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넘게 캔버스대신 한지/화면 메운 먹의 흔적 웅장 화가 한영
섭씨(54.상명여대 교수)에겐 한지 화가 란 수식어가 붙어다닌다.
동양화가에게 이런 말을 붙인다면 사족이 될 것이다. 한지 화가 란
말이 한씨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그가 서양화가이기 때문이다. 상식대로
라면 당연히 캔버스에 유화 물감을 사용해야 할 그지만 20년 넘게 한
지만을 고집해오고 있고, 이것이 한국적 미감과 조형성을 드러내는 효과
적 방법으로 새삼 주목받게 되면서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관심도 최근들
어 날로 높아지고 있다. 이런 한씨가 최근의 신작들을 대작 중심으로
선보이는 전시회를 4일부터 13일까지 박영덕화랑(544-8481)에
서 열고 있다. 가로 6m, 세로 2.4m의 거대한 화면을 가득 메운
무수한 먹의 흔적들은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리듬처럼, 대자연의 움직임
처럼 보는 이를 압도한다. "72년부터 해온 작업이지만 한지가 지닌
재료적 특성과 효과를 이제야 좀 알 것 같습니다. 매사를 서양적 잣
대로만 해석하고 평가하려는 풍조가 싫어 나름대로 전통 미감을 계승할
방법을 찾다보니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한씨의 작업은 손으로
제작한 두께 5밀리짜리 대형 한지를 화면 삼아 여기에 화강암이나 식물
줄기 등을 탁본한 것을 무수히 오려 붙이는 방식이 기본을 이룬다.
서울 도심에 직장이 있으면서도 경기도 광주에 화실을 겸한 집을 짓고
자연과 벗해 살고 있는 그는 "단순한 선의 군집인 것 같지만 거기에는
매일매일 생활 주변에서 느끼는 자연의 경이로움, 자연과 나와의 관계
가 담겨있다"고 설명했다. "한지는 이런 주제들을 표현하는 데 가장
적합한 재료입니다. 닥나무의 거친 섬유질이 그대로 배어나온 한지는
이미 우리 역사와 정서의 일부가 돼버렸으며, 서양의 캔버스나 일본의
화지에선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포용성과 질박감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지요. 이런 한지의 물성을 살리기 위해 안료도 흙이나 치자 도토리
등 자연에서 채취한 것들만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씨는 서양화가
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한국한지작가협회의 산파역을 맡고 5년 동안 회장
을 지내는 등 한지 회화 의 확산에도 적극적이다. 그의 한지에 대한
정열은 국제적으로도 주목을 받아 두차례에 걸쳐 오사카 트리엔날레의
동상을 안겨줬고, 금년 들어서만 세차례의 일본 초대전을 갖게 했다.
또 곧 열릴 LA 인터내셔널 미술제의 렘바 화랑 초대전도 예약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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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5.04.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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