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띠를 졸라매고 자녀 과외를 시키는 학부모들이 누구나 한번쯤 그려
보는 것이 이다. 출세와 명예가 보장되며 일류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이런 기대가 1백80도 틀리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최근 들어 「를 버리는」 졸업생들이 생겨나고
있다. 아직은 소수이지만 그렇게 얻기 힘들었던 졸업장과 규격화
된 인생을 포기하고 자기만의 적성과 재능을 새로 찾아나선 사람들이다.
를 나와 다시 전문대학에 입학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현상은
대뿐 아니라 등 적어도 일류 직장, 안정된 인생이 보장되
는 다른 대학 출신도 마찬가지다. 「간판」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던 학벌
만능 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분명 「외로운 이단자」들이다. 그럼에
도 하고 싶은 일, 신바람 나는 일을 찾겠다는 이단자들의 행렬은 분명 새
로운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외롭지만 용감한 사
람들이다.
● 『내가 좋아서 한다는데…』
경영학과 출신 강승문씨, 서 허드렛일.
지난해 9월 ()에 입사한 강승문(27)씨는 사무실 막내
이다 보니 허드렛일을 도맡아 한다. 시즌인 요즘 하루 2∼3시간
씩 언론사 등에 팩스 보내기, 서류 심부름, 신문 스크랩 등이 그가 하는
일이다. 음성정보 서비스 등록 업무나 공식 후원업체 지정
을 위한 시장조사 등에도 참여하지만 대부분 자질구레한 일들이다. 월급
은 90만원정도. 공인회계법인, 외국 금융회사, 대기업 등에서 일하는 대
학친구들에 비하면 적은 편이다.
이런 강씨의 학벌을 알고 나면 머리를 갸우뚱거리는 사람들이 많다. 95
년 경영학과 졸업. 고3 시절 전교 1∼2등은 해야 지원할 수 있는
학과이다.
강씨가 계에서 일하겠다며 에 입사하자 부모들은 펄쩍 뛰었
다. 『 졸업장이 아깝지도 않느냐.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며
만류했지만 그는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 출신이 를 위해
일하면 안되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내가 좋아서 선택한 길이기 때문에
좋은 직장에 다니는 친구들보다 월급이 훨씬 적어도 상관없는 것 아닙니
까.』 강씨는 『 졸업장이 출세의 보증수표가 되는 시대는 지난 것
같다』면서 『원하지 않는 일과 희망하지 않는 길을 남들이 하니까 따라하
는 사람은 바보들』이라고까지 말했다. 그의 표정은 밝기만 했다.
그렇다고 강씨는 기획조사부 일만 평생 할 생각은 아니다.
경영학과 출신에게는 이단 지역인 계이지만 「출세」할 영역은 얼
마든지 있다고 그는 확신하고 있다.
『남들은 나를 별난 사람으로 보지만 단 운영을 마케팅 관점에
서 선진화시키는 일이야말로 제 전공을 확실하게 살리는 일이라고 봅니
다.』 강씨는 『연간 적자가 80억∼90억인 각 구단을 그룹 홍보 차원에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흑자를 남기는 독립기업으로 만들어야 한다』면서 「스
포츠 마케팅」에 인생의 승부를 걸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강씨가 자신의 길을 택한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야구 사랑」 때
문이다. 9살 때부터 가졌던 꿈이라고 한다. 『유니폼 차림에 야구 글러브
를 끼고 잔디밭에 서면 가슴이 두근대고 세상 부러운 게 없었고 지금도
그 느낌은 그대로입니다.』.
중·고교 시절 교과목 암기보다 기록 암기에 더욱 자신 있던
그였다. 어떤 경기에서 누가 굿바이 안타를 날렸고, 홈런 갯수는 몇개인
지 훤했다. 고3 자율학습 때도 야구 경기를 보기 위해 교실을 몰래 빠져
나가기도했다. 하지만 강씨 역시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부모와 선생님들
이 주입하는 일류대 논리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학교수업이 끝나면 영
어·수학 과외를 받았고 영어 단어장과 수학 공식, 그리고 국어 교과서의
고문 등을 기계적으로 달달 외었다.
그 결과 경영학과에 합격했지만 그는 『 무슨 과를 나왔다
는 꼬리표가 늘 붙어다니는 것이 싫었다』고 말했다.
● 『나보고 다들 부럽대요』
불어교육과 출신 충무로 막둥이 송능한 감독.
자신의 첫 영화 「넘버3」를 제작중인 송능한(38) 감독은 출신이
라는 이유 때문에 오히려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
는 간판이 왜 손해가 된다는 것이냐』며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많
겠지만 그가 뛰어든 충무로 영화제작 현장은 실제 출신을 경원하
는 분위기다. 를 나온 영화인들이 거의 없을 뿐 아니라, 더불어 영
화를 만들어야 하는 팀원들이 별로 접해 보지 않은 출신에 노골적
으로 거부 반응을 보이는 현실 때문이다. 그래서 출신이라는 사실
조차 한동안은 감추고 지내기도 했다.
사대 불어과를 졸업한 송 감독 자신도 『영화를 하는데 졸업장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말했다. 『 해서 머리를 싸매고 입학
했지만 4년간 학교를 다니고 나서 보니 별 의미가 없었다는 생각』이라는
것이다.
송 감독은 사실 진학을 결정할 때부터 고민을 해야 했다. 어렸
을 적부터 꿈이 영화감독이었던 송 감독은 『영화를 하는데 꼭 대학을 가
야하느냐』는 의문을 가져왔던 것이다. 연극영화과를 가볼까도 했지만 그
가 대학에 진학할 당시 연극영화과는 감독 교육보다는 연기자 과정 중심
이었다. 부모의 성화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학교성적이 아깝기도 해 서
울대 시험을 치르기로 했다. 굳이 불어과를 선택한 것은 중·교 때부터
집근처 프랑스 문화원에서 자주 영화를 관람했던 것이 인연이 됐다고 한
다. 영화를 하려면 프랑스어를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그의 생활 4년도 영화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교내 영화 서클
「얄라성」에서 선후배들과 단편영화 제작에 심취해 학창시절을 보냈다. 문
제는 졸업 후였다. 영화감독이 되는 시험이 별도로 있는 것도 아니고 친
구들이 대기업 등에 취직해 「 출신의 길」을 가는 모습을 보고 그도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83년 모 신문사 2차 필기시험에 합격했지만 적
성을 생각해 포기했고, 대우에는 최종 합격했지만 마지막 순간 입사를 포
기했다. 출신 아들에 대한 부모의 바람과 다른 출신들이
걷는 모범적 삶을 뒤로 하고 그는 자신의 꿈과 자유를 찾아 충무로로 갈
길을 정했다.
그는 당시 영화감독의 꿈을 함께 꾸던 박광수·김홍준 감독 등과 함께
남영동 판잣집 같은 곳에서 살며 공사판 일까지 했다. 를 졸
업한 공사장 인부…. 어떤 때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지만 표준적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85년 합동영화사에 9개월 근무한 것이 넥타이를 맨 유일한 경력이었다.
근무시간에 시나리오를 쓰다 상사의 지적을 받은 후 이곳도 사표를 던졌
다. 이후 결혼을 했고 생계를 위해 방송작가 생활도 했지만 충무로에 대
한 그리움은 지울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93년 고졸 출신인 임권택 감독
의 「태백산맥」 각본을 맡으면서 그토록 원하던 충무로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다.
요즘 송 감독은 『공인회계사, 교수 등 다른 길을 걷고 있는 대학 친구
들이 저를 만나면 부럽다고 야단』이라고 즐거워한다.
● 『이렇게 재미있는 걸…』
공대 다니다 과 다시 들어간 박성준씨.
음대 과 1학년인 박성준(20)씨는 같은 학교의 공대 산업공
학과를 3년이나 다닌 뒤 다시 입학시험을 치른 별난 학생이다. 다른 사람
들은『도대체 왜 바꿨느냐』고 의아해 하지만 본인의 대답은 간단하다. 『뭐
가 특이합니까. 을 하고 싶어 과에 다시 시험을 쳤을 뿐이죠.』.
박씨는 과학고를 졸업한 후 지난 94년 산업공학과에 합격했지만 곧 후
회했다고 한다. 『주위의 권유로 공대 행을 결정했지만 막상 입학하
고 보니 인간공학이니 고등수학이니 하는 개념이 제대로 와닿질 않았습니
다. 학교생활이 즐겁지도 않았고….』.
맞지 않는 적성에 답답했던 그는 온라인 잡지 대학기자, 총학생
회선거 유세지원 등 비공대적인 서클 활동에 더 열중했다. 특히 동
아리인 「여민락」에서 해금을 연주할 때면 모든 걱정이 사라지는 편안함을
느꼈다고 한다. 의 깊이를 하나하나 배워나가는 게 신비롭기까지 했
다. 순간 그는 자기가 미래를 바쳐야 할 분야가 무엇인지 발견했다고 했
다.
더이상 고민하지 않고 그는 대입시험을 다시 치기로 결정하고 배워본
적 없는 이론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공대 시험준비를 할 때와는 달
리 수능시험 준비가 정말 신이 났습니다.』 부모는 결사 반대였다. 『합격
발표가 난 후에도 부모님은 등록을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제가 정말 해
보고 싶은 공부라면서 계속 설득한 끝에 겨우 허락을 받았습니다.』.
박씨는 외면당하고 있는 을 서양음악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최선
을 다할 생각이란다. 『좋아서 뛰어든 분야니까 더욱 열심히 해야겠죠. 현
장교육이나 민간단체에서 일하면서 이 뭔지를 알리겠습니다.』 그
는 『공부가 이렇게 재미있는 줄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 적성에 맞지 않
았던 산업공학과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재미라고 했다.
● 『내가 선택한 고졸 인생』
DJ 남궁연 ·신학대 모두 중퇴.
『우리나라 교육은 정말 잘못돼 있습니다. 개인이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지를 책임지는 것이 교육일진대 성적 하나로 모든 것을 비교하는 것은
우습지 않습니까.』.
방송 리포터, DJ, 드러머, 작곡가로 맹활약 중인 남궁연(30)씨도 한국
의 교육제도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한 사람이다. 세칭 명문대인 연대 영문
과를 포기하고 자신의 적성과 재능을 찾아 어렵지만 용기 있는 길을 걸어
왔다.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만 하더라도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었다. 하
지만 고교 2학년 때 공학박사이자 교수였던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이과를 선택하면서 『내 인생을 사는건지, 부모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건
지』 고민이 시작됐다. 약간의 일탈 끝에 문과로 옮겼지만 『대학이 진정
내가 원하는 길이냐』는 고민은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결국 연대 영문
과에 입학하자마자 학교를 그만두고 평소 동경했던 록 음악을 전공으로
택했다. 86년「작은 하늘」이라는 무명 록 그룹의 드러머로 잠시 활동을 하
기도 했으나 『대중음악에 인생을 거는 게 자신이 없어』 87년 목사가 되고
자 감리교 신학 대학에 지원했다. 그러나 신학도 그의 길은 아니었다. 그
에게는 음악이 새로운 구원이었다. 방위 복무 시절 근무가 끝난 저
녁 이태원의 클럽 「올 댓 」에서 살다시피하며 음악의 참맛
에 눈뜨게 된 것이다.
결국 신학대학도 중도에서 포기한 채 92년부터 직업 연예인으로 나섰다.
아버지와 윤보선 대통령 외손녀인 어머니는 이 무렵 완전히 그를 포기했
다고 한다.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인생극장 테마 음악과 「종합병원」의 테마 음악
을 만들면서 인정을 받기 시작한 그는 각종 라디오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하며 서서히 지명도를 높여갔다. 그러다 메인 DJ가 휴가를 가는 동안
잠시 그 프로그램 진행을 맡아 실력을 인정받았고, 현재는 의 「스트레
스 제로」와 KM TV의 「록 스트리트」의 진행을 맡고 있다. 자신을 「내가 선
택한 당당한 고졸」로 표현하는 남씨는 음대 출신 아내와 살고 있
다.
91년 결혼 당시 그의 장인은 『판사나 검사에게 시집보내려 했는데 웬
악사냐』며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한달 수입 1천만원이 넘는 능
력 있는 사위가 됐다. 『원하는 음악을 하면서 남부럽지 않게 사는데 학벌
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