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0월22일 아침, 태국 북부에서 4백여㎞를 유유히 흘러내리며 수천년 역사 현장을 지켜온 차오프라야 강 줄기 앞에 새로운 역사가 펼쳐지고 있었다. 햇빛에 반사돼 더욱 찬란한 위용을 과시하는 병력 수송선 세 척과 왕실 근위대 호위선 두 척. 크롱토이항에선 피분 송그람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거행된 출정식이었다.

6월25일 전쟁이 터지자 한국과 미국은 7월14일 안보리에 파병을 공식 요청했다. 엿새 뒤, 참전 16개국 중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태국이 안보리에 파병을 통지했다. 7월29일 북한의 침공에 대응한다는 공식발표를한 태국은 곧이어 1만4천9백98명 규모로 21전투단을 창설했다.

그해 10월22일 출정한 정예 대대 장병 1천4백91명은 11월7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한국전 발발 4개월 12일만에 최전선에 투입된 태국군은 미 제2보병사단에 예속, 평양 탈환 명령을 받은 미군과 함께 개성·수원· 오산 지역에 배치됐다.

● 폭찹 전투서 중공군에 대승, 「작은 호랑이」 별명

태국의 한인들은 해마다 9∼10월엔 눈코뜰 새 없다. 9월말 추석 잔치, 10월1일 국군의 날, 3일 개천절, 22일 태국군 한국전 출정 기념 행사, 전사자묘소 참배, 참전협회 방문, 용사 자녀 위로와 장학금 전달 등으로 마치 한국전 파병 전야와 같은 숨가쁜 행사들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마침 북한이 잠수함을 침투시켜 무력 도발을 자행한 요즈음이기에 한·태 교류의 중요성을 감안하면 금년의 이런 행사들은 더욱 뜻이 깊다.

태국군은 연 1만5천여명이 참전, 1백38명이 전사하고 4백69명이 부상 했다. 또 52년 11월1일부터 12일간 중공군과 벌인 폭찹(PORKCHOP)전투에서 는 전사에 기록을 남기고 「작은 호랑이」란 별칭을 얻기도 했다. 태국군은 휴전 뒤에도 56년까지 대대 병력이 전후 복구를 지원했고 72년 5월 중대병력이 최종 주둔지에서 철수, 장장 22년간에 걸친 파병을 끝냈다.

한국전 참전협회 회원 면면을 보면 그들이 과연 최정예 엘리트 장교라는 말이 실감난다. 타놈 키티카초른, 크리앙사크 초마난, 차티차이 춘하반 등 총리 세 명과 현 부총리 차발리트 용차이유트와 솜분 리홍 등 부총리 다섯명이 나왔고, 국방장관 네 명, 차관급 이상 각료 20여명,장성급 인사 1백78명과 대령급 인사 40여명을 냈다.

또 현재까지도 장성 30여명이 현역 복무하고 있으며 육해공군 사령관 급장군 12명이 최근 군 인사가 있을 때까지 근무하고 전역했으나 앞으로 2∼3명 이상 더 배출될 전망이다. 정치, 경제, 언론, 외교 무대에서 약 50명이 활약하고 있고, 특히 11월7일 있을 총선에서 차발리트 용차이유 트현 부총리와 차티차이 춘하반 전총리가 차기 총리 물망에 올라 참전협 회회원으로 4번째 국가 수반이 나올 전망이다.

● 파타야는 알아도 참전 기념탑 모르는 한국인

과 파타야 중간 지점인 촌부리 시내 태국 왕실 육군 제2사단 21 보병연대. 한국전에서 용맹을 떨친 이 최정예 부대는 왕비 근위대로 태국 국경 중 가장 민감한 지역을 방위하고 있다. 바로 이곳에 한국산 대리석으로 만든 참전 기념탑과 기념관이 있다. 그러나 그 숱한 한국인 관광객 가운데 혈맹의 상징인 이곳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태국 사람들과 재태 한인회, 몇몇 대사관 관계자들만 때가 되면 기념식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태국은 이 기념식을 94년부터 왕실 주관 행사로 한 단계 높여 거행하고 있다.

최근 필자가 한국인 여행 안내원에게 부탁한 태국 신혼여행 한국인 1백쌍 대상 설문조사 결과는 매우 충격적이다. "태국이 한국에 참전한 혈맹이라는 사실을 아는가"하는 질문에 "안다"는 응답은 두 쌍뿐이었고 89쌍이 "모른다" 9쌍이 "설마 그랬겠느냐"며 설문 자체를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태국 명문 출라롱콘 대학에서 필자가 직접 조사한 결과는 극히 대조적이어서 34명이 "알고 있다" 76명이 "모른다"로 나타났다. 태국 주재 한국대사관 무관부 이한구 대령은 "이제 우리도 경제 대국이 되었으니 자유 수호를 위해 목숨을 걸고 노력한 태국 각계 각층 한국 전참전 용사 인맥을 묶어 어떤 식으로든 그들에게 답할 차례"라며 "세계 유일 공산 집단과 대치하고 있는 실정에 혈맹인 태국이 한국에 잘못 알려져 있는것을 바로잡고 국제적 지지 기반을 공고히 하기위해 노력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한국인 관광객이 연평균 45만명 지나치는 길목에 태국군 한국 참전 기념탑과 전쟁 기념관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섹스 관광·보신 관광으로만 날을 지새고 파타야의 추억만 간직하고 간다면, 우리는 역사를 지나치는 민족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 "한국 발전에 뿌듯" 한국 참전협회 회장 차웽 용차런 예비역대장

지난 10월11일 오후 2시경 참전협회를 방문, 차웽 용차런(77) 예비 역 대장을 만났다. "안녕하세요." 차웽 대장은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다. 52년 3월5일 한국전이 가장 치열할때 육군 소령으로 1년간 참전한 그는 69년엔 주월남 사단 총사령관을 지내기도 했다. 80년 대장 전역, 두차례 상원의원 경력도 있다.

-- 어떻게 참전했나.

"당시 태국군 총병력은 약 10만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한국 참전 지원병을 모집하자 1만5천명이 지원했고, 나는 그 가운데 한명이었다."

-- 전후 한국은 몇 번 가 보았나.

"다섯번 가 보았는데 그 때마다 가슴이 뿌듯하다. 청년 장교 시절 목숨을 걸고 싸운 나라가 지금은 선진국이되어 태국을 경제적으로 돕고 있으니…. 우리가 1개 사단을 파병한 월남이 공산 국가가 된 것만 보아도 한국은 대단한 민족이다."

-- 가장 기억나는 전투는.

"역시 52년 11월 철원 폭찹 전투다. 11월 1.6일·10일 중 공군의 세 차례 인해전술에 맞서면서 25명이 숨지고 79명이 다쳤지만 직접 확인한 중공군 전사자만 321명, 전사 추정이 190여명, 부상 350 명에 무기를 상당히 획득하면서 「작은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또 한국정부에서는 은성무공훈장 12개와 동성무공훈장 26개를 받았다."

-- 당시 총지휘관은.

"나중에 총리까지 지낸 크리앙사크 초마난 중령이었다. 내 직속상관으로 용맹스러운 장교였다."

-- 파병 당시 기록이나 사진들을 보관하고 있나.

"(흑백사진 1백여장과 참전 대대기를 보여주며) 셀 수 없이 많다."

-- 회원들 근황은.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다. 병석에있는 사람들도 많아 문병도 다니고 그 후손을 위한 사업을 하느라 바쁘다."

출처 / 6·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htt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