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 인정 그때 그 논쟁 재점화/"대통령과의 의리로 저지못해"
/종전 20년만에 미국이 "시끌" 30일은 베트남 공산화 20주년이
되는날이다. 베트남전 패전국 미국은 요즈음 온통 베트남 이야기다.
지난 16일 출간된 로버트 맥나마라 전국방장관(79)의 베트남전 회고
록이 도화선이 됐다. 맥나마라는 회고록에서 베트남전 파병이 엄청난
실수였음을 인정했다. 전직 동료들은 그의 배신 에, 참전용사들은
그의 두 얼굴 에 발끈했다. 반전론자들은 자기합리화 에 열을 올
렸다. 클린턴 대통령은 맥나마라가 자신의 징집기피 혐의를 벗겨주었다며
반겼다. 20여년전 미국을 갈라놓았던 그때 그 논쟁 이 다시 벌어
지고 있는 것이다. 맥나마라의 회고록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30년
동안 침묵으로 일관했던 베트남전 최고 실무책임자의 역사적 증언 이기
때문이다. 그는 "고딘 디엠 대통령의 암살이후 철군했어야 했다"고
술회했다. 베트남 사람들의 전쟁을 미국이 대신 이길 수 없었다는 것
이다. 그는 참전을 막지도 확전을 저지하지도 못했다. 케네디와 존슨
대통령에 대한 의리 때문이었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것이
국민에게 충성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게 맥나마라의 논리다. 그가
확전에 반대했다는 사실은 여러곳에서 나타난다. 웨스트모어랜드 전파월미
군총사령관은 회고록에서 "맥나마라는 제한 전쟁을 정책기조로 삼았다"며
"예비군 동원도 반대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백악관은 도미노이론의
환상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고 맥나마라는 밝혔다. 민주당 지도부는
1949년 중국을 잃었다는 짐 때문에 월남의 공산화를 간과할 수
없었다. 2차세계대전때 미국이 조기 참전했더라면 수백만명의 생명을 구
할 수 있었다는 당대 석학들의 논리도 베트남 파병을 부채질했다. 샌
프란시스코에서 신발장수의 아들로 태어난 맥나마라는 버클리대를 나온뒤
하버드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3년간 교수로 재직했다. 2차대전 때
육군 항공대 사병으로 입대했다. 그는 폭탄투하를 위해 전폭기가 1회
비행하는 데 드는 적정 연료와 적정 폭탄적재량 등을 수학적으로 계산해
내면서 신동 수학의 천재 로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됐다. 맥나마
라는 45년 소령예편과 동시에 미국 최대의 자동차 회사인 포드사에 1
만6천달러라는 연봉을 받고 스카우트됐다. 당시에 대기업 최고경영자가
받는 급여였다. 29세때의 일이다. 맥나마라는 업무의 효율성을 모두
수치화하는 등 과학적 경영방식을 도입, 대대적인 인원감축을 통해 포드
사를 흑자경영으로 돌려놓았다. 그는 15년만에 포드자동차의 총수가 됐
다. 케네디 대통령으로부터 국방장관 제의를 받은 것은 60년 말.
맥나마라는 케네디와 일면식도 없는 상태였다. 케네디는 "2차대전의 와
중에 방만해진 국방부를 포드에서 그랬던 것 처럼 정리 해 달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냉전의 절정기에 냉전수행의 첨병을 정리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어려운 일이었다. 64년말 미행정부와 백악관은 베트남에 파
병할 것인지 여부를 놓고 고심하고 있었다. 이때 맥나마라는 딘 러스크
국무장관과 헨리 캐봇 로지 주월대사 등의 강경론에 소극적 인 동의
를 하고 말았다. 그는 회고록에서 "나의 첫 실수이자 최대의 실수는
베트남 민족주의에 대한 무지였다"고 고백했다. 전쟁은 수학계산이 아
니었던 셈이다. 미국은 이 전쟁에서 5만8천명 사망, 15만3천명 부
상이라는 대가를 치렀다. 그는 국방장관을 물러나 68년부터 81년까지
13년동안 세계은행총재로 재직했다. 맥조지 번디, 아더 슐레진저 등
케네디 행정부 시절 동료였던 하버드의 천재들 이 모두 회고록을 쓰
는 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던 그는 "미국의 앞날이 베트남전의 멍에 로
가로막힐 수 없다는 생각에 펜을 들었다"고 했다. 최우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