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⑭"각하까집니까" ##.
'박정희까지 쏘자'는 결론에 도달한 김재규에게는 옆집에 초대해
둔 정승화총장의 존재가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되었다.
김재규는 화장실에서 나오자 책장 선반 책 뒤에 감추어 두었던 32
구경의 작은 독일제 호신용 권총을 꺼내 바지 오른쪽 호주머니속의 유달
리 크게 만든 라이터용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나동의 관리책임자인 남효주는 대통령 일행이 식사중인 안방에 음
식을 들고 들어갔다가 부장이 보이지 않자 신경이 쓰였다. 방을 나오자
마자 현관으로 가 보았다. 부장의 신발이 없었다. 주방으로 돌아오니
식당차 운전사 김용남이 보였다.
"과장님이 어디에 계신가."
"저 뒤 어디에 있을 것입니다.".
남효주는 경호원 대기실로 가 보았다.
의전과장 박선호를 발견하고는 "부장이 나가신 지 오래되었는데요"
라고 일러주었다.
박선호는 항상 갖고 다니는 손전등을 비추면서 구관쪽으로 건너 갔
다. 구관과 본관 사이 쪽문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장민순경비원에게
물어보니 부장은 5분 전에 쪽문을 지나 본관으로 갔다고 했다.
부장 수행비서관 박흥주 대령은 본관1층에 있는 부속실에서 오전에
하던 여권서류정리를 계속하고 있었다.
박 대령은 김재규가 정승화 총장을 만난 뒤 2층으로 올라가서 권총
을 꺼내 바지 호주머니에 넣고 내려올 때까지도 서류정리에 몰두하고 있
었다.
본관정문에서 인터폰으로 "부장이 나가십니다"는 연락을 받고서야
현관 문밖으로 나가서 부장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김재규는 본관을 나오더니 박흥주 대령에게는 아무 말을 하지않고
구관 쪽으로 걸어갔다. 이때 박선호는 본관 현관을 걸어내려오는 김재규
박흥주 두 사람을 만나자 프래시를 비추면서 부장 곁을 따라갔다.
박흥주는 뒤에 처졌다.
구관으로 통하는 쪽문에 거의 다 가더니 김재규는 돌아서서 박 대
령을 향해서 이리로 오라는 손짓을 했다. 세 사람은 구관으로 들어가서
잔디밭에 들어 섰다. 김재규가 말했다.
"둘 다 이리 와.".
어두운 가을밤 찬 공기를 마시면서 이야기하는 모습이 되었다. 박
흥주가 보니 김 부장은 '주기가 어리고 긴장된 표정'이었다. 김재규
는 상의를 들어올리고 오른쪽 바지 호주머니를 툭툭 치면서 흥분된 말투
로 말했다. 박선호가 보니 호주머니가 불룩했다. 박 대령의 시야에는
호주머니에 있는 권총이 살짝 들어왔다.
"자네들 어떻게 생각하나. 잘못 되면 자네들과 나는 죽는 거야.오
늘 저녁에 내가 해치운다. 방에서 총소리가 나면 너희들은 경호원들을
처치하라. 군총장과 2차장보도 와 있다. 너희들 각오는 다 되어 있겠
지."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박선호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그는 이 말을 하면서 박흥주의 표정
을 슬쩍 보았다. 박흥주는 '느닷없는 이야기에 입만 벌리고 듣는 수밖
에 없었다'(합수부 진술서)면서도 "예"하고 대답했다.
침통한 표정이었다. 김재규는 본관쪽을 가리키면서 "이미 총장,
차장보도 와 있다"는 말을 여러번 했다.
박선호가 입을 김 부장의 귀에다 대듯이 하고 속삭이듯 말했다.
"각하까집니까.".
김재규는 고개를 끄떡하면서 "응" 했다.
박선호는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는 거짓말을 했다.
"오늘 저녁은 좋지 않습니다. 경호원이 일곱 명이나 됩니다. 다음
에 하지요."
"안돼. 오늘 처치하지 않으면 보안이 누설되어서 안돼. 똑똑한
놈 세 명만 골라 나를 지원해. 다 해치워.".
박선호가 주춤하는 기색을 보이자 김 부장은 다시 밀어붙였다.
"믿을 만한 놈 세 놈 있겠지.".
박선호는 엉겁결에 "예, 있습니다"라고 답했다(군검찰 진술조서).
"좋습니다. 그러시면 30분의 여유를 주십시오."
"안돼. 너무 늦어.".
"30분이 필요합니다. 30분 전에는 절대로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알았어.".
김재규는 박흥주 대령을 향해서 느닷없이 "자유민주주의를 위하여"
라고 중얼거리더니 권총이 든 호주머니를 탁 쳤다. 그리고는 두 말 없이
나동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박선호는 프래시를 비추면서 부장을 따라
서 나동 현관까지 수행하였다.
이들의 수작하는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던 본관정문초소근무자 이말
윤에 따르면 이 세 사람들이 붙어 서서 대화한 시간은 1분쯤이었다고 한
다. 이 짧은 시간에 무슨 진지한 논의가 있을 수 없었다. 김 부장의
일방적인, 저돌적인 선전포고가 있을 뿐이었다. 그는 엄청난 계획을
던져놓고는 그냥 만찬장으로 들어가버렸다.
이 계획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하는 열쇠는 이제 김재규의 손을
떠나 두 박씨 손에 넘어온 셈이었다.
나중에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수사관 앞에서, 그리고 법정에서 박흥
주는 당시의 기분을 이런 줄거리로 설명했다.
[부장이 "오늘 해치운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라서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부장과 박선호 과장 사이의 대화 내용과 그 뒤에
계속되는 말을 듣고보니 대통령 각하와 경호실장은 자기가 살해할테니 경
호관들은 박선호와제 가 처치하라는 뜻으로 알아들었습니다. 김 부장의
말을 듣고 정신이 없을 정도로 놀랐습니다. 갑자기 그런 말을 꺼내어
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만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헤어져서
제 사무실로 오면서도,부장은 "민주주의를 위해서"하면서 각오가 서서 들
어갔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골똘히 했습니다. 저는
이미 호신용 25구경 베리타 권총을 오른쪽 허리에 차고 있었으나 너무
작아 쓸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본관 주차장에 가서 부장 차에 두고
내렸던 저의 휴대용 가방을 열고 독일제 9연발 권총을 꺼내어 일곱 발을
장전한 다음 왼쪽 허리에 찼습니다. 이 총은 1978년4월1일 수행비서
관으로 부임하면서 정보부에서 지급받은 것이었지만 너무 무거워서 차고
다니지 않고 항상 가방에 넣고 다녔습니다.
그리고는 1층 부속실에
들어가서 담배를 피우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육군총장과 정보부 2차
장보도 와 있다. 준비도 다 되어 있다고 한다. 부장은 한국에서 모든
정보를 다 알고 있는 분이다. 부장은 나도 모르게 이미 모든 준비와 계
획을 다 해놓고 있다가 오늘 기회를 포착하게 되자 갑자기 명령하는 것이
아닌가.
한편으로는 저의 마음 한 구석에 언제 그런 준비를 했을까 하
는 의심도 생겼으며 착잡한 심경이었습니다. 시간은 자꾸 흘러갔습니
다. 내가 김 부장과 아무런 인연이 없었다면 이런 일도 없는 것인데…
이제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궁정동 본관 1층 부속실에서 생각에 잠긴 박흥주 대령이 초조해 보였
던 모양인지 옆에 있던 윤병서 비서가 물었다.
"과장님 왜 담배만 피우세요?"
"아무것도 아냐.".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