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최강과 겨뤄보고 싶었죠"...서 부상, 일시귀국 ###.


전쟁을 즐기는 까닭일까. 아니면 그 무엇 때문에…. 의 전설적
인 레종 에뜨랑제(외인부대) 병사들은 지금은 포성이 멈췄지만 남의 땅
에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있었다.

「꽝 꽈광.」 지난 1월 말 귀를 에일 듯한 눈보라가 휘몰아 치던 어느
날 오후. 외인부대중에서도 최정예 부대인 「공수 제2연대」가 평화이행군
(IFOR)작전을 위해 주둔 중이던 사라예보의 제트라 스타디움에서는 고막
을 찢는듯한 굉음이 울렸다. 얼마 전인 1월14일 인근 병참부대
에서 3명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을 당한 세르비아계의 폭발물 테러가 있
었던 직후라비상이 걸렸다.

다행히 세르비아계의 공격은 아니었다. 세르비아계 병력으로부터 노
획한 폭발물의 해체작업을 하던 중 조작실수로 발생한 사고였다. 타이티
출신의 병사 1명이 즉사하고 그곳에서 5m쯤 떨어져 있던 한 병사는 양
쪽다리에 파편이 박힌 채 폭발시 폭풍으로 기절을 했다. 즉시 로 후
송된 그 병사는 동양계…다름아닌 한국인이었다. 해병대 출신의
유단자인 정학민(26)씨.

///// 책 보고 결심, 부모도 모르게 행 /////.

그로부터 3개월여 후인 5월10일. 정씨가 김포공항에 모습을 나타냈다.

사고 후 1개월간의 치료를 마치자마자 외인부대 요원답게 사라예보로 복
귀, 임무를 완수한 후 특별휴가를 얻어 고국을 찾은 것이다. 그가 부모
에게 조차 외인부대 입대를 알리지 않은 채 지난해 4월28일 로 떠난
지꼭 1년 하고도 12일 만이었다.

그가 코르시카섬에 주둔 중인 공수연대로 복귀하기 하루 전날인 5월
24일 기자는 수소문 끝에 그를 만났다. 1백80㎝의 키, 군살 하나 없는
단단한 체구의 그가 내민 손바닥은 나무껍질처럼 딱딱했다. 1년간의 극
한훈련 때문인지 그의 눈빛은 두려움이라고는 없는 듯 빛나고 있었다.

의 샹송가수 에디트 피아프가 1937년 「나의 외인부대원」이란 히트
곡에서 노래했듯 아가씨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외인부대 병사의
눈빛은 바로 그런 것이었으리라. 기자는 3시간 가까이 그가 외인부대에
지원하게 된 동기와 그곳의 생활들을 생생히 들을 수 있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공수연대에만 9명의 한국인이, 외인부대 전체로는
22명의 한국인이 활약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외인부대에서 「가
장 우수하고 무서운 군인」이란 평을 받으면서. 정씨를 만났을 때 가장
궁금했던 것은 『도대체 왜 이름도 낯선 외인부대를 자원하게 됐을까』 하
는 점이었다. 2년간의 병역의무에도 진저리를 치는 것이 보통 한국남자
들의 모습이 아닌가.

더구나 그는 국내에서 가장 훈련이 힘들다는 해병대 근무까지 마친
후였다.

『모험심 때문이었다고 할까, 아니면 담력을 시험하고 싶었다고 할까
요. 남자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용맹스런 일에 한 번 도전하고 싶었습니
다. 세계를 다니며 평화를 위한 전투에 참가하는 외인부대는 그런 점에
서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는 한 마디 덧붙였다. 『세계 각국의 내로라하
는 전투요원들과겨뤄보고 싶다는 욕구도 없지 않았습니다.』 사상 최강
부대라는 명성의 외인부대를 몸소 체험하고 싶었다는 모험심의 발로. 그
가 말한 이유였다.

해병대 시절 정씨는 동료들과 『국내에서는 해병대가 가장 용감한 부
대지만, 외인부대와 비교하면 어떨까』 하는 비교를 곧잘 하곤 했
었다. 92년 8월 제대 후 사촌형 밑에서 빌딩 관리업무를 하던 중 「외인
부대」라는 책을 읽고는 곧바로 행을 결심한 그이다. 저자에게 자문
을 구한 끝에 외인부대를 제대한 한국인이 에서 「 지엔느」란 카
페를 운영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가족들에게는 『취직하러 간다』는 말
만 남기고 95년 4월28일 행 에어프랑스기에 올랐다.

/// 월급 첫 1년간 22만원, 3년 돼도 85만원 ///.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정형편이나 여자문제 때문은 아니었을까. 직
접 물어보았다. 애인은 아직 없고, 장남인 자신을 포함해 2남1녀인 그의
가정형편은 그리 넉넉하지는 않지만 일산에 아파트 한 채 지니고 살 만
한 정도였다. 또 외인부대의 월급수준을 듣고 나니 『목숨을 걸고 남의
나라를 위해 싸우는데 수입은 상당할 것』이라는 추측은 사실과 달랐다.

월급은 처음 1년간은 1천5백프랑(22만5천원), 2년째부터는 4천5백프랑
(67만5천원). 3년차가돼도 5천7백프랑(85만5천원)이다. 국내 직업군인들
도 그 정도는 받는다는점에서 돈이 주된 목적은 아닌 듯했다. 물론 생활
수준이 낮은 등 동유럽과 중국 등 아시아 용병들
은 돈을 벌기 위해 외인부대에 뛰어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외인부대에
는 1백10개국 출신이 뒤섞여 있다.

공수연대에서 근무하는 나머지 한국인 8명도 대부분 모험심이나 극한
상황에 도전해 보고 싶어 5년 계약의 외인부대원이 됐다는 것이 정씨의
설명이었다. 카포랄(한국군의 병장에 해당)인 하모씨(28)는 한국의 공수
부대 출신으로 자신의 극기력을 시험하기 위해 입대한 케이스라고 한다.

그는 3단에 공수연대에서 마라톤도 챔피언급. 부대에서 가장 인
정받는 용병이라고 했다. 하씨와 공수부대 동기인 김모(28)씨, 한국의
대북 공작부대 출신인 윤모(25)씨를 포함해 카포랄은 4명. 한 계급 아래
인 포미 크라스(상병)가 정씨를 포함해 4명이다. 외인부대 경력 15년이
넘은 박모(54)씨는 산전수전 다 겪고 현재 공수연대장의 운전병 역할을
하고 있다. 체력만 안 딸리면 40세까지 외인부대를 노크할 수 있다.

전원 유단자인 이들은 부대의 「부탁」에 따라 장을 운영
중이다. 외국인 용병과 군인가족 등 수련생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터
프가이들을 모아놓다 보니 얼굴색과 말이 다른 용병들끼리의 주먹싸움이
잦을 수밖에 없다. 한국인의 숫자(94년까지만 해도 외인부대 전체에 6명
뿐이었다)가 적고 가 덜 알려졌을 때 덩치가 비교적 작은 한국인
은 싸움의 표적이었다. 그러나 한국인의 격투기가 소문나면서 싸움의 횟
수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외인부대의 오바뉴(Aubangne) 본부측 소개에 따르면 총 부대원 8천
5백 명중 북한출신 4명도 끼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5백 명
가량 되는 공수연대에는 북한 출신이 없다』고 정씨는 말했다. 외인부대
는 코스시카섬의 공수연대 외에 본토에 오바뉴 본부를 비롯 5개
연대가 주둔하며, 타이티의 무루로아섬, 기아나, 의 마요트섬과
지부티에도 각각1개 연대씩이 파견돼 있다.

정씨에게 폭발사고로 입은 부상 정도를 묻자 대수롭지 않다는 듯 파
편이 박혔던 양쪽 다리의 상처부위를 보여주었다. 살점이 흉하게 패어
있었다. 흉터를 쓱 한 번 쓰다듬더니 경험담을 털어 놓았다.

외인부대의 4개월간의 신병 훈련기간 동안 배운 더듬거리는 어
실력으로 정씨가 에 도착한 것은 지난해 12월13일쯤.
평화협정안이 엘리제 궁에서 서명되기 하루 전이었다. 세르비아계
영토에 인접한 모스타르 지역은 온통 폐허였다. 『박살이 난 건물더미 사
이로 시체가 보일 때는 솔직히 두렵더군요. 해병대 근무를 했지만 실제
전투는 처음이니까… 6.25의 참상을 간접적으로 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
다.』 평화이행군 자격으로 땅을 밟은 정씨의 주 임무는 피난민
후송과 경호업무.

평화협정안이 서명됐다지만 세르비아계의 간헐적인 테러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긴장을 풀 수는 없었다.

--- 벙커에서 맞은 크리스마스 이브 ---.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를 정씨는 정찰지역 벙커 속에서 맞았다. 폐허
속에서도 캐롤은 울리고, 임무 중이었지만 8명의 팀원들과 함께 술도 한
잔씩 걸쳤다. 내리는 함박눈이 고향의 향수를 일깨울 때쯤 「전투준비」를
알리는 긴급무전이 날아들었다. 정찰 중이던 전차부대 중대장이 적의 총
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이 들더군요. 급
박한 상황에서는 어고 뭐고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팀원들과 의
사소통이 안돼 우왕좌왕 하면서도 손에 땀이 채일 정도로 총을 꽉 쥐고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날 세르비아 병력의 철수로 정면충돌은 없었
다.

외인 공수부대의 1개 소대(섹션)는 약 30∼40명. 각각 7∼8명으로
구성된 80㎜포팀, 대전차 포팀, 2개의 보병팀 등 5개 팀으로 나뉘어
진다. 이중 정씨는 팀의 부사수. 그의 팀은 테스와프(28)라는 프랑
스인 세르종(하사) 아래 인이 2명, 및 인이 각 1명,
그리고 인 1명이 포함돼 있다. 인인 비작(23)과 인
라작(22)은 5년 동안돈을 벌어 고국에서 장사를 하기 위해 입대했고, 호
주출신의 헤리슨 병장은 월급을 받는 즉시 술과 여자에 써버려 언제나
빈털털이다. 외로움과 공포 속에서 6개월을 한 팀으로 뛰는 동안 이들은
정이 들 대로 들었다.

1월10일쯤 정씨의 소대는 사라예보로 이동,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제
트라 스타디움에 주둔했다. 공병이 컨테이너로 꾸며 놓은 간
이 막사에서 지내며 정찰, 호송, 무기 노획 작전을 벌이던 중 그만 폭발
사고를 당하고 만 것이다. 『제 부상은 부상 축에도 못 낍니다. 부대원들
중에는 「영광의 상처」를 가진 베테랑들이 적지 않습니다.』 가깝게는 걸
프전, 유고 내전에 이르기까지, 1831년에 세워진 외인부대는 1백55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정씨는 『외인부대 입대 후 한국인의 강인성을 절감했다』고 자랑스레
말했다. 특히 4개월간의 외인부대 신병훈련은 유럽 군인들 사이서 「지옥
훈련」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국군의 정규훈련을 이수한 사람이면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씨와 함께 훈련소에 입소한 21명
가운데 3명은 육체적 한계를 호소하며 탈영했고, 1명은 동맥을 끊어 자
살소동까지 벌였다. 훈련소까지 가는 과정도 쉽지는 않다. 서류지원을
한후부대내에서 1달 반 가량을 대기하며 신체검사, 체력검사를 통과해야
한다. 최소한 11분 동안 1천8백m는 뛸 수 있어야 하고, 이 기간 중 매
일 10㎞ 구보, 턱걸이, 팔굽혀 펴기 등 기초체력 훈련을 받고서야 훈련
소입소자격이 주어진다.

훈련소 입소 전까지는 얼마든지 포기가 가능하다. 포기하겠다면
행 교통비까지 줘서 돌려보낸다. 하지만 일단 훈련소 문을 들어서면 외
인부대원 신분이다. 이때부터 병영을 이탈하는 자는 탈영병 취급을 받으
며, 탈영병은 등 5개국에 입국이
금지되는 「요주의 인물」로 낙인 찍힌다.

첫 1개월은 「팜」(농장)이라 불리는 야전에서 기초체력 훈련을 쌓는다.

처음 10㎞ 정도로 시작하는 행군이 1백㎞로 늘어나면 1달이 지난다. 구
보,사격, 기계화 교육 등 각종 과학화 군사훈련을 거치면서 입소시 한국
군인에게 크게 뒤떨어져 보였던 서양인들이 4개월 후면 당당한 외인부대
원으로 변한다. 그리고 마지막 4일간은 약 1백50㎞ 전투행군이 기다린다.

오바뉴 산악지역의 고풍스런 성까지 낙오 없이 도달하면 비로소 훈련병
의 머리에는 외인부대의 전설을 상징하는 흰색 모자 「캐피 블랑」이 씌워
진다. 이렇게 외인부대원은 만들어진다.

정씨는 『모험을 원하는 젊은이라면 외인부대에 한 번쯤 도전해 볼 만
하다』면서 『뜻이 있으면 어를 열심히 배울 것』을 충고했다. 외인
부대는 상병까지는 연차순으로 진급하지만, 병장부터는 엄격한 능력별
승진제도이다. 한국 용병의 강인함과 전투력은 정평이 나 있어 어
실력만 겸비하면 일류 외인부대 용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