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제들 ##.

1916년에 경북 칠곡군 약목면에서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로 이사를 온
박성빈일가는 박정희가 태어난 이듬해를 전후하여서는 식구가 열 명이
되었다. 맏딸 귀희가 시집을 간 대신에 동희, 무희 두 아들이 장가를 가
서 며느리 둘이 늘었기 때문이다. 박성빈은 금오산 효자봉의 산자락이
평지로 변하기 직전 끝머리에 집터를 골랐다.

옴폭하게 파여진 대지에
동쪽만 제외하고 사방이 대나무와 탱자나무 숲으로 빙 둘러쳐진 곳이어
서 담을 쌓을 필요가 거의 없다는 점이 고려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박성
빈은 온 가족과 함께 황토흙을 이겨서 흙벽돌을 만들고 나무를 잘라 안
채와 사랑채인 두 초가를 지었다. 안채는 북향. 정면에 있는 언덕과 대
나무숲이 바람막이 역할을 하도록 방향을 잡은 것이다.


사진설명 :
이 사진은 1963년 8월경 상모리 박정희의 생가 대문 앞에서 촬영한
것으로 박정희의 큰형인 박동희(당시 68세)와 그의 둘째 부인 여산 송씨
(당시 52세)의 모습이다. 우측의 짚단은 '거름자리'라 부르던 퇴비장.

박정희가 쓴 '나의 소년시절'에 따르면 '이 집은 6·25 동란 당시까
지도 옛 모습 그대로였으나 6·25때 파괴된 것을 사랑채만 옛 모습으로
복구하고 안채는 초가로 가건물을 백형이 지었다가 5·16후 지금 있는
안채를 다시 건립하였다. 지금 있는 사랑채 큰방은 내가 이 세상에 처음
으로 고고의 소리를 내면서 태어난 산실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난 대통령 선거기간중에 세 후보가 모두 찾아와서 더 유명해진 박정
희의 생가 안채는 L자모양의 기와집이다.원래의 안채는 일자 모양으로서
부엌과 방 두 개 사이로 마루방이 하나 있었다. 박정희가 태어난 사랑채
에도 방이 둘이었다.그의 산실인 큰 방은 2×2.3m 크기로서 부엌으로 통
하는 문이 있다.어머니 백남의가 정희를 낳은 뒤 혼자서 탯줄을 끊고 대
충씻어서 눕힐수 있었던 것은 이 작은 문을 통해서 부엌으로 갈 수가 있
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채의 작은 방에는 소년 박정희가 공부할 때 썼던 앉은뱅이 책상
하나가 지금도 놓여 있다.가로88, 세로53cm 정도인데 서랍이 두 개 달려
있다. 서랍 바닥엔 잉크를 흘린 자국이 남아 있고 책상위에는 판독하기
가 어려운 낙서들이 세월 속에서 바래져 가고 있다. 박정희는 펜으로 잉
크를 찍어서 한자이름을 자주 쓴 듯 박이란 글자가 많이 보인다. 대통령
이된 뒤 이 방에 들렀던 박정희는 이 책상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더니 옆
에서 있던 김재학(71세· 전 지산초등학교 교장· 현 생가보존회회장)을
향해서 한 마디 했다.

"요사이 아이들은 이런 책상에서 공부하라고 하면 아마 하루도 못할
거야.".

박정희가 태어난 사랑채에는 외양간과 소여물을 끓이는 큰 가마솥이
걸렸던 부엌이 있다. 이 부엌의 한쪽 벽을 따라서 문제의 디딜방아 복제
품이 놓여 있다. 어머니 백여사가 박정희의 생명을 지우려고 디딜방아의
머리를 쥐고 뒤로 나자빠졌다는 그 방아는 6·25동란 때 불타고 없어졌
다. 5·16거사 뒤에 생가를 찾은 박정희가 맨 처음 물어본 것이 "여기
있던 방아는 어디 갔어?"였다. 그래서 가족들이 똑 같이 생긴 것을 만들
어 놓았던 것이다. 박성빈 집안에서는 이 방아를 보리방아로만 사용했다
고 한다. 겉보리(도정하지 않은 보리)를 호박(절구통 비슷하게 생긴, 돌
을 깎아서 땅에 묻어둔 것)속에 쏟아붓고 물을 약간 축인 다음 두서너
시간 방아질을 하면 껍질과 낱알이 분리된다. 이것을 다시 키질하여 보
리껍질을 까불린 다음 밥을지어먹었던 것이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우물이 있고(지금은 펌프를 달아놓았지만 옛날
에는 두레박을 썼다) 그 옆에 '통시'(변소)가 있다.지금 남아 있는 가구
들을 가지고 추정하면 이집안의 재산목록은 장롱 하나, 놋쇠 화로 하나,
탈곡기 한 대, 가마솥 몇 개, 밥상과 소반 몇 개, 숯불 다리미, 호롱불
등잔 서너 개, 앉은뱅이 책상 하나, 식기와 옷가지들, 그리고 언문소설
을 읽는 데 썼던 백남의의 돋보기 하나, 가축으로는 닭이 대여섯 마리,
황소 한 마리. 박성빈 일가가 약목에서 이사올 때 가져온 가구는 황소
한마리의 등에 다 실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 구미 생가 안채에 보존되어 있는 장롱은 궤짝에 더 가깝다. 나무
상자의 절반을 잘라내고 문을 만들어 열고 닫게 하였다. 백남의는 이 장
롱을 저금통으로 이용하여 동전과 지폐를 모아두었다가 박정희의 월사금
으로 쓰곤 했다. 산자락 끝에 외따로 있는 이 생가를 배경으로 하여 앞
을 내려다보면 낙동강이 아련히 흐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한 5백m 아래
에는 경부선 철로가 있다. 1920년대에는 증기기관차에 객차 서넛이 연결
되고 그 뒤로는 화물칸이 줄지어 달려서 지나가곤 했다. 시계가 없었던
이집안에서 백남의는 기차 지나가는 소리를 기준으로 하여 아침 밥을 지
었다고 한다.

박정희가 태어난 1917년 직후로 추정되는 시기에 큰 형 동희는 집을
나가서 연락두절이 되어버렸다. 금융 조합에서 빌린 돈을 갚지 못하게
되자 도피하게 된 것이라고 가족들은 말하고 있다. 박정희의 큰 누나 귀
희의 아들 은희만은 "함흥에 돈을 벌러 가서 산판 일 등 안해 본 일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함흥차사'란 별명이 붙은 동희가 함경도 일대
와 만주 등지를 떠돌다가 집으로 돌아온 것은 근 20년이 지난 뒤였다고
한다. 결혼한 직후에 생이별하게 된 그의 아내 김동금은 생과부로 세월
을 보내다가 남편이 돌아왔을 때는 나이 마흔을 훨씬 넘긴 무렵이었다.

김동금이 출산을 할 수 없게 되자 박동희의 여동생 귀희가 같은 마을
에 살던 스물다섯 살 난 여산 송씨를 소개하여 둘째 부인으로 맞게된다.

당시 박동희의 호적에는 그의 조카 박재석이 아들로 입적되어 있었다.
동희가 외지로 떠난 뒤에 소식이 없자 박성빈은 대가 끊길 것을 염려하
여 차남인 무희의 장남 재석을 양자로 삼아 입적시킨 것이다. 재석의 실
제 출생연도는 1923년생인데 호적에는 1925년생으로 적혀 있다. 유아사
망률이 약30%였던 시대 사람들은 태어난 아기가 홍역을 치르고도 살아남
는지를 확인한 다음 그러니까 한 2∼3년 뒤에 호적에 올리곤 했었다.

박동희의 본처 김동금은 6·25때 이 집이 폭격을 맞았을 때 실명했다
고 한다. 소이탄이 눈앞에서 작렬한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1961년 5·16이후에 이 집의 경비를 맡았던 구미경찰서 정보과 형사
들은 김동금의 존재조차도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김씨는 박정희가 공부
방으로 쓰던 사랑채 작은 방에서 주로 누워 지내면서 바깥 출입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62년에 김씨가 68세로 사망했을 때 한 형사는
그런 사람이 집안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그는 이
집을 자주 왕래했으나 박동희와 송씨 부인, 그리고 딸 박재선만 보아왔
던 것이다.

박정희가 자라고 있을 때 농사일을 책임지고 할 수 있는 장정은 박성
빈의 둘째 아들 무희뿐이었다. 어머니 백남의 쪽의 성품을 빼 닮은 그는
다정다감하면서도 언성을 높이는 일 없이 부지런한 성격이었다. 그는 연
안 차씨와 재혼한 뒤에 사랑채 바깥으로 담을 쌓고 초가집을 하나 지어
나갔다. 당시 박성빈 일가의 농토는 처가문중(수원 백씨)의 위토답 여덟
마지기와 칠곡군의 대지주인 장택상(전 국무총리)의 부친소유 다섯 마지
기의 논을 빌려 소작하는 것을 포함해서 열세 마지기였다.

이 무렵 구미읍의 대부분 농가는 소작농이었고 그들의 평균 경작 농
토가 10여 마지기 정도였다고 한다. 소작료와 시제때 내는 쌀을 빼면 이
집안에 매년 떨어진 곡식은 스무 가마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의 쌀은 화폐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이 쌀을 팔아서 생활 필수품을
사고 학비도 대야 했다. 박무희는 집안에서 쌀이 떨어질 때면 밤을 새워
가마니를 짜서 약목시장에 가서 팔곤 했다. 재석도 어린 나이에 아버지
를 도와서 가마니를 짜야 했고 수십 장의 가마니를 지고 시장으로 가는
아버지의 뒤를, 서너 장 되는 가마니를 둘둘 말아 지고서 낑낑 대며 따
라가곤 했다.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