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상자 뜯어먹으며 연명/갈증-배고픔-암흑과 "고독한 싸움"/옆에
있던 두여인 숨지자 공포감 엄습/구조대 지나칠땐 "될대로 돼라" 잠청
해/누울만한 공간 장난감기차로 무료함달래 갈증과 허기, 죽음의 공
포, 외로움 . 매몰된지 2백30시간만에 기적적으로 살아나온 최명석군
(21.수원전문대 2년 휴학). 최군은 인간의 생존 한계를 벗어난 최
악의 조건에서도 삶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최군의 생환 과정을 수기
형태로 정리해본다. 편집자주 목요일(6월29일) 오후였다. 근무시
간이 끝나는 5시 조금 넘어 친구 강선이와 여자친구 정화가 내가 아르
바이트하는 지하1층 수입 신발코너로 찾아왔다. 근처 매장에 근무하는
누나 등 4명과 함께 간식을 먹으러 지하3층 직원식당으로 내려갔다.
간식후 정화가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고 해 아이스크림 매장으로 갔
다. 아이스크림을 먹다 평소 잘 대해주던 신발판매 매장의 조장과 누나
들이 떠올라 3개를 추가로 주문했다. 친구들에게 잠시 기다리라고하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1층으로 올라왔다. 뭔가 평소보다 어수선한 분
위기였다. 그때가 6시5분전쯤이었다. 갑자기 휭휭 하는 회오리바람
이 불어왔다. 쿵쾅 소리도 났다. 순간 벽이 쩍쩍 갈라지며 천장이
내려앉는게 아닌가. "무너진다" "빨리 도망쳐"라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아우성치며 이리저리 도망쳤다. 나도 힘껏 뛰었다. 얼마쯤
달렸을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밑으로 떨어지는가 싶더니 정신을 잃
었다. 깨어보니 암흑이었다. 뒷머리에 통증이 오고 팔꿈치가 아팠다.
갇힌 공간은 고개를 숙이고 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 누우면 발을 쭉
펼 수 있었고 양팔을 뻗으면 양쪽 벽에 닿았다. 엎드리기도 하는 등
수시로 자세를 바꿨다. 연기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양말을 벗
어 바닥에 고여있는 물에 적셔 코를 막았다. "사람있어요"하며 소리를
질러보았다. 여자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주방용코너에서 일하는 이승
현 누나와 아주머니 한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누나는 팔과
다리가 어디 있는지 안보인다며 울먹였다. 나는 "구조반이 곧 올 것
이다. 포기하지 말고 기다리자"고 했다. 하루쯤 지났을까. 두 사람은
"자꾸 물이 차오른다"고 호소했다. 꼬륵꼬륵 물넘어가는 소리가 들렸
다. 누나가 "나 먼저 가요. 소식좀 전해주세요"라고 말했다. 그게
마지막 대화였다. 익사했다는 걸 알았다. 아주머니는 벌써 숨졌는지 아
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갑자기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왔다. 날짜
라도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 라이터를 켜 보았다. 물에 젖어 파란
불꽃만 보였다. 낮인지 밤인지 분간이 안됐다.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손을 머리위 콘크리트 틈새로 뻗어보니 싸늘한 여자 손이 잡혔
다.이렇게 죽다니 . 이틀후면 그만 둘 계획이었는데 . 군에 입대하기
위해 휴학계를 내고 5월부터 아르바이트를 한 것이 후회됐다. 목이
말랐다. 윗도리를 벗어 빗물을 적셔 마셨다. 너무 배가 고팠다. 종
이상자를 뜯어 먹었다. 얼마나 배가 고프면 이게 목구멍으로 넘어가나
신기할 정도였다. 빗물이 바닥났을 때 오줌물을 받아 먹을까도 생각했다
. 그러나 도저히 먹을 엄두가 안 났다. 갈증과 허기를 참을 수가 없
었다. 에라, 살려주려면 살려주고, 말려면 말라 는 심정이었다. 완
구점에서 날라온 장난감 기차로 무료함을 달랬다. 어느날 눈을 떠보니
머리위에서 간간이 돌이 떨어졌다. "오후 5시까지만 작업을 한다"는
마이크 소리도 들렸다. 있는 힘을 다해 "사람살려요"라고 고함을 쳤
다. 대답이 없었다. 틀렸구나 하는 절망적인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
죽고 마는구나 . "에라, 모르겠다." 또 잤다. 며칠이나 지난걸
까. 주위가 약간 환해졌다. 구멍으로 빛이 들어왔다. 다시 한번 힘껏
소리를 질렀다. 이때 "밑에 누구 있느냐"는 구조대원들의 소리가 들
렸다. 내 이름을 정신없이 외쳐댔다. "최명석, 최명석!" 구조대원들
이 머리위 콘크리트 구멍속으로 플래시를 비췄다. 드디어 나를 발견한
것같았다. 이제 살았구나 . 사이렌소리와 사람들 소리가 들려왔다. 어
디선가 "명석아"하는 어머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리=양근만-김동석
기자 *인터뷰자청 최군 일문일답/"이틀쯤 자고 일어난 기분"/생존자
더 있을것 콜라 마시고 싶어 최명석군은 강남성모병원에 옮겨진후
"마치 이틀쯤 자고 일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주위에서 기자들과의
인터뷰를 만류하자 "괜찮다. 얼마나 말을 하고 싶었는데 "라며 인터뷰
를 자청, 11일동안 죽음의 공포, 외로움과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는
지 잘 보여줬다. 다음은 일문일답. -갈증과 허기를 어떻게 견뎌냈나
. "갈증은 빗물로 겨우 달랬고, 허기는 사과를 담았던 종이 상자를
뜯어 먹었지만, 턱없이 모자랐다. 정신이 혼미했지만 반드시 구조대가
올 것이라고 믿었다." -주변에 사람이 있었는가. "보이지는 않
았지만 바로 옆에서 신음하던 백화점 동료 이승현씨(25.여)와 아주머
니 한사람이 있었다. 하루후 이들이 화재를 진압하기 위한 소방수에 익
사한 것으로 생각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나와 같은 경우가 더 있을
것이다. 생존자 구출작업을 계속해야 한다." -가장 어려웠던 순간
은. "비가 안 와 갈증날 때가 힘들었다. 또 여자 2명이 죽은 것
을 보고 나도 죽는구나 생각했다. 깨 있으면 죽음에 관한 생각이 자꾸
머리에 떠올라 의식적으로 잠을 자려고 했다. 부모님과 형제들, 여자
친구 얼굴이 떠올랐다. 그럴수록 살아남아야 한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 (최군은 일문일답도중 계속 친구들 이름을 불러가며 살았는지 물어
보았다.) -특별히 아픈 곳은 없는가. "진짜 운이 좋았다. 붕
괴순간 머리 등에 약간의 충격을 받았지만 괜찮다. 팔꿈치 등이 약간
아플 뿐이다." -가장 하고 싶은 것은. "우선 먹고 싶다. 콜라
를 가장 마시고 싶다. 퇴원하면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양근만-김동석 기자
입력 1995.07.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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