된 20여종의 관련국내-외 단행본 어디에도 소개
안된 내용이 일부 포함돼 있다. 그러나 서지수집가 이종학씨에 의해 공
개된 문건은 복사본. 이씨는 "일본정부의 기록보관소에서 비밀분류된 자
료를 수단껏 복사해온 것"이라는 선에서 함구했다. 72쪽에 이르는
문건은 1910년8월16일부터 병합전날인 21일까지 데라우치가 이완용
등과 접촉해 병합 으로 몰고 가는 장면을 생생히 담고 있다. 데라
우치는 일본에서 준비해온 각서를 이완용에게 보여준다. "일-한병합은
전쟁 또는 적대의 결과로부터 발생할 수는 없음은 물론, 오히려 화기애
애하게 협정을 수행하는 것으로 한황폐하는 시운의 추세를 거울삼아 ."
이완용은 병합 은 인정하나, 국호와 황제칭호에 대해 조그마한 고려
를 해줄 것을 청한다. 약간의 설왕설래가 오간다. 이완용이 한국
, 왕 이라는 안을 제시했을 때, 데라우치는 "병합되는 마당에 국호
는 무슨 국호이며, 조선 황제는 태공의 작위를 주겠다"고 응수한다.
이렇게 해서 국호는 조선 , 황제는 전하 로 타협된다. 8월21
일에는 순종이 주재하는 어전회의에 데라우치가 자신의 비서관을 참여케
해 "참석자중 이의를 제기한 이가 아무도 없었다"는 보고를 듣는 장면
도 나온다. 군대해산령(1907) 이후 근위보병대대 등이 남아있 었던
한국군대의 처리문제에 대한 기록도 있다. "해산병들이 폭도로 변해
시정에 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으므로 ." 한국군대는 조선주차군 사
령관에 예속된다. 문건 뒷 부분에는 일본군 기존병력 2천4백명에 1천
여명을 증원, 사방3리반마다 초소를 둬 정변에 대응한다는 내용의 한
국병합과 군사상의 관계 라는 부록도 붙어 있다. 지금 읽어도 가슴이
뛰는 자료이다. 최보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