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들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10대 중고생들이 자신들의 적나라한 성관계 장면을 담은 비디오를
만들어 뿌린 '빨간 마후라' 사건. 지난 7월11일 모방송사가 서울시내
중고생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나돌고 있던 비디오테이프 복사본을 입
수, 공개하면서 외부에 알려진 사건이다.
허겁지급 수사에 착수한 경찰은 "외국의 여느 포르노 배우와 견
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면서 천호동 윤락가에 대한 탐문수사에
역점을 두었지만,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술집여자가 틀
림없다"고 단정했던 장본인이 중학생으로 밝혀진 것이다.
눈길이 여자주인공 최모(15·서울 S중 2년)양에게 쏠린 건 당연한
일. 최양은 촬영당시 여중 1학년을 자퇴한 상태로 지난해 4월과 8월
두차례에 걸쳐 서울 S공고 2학년 김모(17)군의 집에서 비디오를 찍었
다.
●출연 여중생은 초등학교 때만 해도 모범생.
고교생들 사이에서 이 필름이 '빨간 마후라'로 불린 이유는 출연
자들이 목에 빨간 스카프를 매고 등장하기 때문. '비디오를 보다-주
연 최○○'라는 한글 자막으로 시작하는 이 비디오는 런닝타임이 30
여분 가량으로 1,2부로 구성돼 있다.
남자 2명과 여자 1명의 출연자들은 번갈아 성관계를 갖는데 외국
포르노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장면들이 자주 등장한다. 성행위 도중
외부로부터 전화가 걸려오자 "○○는 집에 없는데요"라며 전화를 끊
은 뒤, 천연덕스럽게 다시 시작하는 장면도 있다.
여주인공 최양은 실제 나이 보다 훨씬 앳된 외모로 사람들을 또한
번 놀라게 했고, 수사를 통해 최양의 삶이 한꺼풀씩 벗겨지면서 '놀
라움'은 곧 '경악'으로 변해갔다. 최양은 아버지가 벽지도매상을 하
는 중산층 출신 외동딸로 초등학교 시절만 해도 반장을 맡았었다.
'착하고 수줍음 많던 소녀'가 탈선의 길로 접어든 것은 초등학교 5학
년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몸져 눕고, 어머니가 간병에 정신을 못차
리게 되자 '사랑 결핍증'을 느낀 최양은 집밖으로 나돌기 시작했다.
탈선은 중학교에 입학한 후 더욱 심해졌고, 95년 봄 학교 선배를
따라 비디오방에 놀러 갔다가 '첫경험'을 가졌다. 비디오에 함께 등
장한 김모군을 알게 된 것은 그해 9월 학교축제때. 반 대표로 나온
'오빠'의 현란한 춤솜씨에 반한 최양이 먼저 데이트 신청을 했고, 만
나자마자 김군의 집 안방에서 성관계를 가졌다고 한다.
그후 매달 2∼3차례씩 김군의 집과 비디오방 등에서 관계를 가지
면서 최양은 김군에게 사랑을 느끼기도 했지만 김군은 달랐다. 그 사
이에도 다른 고교생 언니 5∼6명과 엽색행각을 벌였던 것. 자포자기
의 심정이 된 최양은 그해 12월 가출, 커피숍에서 우연히 만난 삐끼
의 소개로 서울 강동구 화양리의 모 단란주점에 취업했다.
술시중으로 밤을 새고, 낮엔 주점에서 잠을 자는 올빼미 생활이
계속되던 지난해 4월초. 오랜만에 김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반가운 마음에 집으로 찾아간 최양은 또 다른 오빠가 와 있고, 캠
코더까지 설치돼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최양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던 오빠들이 "평소하던 대로 놀면서 비디오로 찍자"고
제안했다. 최양은 처음엔 펄쩍 뛰었지만 "곧 바로 지우겠다"며 거듭
졸라대자 마지못해 촬영에 응하기로 했다.
최양은 막상 촬영에 들어간 뒤에는 마치 배우라도 된 양 시종일관
깔깔대며 촬영을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최양은 이에대해 자술서
에서 "'이왕 버린 인생, 마음편히 놀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두번째 촬영은 넉달뒤인 8월초 어느날. 장소는 역시 김군의 집.이
번엔 K고 1년 최모(17)군이 조연역을 했다. 한번 해본 일인 만큼 2명
을 동시에 상대하는 장면까지 스스름 없이 연출했다.
그 뒤 단란주점 단속에 걸려 잠깐 경찰서 신세를 지기도 했던 최
양은 "먹고 살기가 힘들어" 스스로 집으로 들어갔다. 새출발을 하고
싶었던 최양은 지난 3월 S중학교로 재입학한 뒤, "대화는 없고 몸만
요구하는 오빠들"을 멀리하기 위해 전화가 와도 핑계를 대며 만나지
않았다.
●뚜렷한 동기도 없어 "즐기는 단계".
최양은 그후 몇몇 아는 오빠들로부터 "비디오에서 널 본 것 같다"
는 말을 듣고 잠시 불안에 떨기도 했지만, '설마…'하고 곧 잊어버렸
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집에서 TV 뉴스를 보다 '낯익은 장면'을
보고 머리가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내 인생은 여기서 끝이구나….".
고심하던 최양은 '무슨 일이고 다 상의했던' 어머니(47)에게 "저
게 바로 나"라고 털어놨지만 이번엔 어머니도 속수무책이었다. 최양
은 "엄마가 왠만한 건 다 이해하시더니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고 말했다.
모녀가 속만 태우고 있는 사이, 비디오 배포선을 추적하던 경찰의
수사망은 하루가 다르게 좁혀져 왔다. 첫 보도가 나간 지 사흘째 되
던 날 오후, 최양은 집에서 경찰에 의해 연행됐고, 이를 지켜본 어
머니는 실신했다.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우리 애라니…", "그렇게
애지중지 키웠것만…." 소식을 듣고 경찰서로 부랴부랴 달려온 다른
학부모들 또한 대부분 충격을 이기지 못해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비디오의 주연들은 대부분 정상적인 가정의 중산층 출신. 김군의
아버지는 의류공장 사장, 최모군의 아버지는 미8군 사무원이었으며,
비디오를 배포한 이모군의 아버지는 국방부의 간부급 직원이었다. 특
히 부모의 불화, 이혼 등 이들이 비행 청소년으로 빠질 만한 뚜렷한
동기도 발견하기 어려웠다. 서울 송파경찰서 한흥진 강력3반장은 "우
리 10대들이 성을 즐기는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아이
들은 오래전부터 '자유분방한 성'을 즐기고 있었는데도 부모들은 짐작
조차 못하고 있었다"라고 개탄했다. 이를 뒷받침하듯 김군 경찰에서
진술한, 지난 1년동안 자신과 관계한 서울 강남일대 여중고생의 이름
과, 이들과 벌인 엽색행각들이 A4용지 두 장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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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어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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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마후라' 사건은 워낙 충격적이었던 만큼 무성한 뒷얘기를 남
겼다. PC통신에서는 '10대의 타락상'에 대한 책임소재를 두고 세대간
논쟁이 불붙는가 하면, 샐러리맨들의 단골 술안주로 등장하면서 어떻
게든 테이프를 구해보려는 '아저씨'들의 몸부림을 낳기도 했다.
사건이 불거진 뒤 PC통신에는 빨간 마후라와 관련된 글이 매일 수
십개씩 올라왔다. 20대를 자처하는 한 PC통신 이용자(TOLE527)는 '빨
간 마후라는 30, 40대가 만든 것이다'는 글을 통해 "보도를 보면서 군
침을 삼킨 30, 40대가 더 한심하고 역겹다. 10대들이 도대체 왜 그 모
양으로 되었는가! 성적타락을 부추기고 그러한 환경을 만든건 도대체
누구인가! 바로 30, 40대가 아닌가…"라며 '기성세대'를 겨냥했다. 이
에대해 한 30대 이용자(MISO5193)는 "좋든 나쁘든 지금의 토양은 80년
대 피를 흘리며 투쟁한 젊은이들이 만들어놓은 것이다. 그대들이 누리
는 자유도 지금의 30∼40대가 일궈놓았고, 우리나라의 경제를 이끌고
있는 사람들도 거의 다 30∼40대"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20세이상 성인들만 이용할 수 있는 천리안 '성인클럽'의 게시판에는
"빨간 마후라 테이프를 급히 구한다"는 사설광고가 40여건이나 올라와
어른들의 '위선'을 여실히 보여주기도 했다.
한편 사건을 지휘한 수사검사들은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짐으로써
'모방충동'을 불러일으켜 범죄를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우려
된다"고 걱정하기도 했다.
실제로 서울 세운상가 등 음란비디오의 주요 공급처에서는 '빨간 마
후라 아류작들이 나돌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7월15일 오후 세
운상가에서는 20대 초반 호객꾼 한 명이 "고등학생이 출연하는 빨간 마
후라 후속탄이 계속 나오고 있으니 언제든지 오라"고 외쳐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