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그때 그 사람 ##.

다시 나동 안방.

박정희 대통령이 자주 시계를 보면서 "삽교천 중계방송은 안하나"
라고 재촉했다. 차지철이 "시간이 되면 틀겠습니다"라고



사진설명:현장 검증때 당시 상황을 재현한 모습. 기타를 들고 있는 사람이 가수
심수봉의 역할을 하고 있고 그의 오른쪽으로 박대통령. 신재순의 대역이 앉아있다.
식탁 모서리에 앉은 차지철경호실장의 대역 뒤로 실내 화장실이 보인다.

안심시켰다. 그
뒤로는 차 실장이 시계를 자주 보았다. 심수봉도 이때 시계를 보았는데
나중에 기억을 살려보니 7시 10분 전쯤이었다. 대통령은 윗양복을 벗었
다. 오른쪽에 있던 신재순이 받아서 옷걸이에 걸었다. 김계원 차지철도
바깥 마루로 나가더니 상의를 벗어놓고 들어왔다. 이때 김재규가 들어
왔다. 대통령이 웃옷을 벗은 것을 보고는 김재규도 상의를 벗어걸고
들어왔다.

대통령은 KBS TV 7시 뉴스를 보면서 미국 대사가 김영삼총재를 만
났다는 보도에 대하여 심사가 다시 뒤틀린 듯했다.

"아니 총재도 아닌 사람과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한다는 건지 모르
겠어.".

법원의 판결에 의해서 김영삼총재의 직무집행이 정지되었는데도 미
국측이 총재 대우를 해주고 있는 데 대한 불평이었다. 대통령은 김재규
부장을 향해서 퉁명스럽게 던졌다.

"거, 정보부에서 부산사태 사진을 만들어주는데 깡패들 사진만 만
들지 말고 진짜 소요 사태의 사진을 좀 크게 뽑아 보여주게.".

김부장은 짤막하게 "예"라고만 대답했다. 박정희는 고향 후배인데
다가 육군사관학교는 동기이고 줄곧 자신이 끌어주고 키워주었던 김재규
에 대해서는 동생처럼 편하게 대하다가 보니 도가 지나쳐서 여러 사람들
앞에서 무안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



대통령은 자신이 내심으로는 끔찍이 아낀다는 것을 깔고 하는 행동

이었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미국 브라운 장관이 오기 전에 김영삼이를 구속 기소하라고 했는
데 유혁인이가 말려서 취소했더니 역시 안되겠어. 국방장관회의고 뭐고
볼 것 없이 법대로 하는데 뭐가 잘못이란 말인가. 미국 놈은 범법해도
처벌 안하나."
"각하 김영삼이는 사법조치는 아니지만 국회에서 제명한 걸로 이미
처벌받았다고 국민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속하면 두 번 처벌하는 인
상을 줍니다.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시지요.".

"정보부가 좀 무서워야지 당신네들은 비행조사서만 움켜쥐고 있으
면 뭣하나. 딱딱 입건해야지."
"정치는 대국적으로 해서 상대방에게도 구실을 주고 국회에 나오라
고 해야지 그러지 않고서는 이번 회기에는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해외
여론도 좋지 않습니다.".

김재규는 이 말을 유달리 강경하게 했다. 그때까지 침울하게 "예,
예"하고 있던 태도와는 사뭇 달랐다.

김재규가 약간 불손하게 대통령의 말을 반박한 것은 이미 거사준비
를 시켜놓고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그로서는 거리낄 것이 없다
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또 차지철이 끼여들어 예의 탱크 이야기가 나왔다.

"신민당 놈들 그만두고 싶은 놈은 하나도 없습니다. 언론을 타고
반정부적인 놈들이 선동해서 그러는 거지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그자
식들 신민당이고 뭐고 나오면 전차로 싹 깔아뭉개겠어요.".

신재순이 보니 맞은 편에 앉은 김재규가 손목시계를 자주 보고 있
었다. 대통령은 주한미군 방송에서 카터 대통령의 재선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까 무언가 한 마디 하더니 텔레비전을 끄라는 손짓을 했
다.

그리고는 "도승지 한 잔 하시오"하면서 술잔을 김계원실장에게 건
넸다. 오른쪽 자리에 앉은 신양 앞 접시로 음식을 집어 건네주기도 했
다. 대통령은 술기운이 돌자 김계원 실장을 도승지, 김 부장을 포도대
장이라고 불렀다.

신양에게는 "김 부장은 술을 아주 잘하니 많이 권하게"라고 농담조
로 말했다.

김재규는 간이 나빠서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이날 술은 대통
령과 김계원 두 사람이 거의 다 마셨다.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잔을 빨리
돌렸다. 한 시간 40분 사이에 시버스 리걸 한 병 반이 비워졌다.

차지철 자리 앞에 놓여 있던 잔에서는 김계원의 지문이 검출되었는
데 이는 김계원이 술이 약한 차 실장에게도 잔을 돌렸기 때문이다. 이날
김재규도 그의 주량에 비해서는 술을 많이 마신 편이었다.

분위기가 좀 풀리고나서 대통령이 "이제 노래나 좀 듣자"고 했다.

대통령 왼쪽에 앉아 있던 심수봉이 바깥에 나가서 기타를 들고 들
어왔다. 심양은 기타를 대기실에 두고 왔었다.

안재송부처장이 노래를 부를 때 자기가 기타를 갖다주겠다고 했었
는데 막상 노래를 부를 시각이 되어도 가져다 주지 않아서 나갔다가 온것
이었다.

심양은 돌아와서 '그때 그 사람'을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가 끝나
자 모두 박수를 쳤다.

박정희는 "하나 더"라고 했다. 심수봉은 구성진 목소리로 '눈물 젖
은 두만강'을 불렀다. 만찬장의 분위기는 흥겨워지기 시작했다.

두번째 노래가 끝나자 차 실장이 "이제부터는 노래를 한 사람이 다
음 사람을 지명하는 게 어떻습니까"라고 했다.

심수봉이 "경호실장님"이라고 했다. 심양은 지명을 하려고 좌중을
둘러보았는데 김재규와 김계원의 표정이 어두워 차 실장을 지명했다.

심양은 그 전에도 한번 여기에 와서 노래를 부른 적이 있었다. 그
때 김 부장은 지금처럼 침울하지는 않았는데 하는 생각이 났다.

신재순은 차 실장의 생김새에 어울리는 노래는 군가일 것이라고 생
각했는데 엉뚱하게도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심심산천에…"를 부르
는 것이었다.

분위기는 한결 고조되어 갔다. 이때 남효주가 들어와서 김 부장에
게 귓속말을 하는 것이 심수봉한테도 들렸다.

"과장님께서 부속실로 전화가 왔다고 합니다.".

공격 준비를 끝낸 박선호 대기실에서 경호처장 정인형, 부처장 안
재송과 같이 있다가 안방 옆에 붙은 부속실로 나와 아무것도 모르는 남효
주에게 심부름을 시킨 것이었다. 김재규가 슬그머니 나가는 것을 박정희
는 눈치를 못채는 것 같았다.

차 실장의 앙코르곡은 '나그네 설움'이었다. 대통령은 손으로 장
단을 맞추었다.

김 실장이 "각하 차 실장이 저런 노래도 다 하는군요"라고 했다.

"예, 뭐, 국민학교 다니는 딸이 저의 노래선생입니다.".

만찬장의 중심인 식탁의 크기는 1.5×1m. 박정희가 이 식탁을 너
머서 맞은 편으로 볼 수 있는 출입문은 열려 있었다. 대통령에게 시야를
틔어주려고 그런 것이었다. 맞은 편에 앉아 있는 김재규가 나가고 들어
오고 하는 것은 다 알수 있는 위치였다.

차 실장도 김재규가 무엇 하는지를 의식적으로 감시안해도 다 볼
수가 있는 자리에 있었다.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