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부 최후의 24시간
⑨ 울분 ##.
김재규는 전날(25일) 오전 대통령에게 보고 차 왔다가 돌아가는 길
에 비서실장실을 들렀다. 그는 김 실장에게 불평을 털어놓았다.
"각하께서 부산사태에 신민당이 개입했다고 하시는데 아무리 찾아
도 증거가 안나오니 큰 일입니다. 이런 문제는 차지철이가 각하에게
그릇된 정보를 보고하여 일어난 것인데…. 그 새끼를 그냥 없애버려야
겠는데…. 이 놈을 어떻게 하지요? 내가 꼭 없애버리겠습니다.".
김 실장은 김부장이 또 대통령에게 질책을 당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알았어, 알았어"라면서 달래어 보냈다.
김재규는 남산 사무실로 돌아와서 오전 11시40분에 소회의를 소집
했다. 국내담당인 전재덕 제2차장, 김정섭 제2차장보, 현홍주 기정국장
을 불렀다.
그날 오후로 예정된 대통령 주재 부마사태대책회의에서 현홍주 국
장이 보고할 내용을 검토했다. 김재규는 현 국장이 종합한 보고서를
읽어보더니 몇 가지 수정을 지시했다.
공화당 유정회 등 여권이 신민당을 대할 때 의연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라는 취지의 자구 수정지시였다.
25일 오후 2시 청와대 소접견실에서 안보회의가 열렸다. 대통령과
안보관계 장관들 및 청와대 참모들이 참석했다. 현 국장이 부마사태의
원인을 분석하여 보고하는 내용중에서 '장기집권에 대한 불만'이란 이야
기가 나오니까 대통령은 "정부의 실정보다는 김영삼의 조종이 더 큰 이유
다"라고 지적했다.
대통령은 보고를 다 듣고는 이런 요지의 지시를 했다.
"부산 마산 사태의 원인은 첫째 정보활동의 미흡, 둘째는 시위를
초동단계에서 진압하는 데 실패한 점, 셋째는 일선 공무원들의 부조리로
인한 민심의 이반이다. 야당이 현재처럼 기고만장한 데는 여당의 책임이
크다. 우리나라에서 데모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한 계속될 것이다.".
박정희는 미군이 우리의 국방을 맡아주고 있다는 생각을 국민들
이 가지고 있는 한 시위에 따른 안보상의 불안에 대해서는 책임있게 판단
하지 않고 마구 행동하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이었다.
그는 "자주국방을 하지 못하면 진정한 독립국가도, 책임 있는 국민
도 될 수 없다"고 말하곤 했었다.
당시 부산지역 계엄사 합동수사본부가 부산시민 1백 명을 상대로
이번 시위사태의 원인을 조사한 자료가 있다.
가장 큰 시민들의 불만은 김영삼 의원직 제명(13%)이었고, 물가폭
등과 부가가치세에 대한 불만이 두번째였다(12%). 이어서 장기집권에 대
한 불만(11%), 정책에 대한 불만(11%), 정부 자체에 대한 불신(10%), 언
론탄압(9%) 차례였다.
박정희 유신정권 전반에 대한 불만이 시민들 사이에서도 확산되어
있었던 것이다.
부마사태에서는 파출소가 습격을 받고 진압차량들이 불타기는 했으
나 사망자는 없었다.
이 사태의 심각성은 상인과 봉급생활자 같은 중산층이 학생들편에
서서 응원도 하고 가담도 했다는 점이었다. 4·19 이후 처음 있는 일이
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산층이 학생편을 들고나오면 정변이 생긴다는
하나의 공식이 있다. 부산 현지 시찰을 한 김재규는 '이것은 민란이다'
라고 파악했는데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본 셈이다.
박 대통령은 이 사태를 계기로 정부 요직을 개편하여 국정을 쇄신
하려고 마음을 정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무렵 김계원 비서실장도 천
거할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정보부 외사국 조성구 국장은 26일 점심을 아세아건업 이건사장과
함께 했다. 이 사장의 회사에는 김계원 실장의 장남이 전무로, 동생이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어 그의 정보는 가치가 있었다. 이 사장은 조 국장
에게 이런 말을 했다.
"정보부장과 경호실장 사이가 나빠 비서실장이 중간에서 골치를 앓
고 있다고 합니다. 김 부장에 대한 대통령의 신임이 최악의 상태에 있
는데 아마도 11월 초순에는 정보부장이 경질될 거라고 합니다. 후임에
는 김치열 법무장관이 유력하다고 합니다.".
이건 사장의 이 정보는 상당히 정확했다. 예컨대 김치열 장관은
23, 24일 양일간 대통령에게 불려가서 시국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
고 정보부장으로 임명하겠다는 시사도 받았었다.
정보부장의 경호원인 안전과 안전3조 요원 홍성수의 합수부 진술에
따르면 김재규 부장은 부마사태가 터지고 신민당 와해공작이 진행되고 있
는 격동기임에도 불구하고 이즈음 일찍 집에 돌아오는 편이었다.
10월17일 화요일은 오후 4시40분 귀가, 20일에는 밤 9시40분 귀가,
22일에는 저녁 8시30분 귀가, 23일에는 오후 5시40분 귀가, 25일엔 저녁
8시쯤 귀가.
이것은 김 부장의 건강이 격무를 감당할 수 없는 단계에 와 있었음
을 짐작하게 한다.
이날 김재규의 심리상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79년 10월28일에
그가 합수부 수사관 앞에서 자필로 쓴 1차 진술서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1차 진술조서는 그가 대통령을 쏴 죽인 뒤 이틀만에 쓴 것이기 때
문에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논리를 개발하기 전의 비교적 순수한 상
태의 고백이란 장점이 있다.
동시에 가혹한 고문이 가해진 뒤에 쓰여지는 진술서일 경우에는 수
사관의 의지가 많이 반영된다.
[정국이 시끄러워지고 야당의 활동이 적극화됨에 따른 본인의 수습
안이 실패를 반복함에 따라서 사실상 무능력한 것이 노출되었습니다. 본
인및 형제 등의 이권 개입으로 인하여 각하로부터 직접적인 경고 내지는
친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경호실장 차지철은 사사건건 업무
에 관하여 월권행위를 자행하고 있었으며, 군 후배이고 연하자인 그로부
터 오만불손한, 개인적인 수모를 수차에 걸쳐 당하였습니다. 또한 각하
가 차 실장을 편애하는 데 대하여도 불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대통령은
최근 중요 보직자의 인사를 단행할 예정이었는데 거기에 본인이 포함될
것이라는데 대하여 불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본인도 정권을 잡아 대통
령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으며, 현재 정계인물 중 최적의 대통
령감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부산 마산 사태가 일어났
습니다. 이 사태는 학생들의 소요라기보다는 민간인의 소요로서 민란
이라 판단하여 지금이 각하를 제거할 적기라고 생각했습니다. 본인은
중앙정보부의 막강한 권한과 조직을 갖고 있었으므로 사후수습이 가능하
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직에 있는 중요인사들과 군지휘관들도 본인의
영향력을 받고 동조할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김재규의 진술과 증언에서 제1의 동기인 '차지철에
의한 수모'가 빠지고 여기에는 없던 민주회복이 제1의 동기로 등장한다.
26일 오후 궁정동 정보부 시설 본관 1층 응접실에서 김계원 실장과
잡담하면서 김재규는 또 다시 전날과 같은 불평을 했다.
"각하의 판단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부산지구의 데모를 신민당이 조
종했는지를 아무리 조사해도 남민전과의 관련성은 포착이 되는데 신민당
이 조종했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아서 죽을 지경입니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