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김재규와 박정희 ##.

김재규(당시 53세)는 박정희보다 나이가 아홉 살이 아래인 것을 빼
고는 공통점이 많았다. 고향이 같고, 키도 같고, 육사는 동기(2기)이고,
초등학교 교사를 지낸 경력도 같았다. 그의 합수부(합수부) 진술, 즉
그의 육성을인용하여 박정희와의 관계를 살펴본다.

[1954년9월경 5사단 36연대장으로 근무할 때 박 장군께서 사단장으
로 부임함으로써 재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상하관계이나 친형제
같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1960년3월 본인은 진해의 육군대학 부총장으로
있고, 박 장군께서는 부산의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있을 때 3·15부정선거
로 국민들의 원성이 많으니 군사혁명을 일으키자고 동의하였습니다. 박
장군께서는 당시육군대학 총장이시던 이종찬 장군을 주동으로 하는 게 좋
은데 그의 의견을 타진해보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이 장군을 원거리에서
타진한 바 그는 위험한 일에는 가담할 만한 위인이 못되어 그대로 박정희
장군에게 보고한 일이 있었습니다. 5·16 후에는 호남비료 사장도 시켜
주시고 준장으로진급도 시켜주셨으며, 6사단장을 거쳐 6관구 사령관, 그
리고 상당한 위치에 있는 보안사령관직도 맡게 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각하와 자주 뵙게 되었고, 이어서 3군단장, 유정회 의원,정보부 차장, 건
설부 장관, 중앙정보부장으로 등용해주셨습니다.

1976년12월4일 건설부
장관으로 있을 때인데 청와대 비서실장으로부터 빨리 각하 집무실로 가
보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각하께서는 금일중으로 신직수 부장과 교대
해서 근무하라는 명령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부족한 점이 많은
데 되겠습니까"라고 했더니 "연구해서 잘하시오"라고 하셨습니다. 타인
의 추천은 일절 없었고 각하의 의중에서 결정된 것입니다.].

1978년 어느날 김재규 부장은 서울 근교에 있는 한 천주교 건물에
서 김수환 추기경을 만난 적이 있었다. 이 두 사람의 만남에 배석했던
이동복 당시 부장특보(현재 자민련 의원)에 따르면, 김재규는 담담하게
자신과 박정희의 관계에 대해서 "고해성사로 알고 들어주십시오"라면서
이렇게 설명하더라고 한다.

"1973년12월에 제가 유정회 국회의원을 할 때인데 각하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가라고 하시더군요. 당시에 부장은 신
직수씨였습니다. 신 부장은 제가 5사단에서 참모장으로 있을 때 저의
밑에서 법무참모를 했던 이였습니다. 그래서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습
니다.

정보부 차장으로 부임하기 하루 전에 각하께서 저녁이나 하자는
연락이 있었습니다. 청와대 본관 2층에 있는 각하의 사저에서 저녁을
주시는데 식사가 시작되자마자 각하와 육영수 여사가 고성으로 다투시는
것이었습니다.

육 여사께서 이후락 박종규 같이 국민들의 원성을 듣는
사람들을 왜 중용하느냐고 따지니까 각하께서는 "왜 아녀자가 국정에 참
견하느냐"고 나무라시고 육 여사도 지지 않고 대어드시니 저는 불안해서
음식을 한 숟갈도 뜨지 못했습니다. 한 10시쯤 집으로 돌아가려고 일
어서니 각하께서는 화가 나셔서 저의 인사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육 여
사께서는 현관까지 저를 배웅해주셨습니다.

제가 신발을 신고 인사를
하려는데 저를 등 뒤에서 껴안으시더니 "김 장군님, 들으셨죠. 김 장군께
서는 누구 편이세요"라고 하셔요. 저는 "경모님과 같은 생각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육 여사께서는 "김 장군께서 중요한 자리로 가시
는데 제발 저 분이 하시는 인사문제를 잘 지켜봐주세요. 그리고 간섭
도 해주세요"라고 당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육 여사께서 그 이
듬해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더욱이 말씀을 유훈으로 생각하고 깊게 새기고
있습니다. 저의 머리에는 이 말씀이 항상 남아 있습니다. 추기경께
서도 저를 그렇게 아시고 대해 주십시오.".

김재규는 나름대로의 정의감과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
다. 1979년에 일어난 정치적 격동은 그의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5월 김영삼 총재 당선으로 시작된 민주화 세력의 도전은 8월의 YH
여공농성사건, 9월의 김영삼 총재 직무정지 결정, 10월의 김영삼 의원직
제명과 부마사태로 이어지는 격랑을 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재규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시국대책을 결
정하는 주도권은 차지철 경호실장 손으로 넘어갔다.

김재규는 대체로 온건론을 견지한 것처럼 보였지만 김치열법무장관
의 말대로 그것은 논이랄 것도 없는 수준이었다.

김재규는 YH여공의 신민당사 농성때는 청와대와 경찰이 안전대책이
미흡하다고 반대하는 것을 누르고 경찰을 투입하도록 했고, 한 여공의 사
망을 가져왔다.

그는 또 8월 하순 대통령이 주재한 시국수습대책회의에서 "각하,
칼날이 시퍼런 긴급조치 10호를 풀어 주십시오. 그래야만 정국을 수습
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그럼 지금 학생 종교 근로자들을 다 적으로 돌리면 어떻게 이 난
국을 타결해나가겠소. 당분간 9호로 밀고나가고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방법을 연구해보시오.".

정보부 간부들도 긴급조치 10호를 신설하자는 발상에 반대하였다.

김재규는 인간적인 바탕은 선량한 사람이었지만 격동기를 주도할
만한 안목과 추진력은 갖지 못했다. 상황이 너무 커지면서 김재규라는
그릇이 담을 수 있는 용량을 초과하고 있었다.

이런 과부하 상태에서 차지철에 대한 증오심, 열등감, 차지철을 편
드는 대통령에 대한 배신감이 뒤섞여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대통령에게 사표를 내든지 담판을 하여 차지
철의 월권을 저지시키려 했을 텐데 김재규는 이 수모를 참기만 했다.

대통령이 워낙 어렵게 보이기도 했고 자신의 논리가 부족하기도 했
을 것이다. 울분이 발산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폭발성은 증가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총을 대통령에게 겨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
제이다.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이 행동을 했다는 점에 김재규의 남다
른 면이 있다. 그가 지녀왔던 인간적인 선량함과 정의감에다가 자유민
주주의에 대한 소신, 그리고 이런 소신을 확인시켜준 부마사태의 민란화
가 보조적인 요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또 남자다운 사생관을 핵심으로
하는 일본 무사정신의 숭배자였다.

10월26일 남산 사무실에서 궁정동으로 이동하는 차중에서도 김재
규는 일본 무사들이 즐겨 읊었던 시 낭송 테이프를 들었다.

김재규는 안동농림학교 4학년 재학중에 강제지원을 당해서 일본 욧
카이치 항공병학교의 특별간부후보생으로 들어갔다. 1944년1월이었다.

이 학교에서는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이 배출되고 있었다. 임관을
여섯 달 앞두고 해방을 맞았다. 그는 안동농림을 다닐 때도 친구들 사이
에선 유별난 의협심으로 해서 별명이 노기 대장이었다.

노기 대장은 러시아-일본 전쟁때 여순요새의 공격을 지휘했던 일본
장군으로서 명치천황이 죽자 부인과 함께 자결한 사무라이 정신의 화신이
었다.

김재규는 김녕김씨였다. 수양대군의 쿠데타에 불만을 품고 친 단
종쿠데타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죽은 충신 김문기의 18대손이다.

그는 정보부장의 직위를 이용하여 학자들에게 압력을 넣어 무리하
게 김문기를 사육신에 포함시키려고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런 무리를 할 만큼 대의에 목숨을 건 사람들을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