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환사절 내공귀가」.
11층 내과의사 당직실 출입문 안쪽에 씌어있는 문구. 「중
환사절」은 중환자가 없길 바라는 것으로 짐작되나 「내공귀가」는 선뜻 이
해가 안간다. 무협지에서 봤음직한 내공이란 단어에 의사들은 별스러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내공」은 「중환자를 피하는 능력」을 뜻한다. 야
간당직 의사는 밤새 중환자가 한명도 생기지 않길 바라고 이미 퇴근(귀
가)한 의사는 다시 호출당하는 일이 없기를 기원하는 일종의 부적인 셈
이다.
사회의 특정계층·집단마다 자기들끼리만 아는 은어가 있듯 병원도
예외는 아니어서 점잖지 못한 속담 속어 비어도 있다. 의사
들 사이에서도 적지않은 은어들이 제조-유통된다. 제조책은 주로 주치의
라 부르는 레지던트 1∼2년차들이 맡고있다. 군대로 치면 최일선 지휘관
격인 이들은 병원내 생생한 진료현장을 누비는 사람들이다.
/// 인턴들이 무서워하는 「」 ///.
우선 환자와 관련된 은어가 있다. 응급실에서 중환자를 입원시킨다는
연락이 오면 주치의 입에서 「대박 맞았다」는 말이 튀어나온다. 큰 대+
피박의 준말이다. 작살났다는 뜻이다. 수시로 환자를 돌봐야하고 혈압이
라도 떨어지면 다른 일은 손도 못댄다. 중환자 하나가 경환자 스물을 당
해 낸다는 「일당이십」이란 속담이 생겨났다. 심장이나 호흡이 느닷없이
멈추면 주치의는 초비상이다. 즉시 심장 마사지와 인공호흡에 돌입해야
한다. 의학용어로 「시피알」(CPR·심폐소생술)로 부르는 이 순간 병동의
다른 업무는 올스톱. 엎친데 덮친격으로 같은 병동에 시피알이 또 터질
때가 있다. 「쌍피알」이며 고스톱의 「양박」이다.
사망한 환자에게 시피알을 해야할 때가 있다. 『가족들이 아직 다 안
왔다』며 『올 때까지 살려달라』는 경우로 이때는 「쇼(show)피알」을 한다.
어찌보면 산사람이 죽은 사람을 고생시키는 셈이다. 주치의 업무를 보조
하는 인턴나름대로의 중환자가 있다. 매년 3월 첫 근무를 시작하는 인턴
의 스트레스는 혈관주사. 소아과는 더욱 그렇다. 인턴은 핏줄이 살속으
로 꼭꼭 숨어버린 피둥피둥 살찐 「」을 무서워한다. 외제 타이어
의 마스코트와 꼭 닮은 데서 나온 말이다.
이밖에도 인턴을 기죽이는 일들은 병원 도처에 깔려있다. 6년 공부로
의사면허시험에 합격했지만 환자들한테 『인턴 말고 의사는 없나요』하는
소릴 듣는다. 여기에는 병원측이 자초한 면이 있다. 진단-치료 등 본격
적의 사수업은 제쳐놓은 채 필름 찾기, 검사예약, 처방전 복사, 혈액채
취 등 환자들 보기에도 「전혀 의사같지 않은 일」만 하는 것이다. 교수
회진시간에 맞추어 방사선 필름을 급히 찾아야 할때 「따끈따끈」이라는
형용사가 쓰인다. 따끈따끈한 필름을 현상기가 토해내자마자 「식기전에」
배달해야 한다. 의사일도 없고 교육도 없이 잡일만 하는 인턴을 그들은
자칭 「일턴」이라 부른다.
지난 92년 서울지역 전공의 협의회 조사에 따르면 인턴의 하루 평균
근무시간은 19.2시간. 휴일-연장 근무를 밥먹듯 하지만 수당은 없다. 밤
을 꼬박새기 일쑤지만 당직비는 5천원이고 다음날 정규근무가 뒤따른다.
군복무 기간도 쳐주지 않고 퇴직금이 아까워서인지, 인턴수료후 곧 바로
레지던트에 진입해도 퇴사-재입사 형식을 거친다. 이런 신세를 「임시잡
급직」이라 부른다. 의사가 세월좋았던 시대는 갔고 일한 만큼은 받아야
겠다는 신세대 「일턴」이 등장하면서 불만이 증폭되고 있다고 한다.
어느 과의 경우 필름찾기 전담 인턴이 있다. 인턴은 근무시간당 임금
수준이 병원내 전직종을 통틀어 최하라고 주장한다. 이게 사실이면 병원
측은 대단히 「효율적」인 인력관리를 하는 것이다. 인턴의 또 다른 스트
레스는 간호사와 겪는 갈등관계. 외부에는 청춘남녀로 비치지만 실은 견
원지간이라고 한다. 인턴 본인들의 경험이 별로 없다는 열등감에다 「인
턴주제에 아는 체」 식의 간호사 심리가 마찰을 일으킨다. 이런 충돌은
일이복잡한 중환자실에서 자주 일어난다고 한다. 중환자실 인턴은 자신
들을 「간종」(간호사의 종)이라고 부른다. 물론 「애숭이 인턴」을 잘 가르
치고 도와주는 간호사도 있다. 이들은 「천사」다.
병원이라고 맨날 바쁘라는 법은 없다. 「비가오면 환자가 없다」는 「유
비무환」시간도 있다. 실제로 비올 때는 응급실과 외래진료실 환자가 줄
어든다. 「껌환」이라는 은어도 있다. 말 그대로 껌같은 환자, 중환자의
반대 뜻이다.
수술 후 별탈 없이 실밥 풀 날만을 기다리는 환자들이다. 유사어로
「에스오엘」(SOL)이 있다. 공간점유병소(space occupying lesion)의 머리
글자인 SOL은 「병실만 덩그러니 차지한다」는 「공간점유 환자」를 말한다.
『병원 입원은 난생 처음이다』는 환자는 「생신환.」 발음은 「쌩」이다. 병
원당국은 SOL을 빨리 내보내고 생신환으로 채우고 싶어한다. 하지만 몸
이 두쪽이라도 모자랄 판인 주치의로서는 품이 거의 안드는 SOL이 퇴원
하면여간 섭섭한 게 아니다.
///// 소독기구 세트는 「도시락」 솜은 「반찬」 ////.
종종 껌환이나 SOL이 의사를 괴롭힐 때가 있다. 소홀히 대접한다는
생각에 불평이 많다. 또 중환자와 달리 의식이 또렷한 탓에 의료진의 친
절도를 평가하려 든다. 중환자 가족은 온통 환자의 의학적 상태에만 관
심이 있기에이런 문제를 따질 겨를이 없어 불평을 늘어놓는 일이 적어진
다. 이래서 「중환자는 말(불만)이 없다」는 속담이 탄생한다.
산부인과 주치의는 분만실을 들어서면서 『오늘은 타잔이 많다』거나
『타잔이 적다』는 말을 한다. 분만대기중인 산모의 「아∼」하는 비명이 타
잔의 외침인 것이다. 주치의들의 연령분포는 20대후반∼30대초반. 70년
대에 주말마다 TV앞에 모여 흑백영화 「타잔」을 보며 자란 세대이다. 타
잔과 관련된 말은 또 있다. 하복부나 골반부 수술시 성기를 가려주는 초
미니 삼각팬티를 가리켜 「타잔빤스」라고 부른다. 여자환자한테는 「제인
(타잔의 애인)빤스」를 입힌다. 실은 별도의 팬티는 없고 거즈를 대고 반
창고를 붙이는 식이다.
역시 인턴 몫이다.
또 80년대의 시위문화에 익숙한 세대들이 지어낸 「짱돌」도 자주 쓰인
다. 짱돌의 의미는 세가지. 중환자, 성질이 괴팍한 사람, 잘못된 치료가
그것이다. 중환자나 짱똘은 둘다 일단 피하고 볼 상대이다. 중환자가
다른 병동으로 옮겨가면 「짱돌 날아가는」일이다. 성질이 못된 주치의는
짱돌 주치의고 짱돌 간호사는 의사들의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리는 사람
이다. 글자는 짱돌이지만 발음은 「짱똘」이다. 치료방향이 틀렸을 때는
「짱돌짓」이라고 주치의를 나무란다. 「닭짓」도 같은 뜻. 시시콜콜한 것까
지 챙기는 의사는 「옵세」라는 별명이 붙는다. 강박적이란 뜻의 정신과
용어인 「옵세시브」(obsessive)가 어원이다. 주위 치료진을 짜증나게 하
지만 환자는 덕을 보고있다.
식당이나 호텔 분위기가 느껴지는 은어들도 있다. 『도시락 두개만 싸
주세요. 반찬 듬뿍 넣어서요.』 『밥상은 차려졌나.』 『룸서비스는 온답디
까.』 도시락은 소독기구 세트고 반찬은 소독약이 적셔진 솜이다. 실제로
양은 도시락이 소독세트로 쓰인다. 반찬을 적게주면 「째째하다」 「짜다」
소릴 듣는다. 수술-마취기구를 늘어놓는 일을 「상 차린다」고 한다. 이게
의대생 입에 오르내리면 뜻이 달라져 시험 직전 커닝자료를 책상에 잔뜩
써놓는 일을 뜻한다. 거동이 불가능한 환자는 이동용 촬영기가 병실을
방문, 엑스선 사진을 찍는다. 병실로 촬영장비를 몰고 다니는 일이 호텔
「룸서비스」를 연상시킨다. 재미있는 일은 정작 당사자인 방사선과 기사
는 이런 은어를 모르는 채 병동 의사와 간호사들끼리만 통한다는 것.
의대생이 처음 배우는 은어는 「족보」이다. 왕년에 출제됐던 시험문제
이다.
족보중의 족보는 「왕족보」. 외울 것이 엄청나 족보를 무시하고 「나름
대로」를 고집했다간 낙제를 각오해야 한다. 겉표지에 『탈족보에 왕자없
다』는 경고문구가 쓰인 족보도 나와 있다. 말이 기출문제들이지 의대를
졸업하려면 대략 1만여쪽에 5만개 이상을 달달 외워야 한다.
/// 구토증 일으키게 하는 사람은 「VIP」 ///.
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면회-점심 시간에는 가히 승강기
타기 전쟁이 벌어진다. 은 4개 병동이 연결돼 한 층을 이룬다.
이중 2병동과 5병동 복도 끝에 한가한 승강기가 있는데 속도가 무척빠른
「쌕쌕이」이다. 독자들이 잘 기억해둬야할 대목이다.
「VIP증후군」은 귀하신 몸을 잘 대해주려다 일이 오히려 꼬이는 경우
를 말한다. 수술상처를 적게 하려다 재수술 삼차수술로 이어지는 일 등.
무례한 환자나 보호자를 대하려면 구토증(vomiting)을 참을 줄도 알아야
한다. 이들도 VIP, 「구토증유발인사(vomiting inducing person)」이다.
「피장사」는 대량출혈시 대량수혈로 맞서는 일이다. 「물장사」도 있다. 환
자의 소변량 설사량을 측정, 수분공급량을 계산하는 것이다. 수분이 과
잉공급되면 「물에 빠트리는 일」이다. 항문에 호스를 꼽는 대신 4ℓ나 되
는 물약을 벌컥 들이켜는 식의 관장은 「물고문.」.
복부수술을 주로하는 외과의사는 인체의 주요 배설물인 대변에 익숙
하다.
복막염환자를 개복하자마자 대변과 농이 뒤섞여 나오면 「똥바다.」
수술시 부어있던 대장이 터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복강내부가 세균덩어리
나 마찬가지인 대변에 오염된다. 오염을 뜻하는 콘테미네이션(contamin
ation)을 붙여 「똥타미네이션」으로 부른다. 이같은 불상사를 막기위해
수술전 「똥푸는 일」(관장)이 있는데 물론 인턴 「짭(job)」이다. 맹장염으
로 진단하고 수술에 들어갔으나 멀쩡한 맹장일 때는 「꽝」이라 한다. 맹
장염 오진율이 무려 20지만 이는 현대의학으로도 난공불락이라고 한다.
진단율 100인 의사는 큰일내는 사람이라는 것. 확증을 잡을 때까지 무
작정 기다리다 「똥바다」를 만들기 일쑤고 애매한 환자한테는 정상판정을
남발한다.
이비인후과는 「오공청소과」. 귀 코 입의 다섯개 구멍을 말한다. 정형
외과 수술실에서는 뚝딱거리는 망치소리가 들린다. 실제로 수술도구도
재질이 특수하다는 것만 빼놓고는 망치 끌 드릴 톱과 다를 바 없다. 정
형외과 의사는 「목수」다. 병든 뼈를 들어낸 후 금속핀을 골수에 심고 골
시멘트를 붙이는 수술을 「철근콘크리트 친다」고 한다.
진료를 하다보면 다른 과 교수에게 의뢰서를 작성하는 일이 있다. 말
미는 「선처바랍니다」로 끝나는게 보통. 「고진선처를 앙망하나이다」 하는
어색한 문어체도 등장한다. 『환자를 죄인 취급하는 것 같아 이런 표현은
안쓴다』는 주치의도 있다.
YS DJ JP같은 호칭도 있다. 내과 김노경교수는 NK, 김정룡교수는 CY,
일반외과 김진복교수는 JP로 통한다. 이따끔 공식문서인 진료기록부에도
나타난다. 박사의 「박」을 따다 붙이기도 한다. 정형외과 석세일교수는
석박, 일반외과 최국진교수는 최박, 박용현교수는 용박이다. 교수의 회
진은 치료방침 결정에 절대적 도움을 주지만 주치의 일을 방해할 때도
있다. 병동 출현과 동시에 주치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차트 찾고 필름
걸고 간단한 브리핑까지 마쳐야한다. 이를 「손님접대」로 부른다. 차트에
쓰는 의사들의 휘갈기는 글씨가 영어의 세계라면 의사들의 말은 은어의
세계다. 차트의 영문표현을 의사들은 은어의 일종으로 생각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