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부 상모리 소년 - 1. 출생 ##.
1979년 10월27일 새벽 3시 반 청와대 본관.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한 할머니가 현관으로 들어오자마자 엎어졌다.
할머니는 빈소까지 엉금엉금 기어가면서 통곡을 하고 있었다.
막내 박정희를 마흔다섯살에 나은 백남의는 이 5남2녀 가족의 실질적인
가장이었다. 가난하면서도 자존심이 강했으며 자상했던 백 여사는 미래의
지도자를 길러낸 토양이었다. 박정희(구미공립보통학교 6학년때)는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
"아이고, 정희야! 니가 이게 우짠 일고!".
박정희보다 다섯살 위의 누님 박재희(당시 67세)였다.
"동생은 그때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정장으로 잠자듯 관속에
누워 있었습니다. 머리의 총상이 없었다면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
이 편안한 표정입디다. 시신을 덮은 태극기가 너무 작아 발이 나와요.
큰것을 가져 오라고 시킨 뒤 다리를 만져보니 아직도 굳지 않았더군
요. 원통하고…정치는 안해야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박정희의 출생과 죽음을 다 목격했던 박재희(1996년에 84세로 작
고)할머니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1987년 10월6일, 서울시 서대문
구 창천동의 2층 주택에서 기자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며느리 둘을 보신 어머님이 동생을 임신하셨을 때는 귀희언니가
형부 은용표씨와 결혼한 뒤였습니다. 언니는 정희가 태어나던 해에
딸을 낳았지요. 그러므로 마흔 다섯에 임신한 어머니는 딸과 함께 아
기를 밴 것을 퍽 부끄럽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때는 또 집안이 원
체 가난하여 식구가 하나 더 느는 것이 큰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어
머니는 아기를 지우려고 백방으로 애를 쓰셨습니다. 시골사람들이 흔
히 쓰는 방식대로 간장을 한 사발이나 마시고 앓아 누우시고, 밀기울
을 끓여서 마셨다가 까무라치기도 했답니다. 섬돌에서 뛰어내려 보기
도 하고, 장작 더미위에서 곤두박질 쳐보기도 했더랍니다. 아무리 해
도 안되니까 수양버들 강아지의 뿌리를 달여 마시고는 정신을 잃어버
렸대요. 정신을 다시 차리고보니 뱃속의 아기가 놀지 않더랍니다. 이
제 됐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며칠 지나니까 또 놀더래요. 그 뒤 어머
니는 일부러 디딜방아의 머리를 배에다 대고 뒤로 자빠져 버렸어요.
낙태를 시키려고 스스로 방아에 깔려버린 것이지요. 그때 나는 다섯
살이었는데 그 광경을 보고 어머니가 죽는다고 울고불고 했답니다.
어머니는 허리를 못 쓸 정도로 다치셨는데 뱃속 아기는 여전히 놀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할 수 없다. 아기가 태어나면 솜이불
에 돌돌 싸서 아궁이에 던져버리리라'고 작심하고 아기 지우는 일을
포기했더랍니다.".
박재희의 증언에 등장하는, 어머니와 같은 시기에 임신한 딸은 박
정희의 큰 누님 박귀희(1974년에 작고)를 가리킨다. 박귀희의 아들
은희만이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이러했다.
"한번은 내(귀희)가 친정에 다니러 갔는데 어머니께서 누구한테도
말을 못하시겠다면서 임신한 사실을 나에게 털어놓으시는 거야. 어머
니와 나는 뒷동산에 올라갔단다. 나는 어머니가 다치실 때 대비하기
위하여 낮은 데 서 있었다. 어머니는 높은 데서 몇번이나 뛰어내렸다.
한번은 내가 어머니를 부축하다가 함께 엉켜서 뒹굴기도 했단다. 정
희가 태어나기 열흘 전에 나는 큰 딸 봉남(1995년에 작고)이를 낳았
다.".
다시 박재희의 추억은 계속된다.
"동생 정희가 태어나던 날의 기억은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그
날 저는 혼자 마당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어머니 생각이 나서
'엄마야'하고 찾아 보아도 안 보여요. 방문을 열어보니까 어머니는
이불을 덮어쓴 채 끙끙 앓고 계셨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또 아기 지
우는 약을 먹고 그러시는 줄 알고 겁이 나서 아버지를 찾으러 논으로
뛰었습니다.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꽃신을 신고 달렸습니다. 돌밭에
넘어져 발등에서 피가 솟구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 오리는 뛰
었을 거예요. 숨이 차서 헐떡거리니 나락을 베고 계시던 아버지가 보
시고 얼른 논에서 나오시더니 대님을 풀어서 저의 상처를 동여맨 뒤
나를 업고서 집으로 오셨습니다.".
태어날 수 없는 생명이 될 뻔한 아기가 세상의 빛을 본 것은 1917
년 11월 14일(음력 9월30일) 오전 11시경이었다.
"삽작문을 들어서는 데 울음소리가 들리더군요. 아버지와 함께 방
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어머니는 혼자 아기를 씻어 옆에 뉘어 놓고
당신도 기진맥진해 있었습니다. 아기가 새빨갛고 꼬물꼬물 하던 것이
예쁘게 보였다고 기억이 납니다.".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의 금오산 자락 맨 끝에 자리한 허
름한 초가집 삽작문에는 그 날 붉은 고추와 숯을 끼운 새끼줄이 내
걸렸다. 박정희가 배냇생명을 마감하고 태어난 이후에도 난관은 이어
졌다.
"어머니는 젖꼭지가 말라붙어서 정희는 모유 맛을 모르고 자라났
습니다. 밥물에 곶감을 넣어 끓인 멀건 죽 같은 것을 숟가락으로 떠
먹였습니다. 그게 우유 대용이었지요. 변비가 생겨 혼이 난 적도 있
었지요.".
박재희의 이 말을 뒷받침하는 것은 아들 은희만에게 한 박귀희의
생전 술회이다.
"딸을 낳은 뒤에 산후조리를 하고 친정에 갔더니 정희가 태어났더
구나. 어머니는 젖이 나오지 않아 내가 정희에게 젖을 물려주었단다.
시집에서 나와 낙동강을 배로 건너서 30분만 걸으면 친정에 도착할
수가 있어 나는 젖을 먹여주려고 자주 상모리에 갔었지.".
다시 박재희의 증언.
"정희가 두 살때, 아직 기어다닐 적인데 어머니가 정희를 큰 형님
(장남 동희의 아내)에게 맡겨 놓고 출타를 하셨어요. 형님은 바느질
을 하고 계셨던 것 같은데 정희가 기어다니다가 문지방 아래로 굴러
떨어졌어요. 그 아래로는 화로가 놓여 있었는데 정희는 벌건 화로에
처 박히면서 한 바퀴 굴렀어요.
시뻘건 숯을 온 몸에 뒤집어 쓰고 말았지요. 머리카락과 눈썹이
다 탔어요. 형님과 나는 정희의 얼굴에서 숯을 털어내고 입 속에 들
어간 숯을 끄집어 내는 데 정신이 팔려 양쪽 저고리의 소매에 불이
붙어 타 들어가는 것을 뒤늦게 알았어요. 저고리를 찢다시피 하여 불
을 껐는데 양쪽 팔뚝에 심한 화상을 입었습니다. 아버지는 황토를 물
에 짓이겨 상처에다 바르고는 베 조각으로 감아 놓았어요. 화기가 빠
지고 한 달만에 겨우 딱지가 앉았는데, 그때의 화상 흉터는 정희가
죽을 때까지 남아 있어 소매가 짧은 옷을 잘 입지 않았지요. 이 사건
뒤에 보얗던 정희가 까무잡잡하게 되더군요."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