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아버지 박성빈 ##.
박정희가 태어난 1917년엔 유럽에서 터진 제1차 세계대전이 3년째
계속되고 있었다. 과학 기술의 발달은 전장을 하늘과 물밑으로 확장
시켜 영국 상공에서는 공중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대서양은 잠수함작
전의 무대가 되고 있었다. 1916년 9월에는 영국이 솜 전투에서 최초
로 탱크를 사용해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박정희의 생일보다
한달 빠른 1917년 10월17일,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한강에서 인도교
준공식을 가졌다. 이 다리는 그로부터 43년 7개월 뒤 혁명군을 이끌
고 서울로 진격하는 박정희의 주요 기동로가 된다. 박정희가 태어나
기 1주일 전인 11월 7일(러시아력으로 10월25일)엔 레닌이 볼셰비키
혁명을 성공시켰다. 전쟁과 혁명이 세계를 진동시키는 가운데 어렵게
태어난 한 생명이 한반도와 한민족의 운명을 바꾸는 주인공이 될지를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위)아내보다 한 살위인 박성빈은 장대한 키에 기가 세고 호탕한
성격이었고 농사나 가사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박정희가 태어났을 때
마흔여섯 살이었던 그는 처가 문중의 산지기로서 술과 친구들을 벗삼아
불운의 세월을 보냈다.
(아래)어머니가 임신한 태아를 지우기 위해서 디딜방아에 깔려버렸던
일을 기억하고 싶어했던 박정희가 불에 타 없어진 디딜방아를 아쉬워하자
큰 형 박동희가 복제하여 생가에 설치한 것.
박정희가 났을 때 이 가난한 가족의 구성원은 부모와 5남2녀였다.
아버지 박성빈(당시 만46세), 어머니 백남의(45세), 장남 박동희(22
세), 차남 박무희(19세), 장녀 박귀희(15세), 3남 박상희(11세), 4남
박한생(7세), 차녀 박재희 (5세), 5남 박정희. 동희,무희 두 형은 장
가를 간 뒤였고 귀희(진실누님 또는 수희)도 옆 동네로 시집을 가서
살고 있었다.
박정희는 '나의 소년시절'이란 글에서 아버지에 대해서 이렇게 썼
다. 이글은, 1970년4월26일 청와대 김종신 공보관에게 대통령이 써준
것이다. 김씨가 박정희의 전기를 쓰겠다고 미주알고주알 물으니까 자
신의 기억을 되살린 것이다.
[선친께서는 소시에 무과에 합격하여 효력부위란 벼슬까지 받은
바 있으나 원래 성격이 호방한 데다가 당시 조선조 말엽 세도정치와
부패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반항도 하여 20대에는 동학혁명에도 가담
하였다가 체포되어 처형 직전에 천운으로 사면되어 구명을 하였다고
한다. 어릴 때 어머니께서 가끔 이야기를 하시면서, 그때 아버지께서
처형되었더라면 너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는 옛
이야기를 하시는 것을 들었으나 그때는 어리고 철이 없어서 그 이야
기 내용을 잘못 알아들었고, 또 자세히 물어보지도 못했다. 그 후부
터 선친께서는 가사에도 관심이 적고 호주로 소일하면서 이래저래 가
산을 거의 탕진하게 되니 가세가 나날이 기울어지고, 하는 수 없이
외가의 선산인 상모동의 위토를 소작하기로 하고 외가의 양해를 얻어
(칠곡군 약목에서) 선산군 상모동으로 솔가하여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해가 바로 내가 태어나기 전해인 1916년이다.]
박정희의 바로 위 누님 박재희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는 벼슬을 하시겠다고 전답을 팔아서 서울에 자주 올라가셨
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산을 많이 날렸다고 들었습니다. 동학군에 가
담했다가 살아나오셨는데 워낙 말씀을 잘 하셨기 때문이랍니다. 3백
명중 혼자서 살아나셨다는 거예요.".
다시 박정희의 증언('나의 소년 시절').
[아버지는 쾌활하고 호담하였으며 두주불사. 소시에 성주 어느 산
길을 밤에 혼자서 지나다 범을 만나서 길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부싯
돌을 치니 섬광이 튀자 범이 사라지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음.
담대하였다고 느껴진다.]
[칠곡군 약목에 계시는 외삼촌이 가끔 오신다. 어머니의 바로 아
래 남동생이다. 한학자이며 약목에서 서당을 차려놓고 동리 아이들에
게 한문을 가르쳤다. 아버지와는 처남 매부간이라 유달리 다정하면서
도 두분이 다 고집이 센 분이라 옛날 이야기를 하다가 때로는 서로
언쟁을 할 때도 있다. 어릴 때 이것을 옆에서 본 나는 저렇게 연세가
많고 점잖은 분들이 저런 문제 가지고 저처럼 서로 고집을 피우는가
하고 우습기도 하고 따분할 때도 있었다.]
1938년에 67세로 작고한 박성빈에 대한 1차적 증언을 모아보면 이
사람의 풍모와 성격이 대강 떠오른다. 박성빈의 차남 무희의 장남인
박재석(75세·전 국제전기 회장)에 비친 할아버지 .
"검은 수염을 길게 기르셨던 김병태 어른과는 둘도 없는 친구였습
니다. 두 분은 하루가 멀다 하고 아랫마을 '밤마'로 내려가서 밤늦게
까지 막걸리에 절어 집으로 돌아오시곤 했지요. 한 손엔 언제나 작대
기를 쥐고 다니셨습니다. 제가 일곱 살쯤 되었을 때입니다. 밤이 늦
었을 무렵입니다. 전기가 안들어오는 마을이니 모두 일찍 잠들었을
때입니다. 할아버지가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며 대문 앞에까지 오셨습
니다. 제가 오줌누려고 나갔다가 마주쳤는지 기억이 안나는데 하여튼
저더러 호롱불 들고 마중나오지 않았다고 한 밤중에 감 따는 긴 작대
기를 들고 저를 때리러 쫓아오시는 겁니다. 어린 나이에 도망다니느
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손자 박재석의 기억에 남아 있는 박성빈은 '늘 두루마기차림에 지
팡이를 짚고 해거름때면 술에 취해 갈지자로 걸어 올라오는 모습'이
었다. 할아버지는 또 '농사일은 할머니에게 맡겨두고 아랫집 친구 김
씨와 매일 주막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면서 "어∼"로 시작되는 시조를
읊고 짓기도 하는 전형적인 몰락 양반의 모습'이었다.
박정희와 함께 구미공립보통학교를 다녔던 이진수(83세)는 구미읍
내에 장이 서는 날이면 할아버지 같은 박성빈이 손자 같은 정희를 데
리고 가끔 나타났다고 한다.
"그분은 몸집이 아주 컸지요. 술을 많이 자시는데 한곳에서만 마
시지 않고요…. 아버지는 장대한데 정희는 왜 그리도 쪼끄맣던지.".
박정희 생가 관리인으로 있는 김재학(70세·전 초등학교 교장)은
이 마을에서 태어나 동네아이들과 박성빈을 '선달영감'이라 부르며
자랐다. 박성빈은 그때 처가인 수원 백씨 문중의 위토답과 선산을 지
키는 선산지기이기도 했다.
"모두들 그 할아버지를 무섭다고 했지요. 우리가 산에서 나무를
해서 지게를 지고 내려오다가 이 어른에게 걸리는 날이면 지게에 실
은 나무를 그 자리에 다 쏟아놓고 가야 했습니다. '이놈들아!'하고
소리치면서 작대기를 들고 쫓아와서 혼을 내지요. 제가 장난삼아 '선
달영감 온다'고만 고함을 지르면 나무를 하던 아이들이 전부 도망갈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증언들에 나타나는 박성빈은 '공은 영변군수에 제수하였으
나 시국의 어려움을 관찰하시고 부임하지 않으셨다'(묘비문)라는 주
장과는 잘 맞지 않는 이미지를 가진 인물이다. 혹시 '자식이 잘 되면
조상을 붓대로 키운다'는 속담이 이 경우에 적용되는 것은 아닐까.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