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10월27일 오전 5시를 조금 넘어 정형모화백은 친구로부터 "대통
령이 돌아가신 것 같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는 충격속에서도 '내가 무엇을할 것인가'를 생각해보았다. 예
상했던 대로 오후에 문공부에서 "좀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국장에
쓸 대통령의 영정을 그려달라는 당부였다. 그날부터 정화백은 철야작
업을 하기 시작했다.

박대통령의 얼굴을 어떻게 표현할까로 고민하였다. 4년 전 대통
령을 만났을 때의 인상적이었던 그의 눈을 떠올려보았다.


사진설명 :
육영수여사의 사후 초상화를 전담하여 그렸던 정형모화백은 국장에 쓰일
박정희의 영정도 그리게 되었다. 정화백은 1백50호짜리 큰 그림에 근대화
혁명가의 비장한 분위기를 담으려고 애썼다. 사진은 7일간 작업끝에 완성한
영정 앞에 선 정화백.

부끄럼타듯 아래로 내려 뜬 눈, 그러나 정시할 때는 가슴을 서늘
하게 만드는 빛나는 안광을 영정에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박정희의 눈매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내 가슴속을 훤히 꿰뚫어
보는구나'하는 느낌을 주어 거짓말을 못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정형모는 육영수의 죽음 뒤에 청와대 본관에 걸어둘 초상화의 작가
로 뽑혀서 육여사의 사진만 참고하여 많은 그림을 그렸다. 그는 대통령
부부의 초상화 모두를 사후에 그리는 인연을 갖게 된 것이다.

정화백은 대통령 영정을 그리면서 1975년8월28일에 그를 만났던 기
억을 되살려보았다.

윤주영문공부장관과 함께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서니 대통령은 딸
근혜와 함께 책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긴장하고 있는 정형모
에게 "청와대에는 정화백의 그림이 가장 많아요"라고 하면서 자리를 권했
다.

그는 의자에 앉자마자 정화백에게 담배를 권하더니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여주었다.

정형모는 '부모 앞에서도 피우지 못하는 담배를 대통령 앞에서 피
우다니' 하는 생각이 나서 서너 모금 피우다가 재떨이에 부볐다.

완전히 껐다고 생각했는데 연기가 모락 모락 나면서 대통령 얼굴쪽
으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당황해 하는 정화백을 보고 근혜가 재떨이의
뚜껑을 덮었다.

식당으로 옮겨 점심식사를 하는데 정화백이 그린 육영수의 초상화
가 벽면에서 내려다 보고 있었다.

육여사의 특징을 살리려고 웃음띤 입술과 우아한 목을 신경써서 그
렸지만 만족을 느끼지 못한 정화백이었다.

박대통령은 "왜 정화백은 민족기록화를 그리지 않습니까"하고 물었
다.

"각하, 제가 그리고 싶은 그림은 따로 있습니다. 숙명적인 가난과
보릿고개를 넘겨주시고 조국근대화를 이룩하신 위대한 업적을 작품으로
남기고 싶습니다. 나폴레옹도 전속화가를 전장에 데리고 다니면서 작품
을 남겨 지금 루브르 박물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은 옆자리에 앉은 근혜에게 "너도 알렉산더 대왕 전기를 읽
고있지?"라고 하더니 2층으로 올라가 아내의 사진 앨범을 가지고 내려왔
다.

그는 햇살이 드는 창가에 앨범을 펴놓더니 정화백에게 사진을 고르
라고 했다. 그때 37세였던 정화백은 대통령이 꼭 자상한 아버지처럼 느
껴졌다. 그날 식단은 토스트와 만두국, 그리고 반찬이 전부였다.

정형모는 국장 하루 전인 11월2일에 영정을 완성하여 납품했다.

7일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탁자만한 1백50호짜리 화폭에다가 근대
화혁명가의 비장한 혼을 불어넣어보려고 했던 정씨는 곧 곤한 잠에 떨어
졌다.

1979년11월3일 고 박정희대통령 국장 영결식이 중앙청앞 광장에서
열렸다. 최규하대통령권한대행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영전에 바쳤다.

이때 국립교향악단이 연주한 교향시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
했다'였다.

독일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이 장엄한 곡은 낮은 음에서
시작하여 고음으로 치달은 뒤에 꼭지점에 도달했다가 갑자기 사라진다.

이 곡은 독일철학자 니체가 쓴 같은 이름의 책 서문을 음악으로 표
현한 작품이다. 이 곡을 선택한 것은 국립교향악단의 홍연택상임지휘자였
다.

"박대통령과 초인의 이미지를 연결시켜서 생각하고 말고 할 겨를이
없었다"면서 "분위기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내가 평소에 좋아하던 곡을 연
주한 것이다"고 했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서문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인간이란 실로 더러운 강물일 뿐이다. 인간이 스스로를 더럽히
지 않고 이 강물을 삼켜버리려면 모름지기 바다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박정희는 질풍노도의 시대를 헤쳐가면서 영욕과 청탁을 같이 들여
마셨던 사람이다. 더러운 강물 같은 한 시대를 삼켜서 바다와 같은 다른
시대를 빚어낸 사람이다.

박정희가 그런 용광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권력을 잡
고나서도 스스로의 혼을 더럽히지 않고서 맑게 유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1963년 최고회의의장 시절에 쓴 책 '국가와 혁명과 나'의 끝장에서
박정희는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그 서민의 인정 속
에서 생이 끝나기를 염원한다'고 했다.

그는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가 평한 대로 '한시도 자신이 태어난
곳과 농민들을 잊어본 적이 없었던' 토종 한국인이었다.

그는 사후 지식인들로부터 뭇매를 맞았으나 서민들의 인정속에서는
항상 살아 있었다. 요사이의 소위 '박정희 현상'은 서민들의 인정을 지
식인들이 뒤늦게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만 새로울 뿐이다.

영결식에서는 박정희의 육성연설 녹음을 두 편 골라서 틀었다.

지금 들으면 국민들에 대한 유언처럼 느껴진다.

1978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개원식 치사.

여기서 박정희는 자주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자주정신이란 우리 스스로가 이 나라의 주인이며 역사창조의
주체라는 자각"이라면서 "우리의 전통과 역사에 뿌리를 둔 주체적 민족사
관을 정립하여 자주정신을 북돋움으로써 민족중흥의 활력을 제공하자"고
역설했다.

박정희는 '국가와 혁명과 나'의 끝장에서도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
직하고 성실한 서민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독립된 한국의 창건, 그것이 본
인의 소망의 전부이다.

동시에 이것은 본인의 생리인 것이다.

본인이 특권계층, 파벌적 계보를 부정하고 군림사회를 증오하는 소
이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고 했었다.

박정희가자조정신-자립경제-자주국방을 강조한 것은 이 3자를 갖추
어야 진정한 자주독립국가 행세를 할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박정
희의 이 확신은 국수주의나 폐쇄적 민족주의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서
민들에 대한 동정심과 서민들을 괴롭히는 힘센 자들에 대한 정의감의 확
대판이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서민들을 괴롭히는 강자에 대한 반발심이나 우리
나라를 누르려는 강대국에 대한 반발이나 같은 심정에서 출발한 다른 표
현이었던 것이다.

그는 서민적 반골정신을 대통령이 된 뒤에는 자주정신으로 승화시
켰던 사람이다. 영결식 기도에서 천주교계를 대표한 김수환추기경은
이렇게 말했다.

"인자하신 주여, 이제 이 분은 대통령으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
서 엎드려 주님의 자비를 빌고 생명을 목말라 합니다. 이 분의 영혼을
받아주십시오. 죄와 죽음의 사슬을 끊고 생명과 광명의 나라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새문안교회 강신명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저 공중을 날으는 참새 한 마리도 당신의 허락이 없이는 땅에 떨
어지지않는다고 하셨기에 우리는 지금 이 뜻하지 않는 일의 뜻을 알지 못
하여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하기야 이 길은 인간이면 누구나 한번은
가야 할 피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너무나 뜻밖에 비참하게 가셨기
에…."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