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변방주민" 중국사통설을 반박 고구려유민과 함께 발해를
세운 말갈족은 이민족이 아니라 고구려의 변방주민들이었다 . 고대국가
발해가 소수의 고구려지배층과 다수의 말갈족 피지배층으로 구성됐다는
일반의 상식을 뒤집는 연구서가 나왔다. 발해사를 연구하는 한규철교수(
경성대)는 최근 펴낸 발해의 대외관계사 (신서원간)를 통해 "발해인
스스로가 말갈 이라 자처한 예는 중국이나 일본 어느 기록에도 찾아
볼 수 없다"면서 "발해의 건국세력 다수는 평양 중심의 고구려 왕실지
배층과 달리 송화강지역등에 살던 고구려의 변방주민들이었다"고 주장했다
. 한교수의 연구서는 발해는 말갈족이 세운 당의 지방정권 이라는
중국 역사학계의 완강한 통설을 공격하면서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독
립국가 라는 남북한 역사학계의 입장을 새로운 시각에서 강화하고 있다.
한교수는 먼저 "말갈이란 어느 특정 종족명이 아니라 중국동북방의
넓은 지역 이민족을 중국의 시각에서 통칭하여 부르는 것"이라며 "이것
은 중국사의 이민족 호칭에 대한 일반적인 예와 같이 중국 중심의 일방
적 낮춤말이었다"고 지적했다. 한교수는 "말갈로 표현되는 종족의
거주지는 종래 말갈의 선조로 불렸던 숙신-읍루를 포함해서 부여-고구려
의 선조였던 예맥등이 포함된 방대한 지역"이라며 "말갈족들의 거주 지
역을 놓고 한-중-일 각국의 역사학자들의 견해가 다양하지만, 백산말갈
은 오늘날 훈춘지역, 속말말갈은 오늘날의 길림시를 중심으로 한 송화강
중상류였다는 점에는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고구려
의 영역은 5세기 장수왕대를 기준으로 했을 때 서쪽으로는 요하(요동
반도 포함)를 넘어서고 서북쪽으로는 심양-개원까지를 포함하며, 북으로
는 길림지역을 넣고 동쪽끝은 훈춘과 영안, 남쪽으로는 아산만에서 조령
영일만을 잇는 선 이었다. 그렇다면 흑룡강너머의 흑수말갈을 제외한
6개부의 말갈거주지가 고구려의 영역에 포함되는데, 한교수는 "특히
송화강유역주민들(속말말갈)과 백두산 지역주민들(백산말갈)은 적어도 다
른 말갈로 불리는 지역의 주민들과는 달리 고구려 백성으로 볼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지적했다. 백산말갈등은 고구려왕실과 신속 관계에
있었고 말갈병사들은 안시성전투에서도 큰 활약을 했다. 신당서 의
동이 고려전 에 고구려왕이 말갈 사람 수만여명을 거느리고 요서지방을
치다가 등의 기록이 있듯이 백산-속말말갈은 고구려군대의 주요 부분
이었기 때문이다. 한교수는 "고구려가 멸망하고서도 당에 의해 임명된
보장왕이 요동에서 말갈과 함께 서로 통하여 고구려를 부흥시키려다 발
각되었다는 사실은 고구려와 말갈의 관계가 불가분의 관계였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설명했다. 또한 한교수는 발해의 건국시조 대조영을 가
리켜 중국사료가 말갈출신 이라 부르는 것은 송화강 출신의 고구려인
을 낮추어 가리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한교수는 "오늘날
경북 문경의 영순태씨, 황해도의 협계태씨 등이 그들의 시조를 대조영의
아버지로 알려진 대중상(걸걸중상)으로 삼고 발해 후손을 자처하고 있
는 것은 고구려와 말갈이 모두 한민족임을 입증하는 증거"라고 못박았다
. 박해현기자
입력 1994.05.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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