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박정희와 박한생 ##.
박정희 집안에서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인물이 있다. 박성빈의 3남 박
한생이다. 호적에는 그가 1911년 8월26일에 태어나서 1925년 9월26일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박정희가 여덟 살 때 한생은 열네 살에 죽은
것으로 된다. 그렇다면 박정희의 기억에 한생에 대한 것이 남아 있을 터
인데 한번도 이 형에 대해서 언급한 자료가 없다. 박정희가의 가족들도
한생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상모동 주변의 노인들을 상대로 취재
해보니 거의 일치된 증언이 나왔다. 정신건강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다
는 것이다. 한 70대 노인은 익명을 전제로 하여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 집안의 기둥감이었던 박상희는 아버지 박성빈의 성격을 많이 닮아
호담하고 외향적이며 정치적이었다. 잘 생긴 외모에 타고난 인간적
매력을 가졌던 그는 1927년부터 1931년까지 신간회 선산지부에서 민족운동을
하며 수차례 일본 경찰에 검속당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기자와 조선일보
지국장 겸 기자도 역임했던 박상희는 해방이후까지 신문사 지국을 운영하고
재산도 제법 모았다. 현재 박정희 집안의 선산은 1930년대에 박상희가
구입한 것으로 당시 마을 주민들은 "이 집안에서 대통령이 나온다면
박상희라고 생각했다"고 회고한다. 사진은 1930년대 말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언제나 산이고 들이고 쏘다녔는데 태어날 때부터 이상하다고 했지. 그
래서 학교도 안보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때는 누가 돌보아줄 수도 없
는 시절이라 혼자서 싸돌아다니다가 밤이 되면 집에 들어오고 그랬지 뭐."
.
박정희와 함께 상모교회를 다녔던 한성도(82) 김삼수(83)의 증언도 일
치하고 있다. 김목사는 "박한생은 나무 작대기를 목검삼아 휘두르고 다니
다가 부러지면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작대기를 달라고 하곤 했다"고 기억
한다. 박한생의 사망시기에 대해서는 호적 기재일시보다 한 3년이 늦은
1928년경이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지, 또 박
한 생의 정확한 사인이 무엇인지는 확인할 수가 없었다. 박한생의 죽음에
대한 수수께끼 때문에 5·16 이후에는 야당정치인들에의해서 박정희 의장
의 형이 월북하여 북한에 생존해 있다는, 증거도 없는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었다. 어머니 백남의에게는 한생이 가슴속의 그늘이었을 것이다.
박정희 집안의 빛은 셋째 형 상희였다. 박정희가 구미보통학교에 다닐
때 이 형은 20대의 건실한 청년으로서 구미면에서는 하나의 '인물'로 기
반을 잡아나가고 있었다. 박상희는 키가 크고 가슴은 뜨거운 청년이었다.
학력은 비록 보통학교 졸업에 그쳤지만 그는 타고난 수완과 인간적 매력
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박상희의 처 조귀분(작고)의 조카딸 조길수(76)
는 박, 조 두 사람이 1929년에 김천에서 결혼식을 올릴 때 화동으로 들러
리를 섰다.
"다른 사람들은 고모부 옆에 서면 왜소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인물도
훤칠했지만 사람을 위압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고모부는 구미역 옆에 살
고 있었는데 놀러가서 마당에서 사람들이 시비를 가리고 있는 것을 몇번
보았습니다. 고모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는 '그건 자네가 잘못
했네'라고 판결을 내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일종의 원님 재판이었는데 희
안하게도 사람들이 거기에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구미시 문화원 부원장 신기도(67)는 당시 구미 일대에서 이런 말이 유
행했다고 기억한다.
"최관호 김상호 박상희 이 세 사람을 두고 일관호,이상호, 삼상희라고
했습니다. 이들 세 사람이 모이면 그 기세가 대단하여 다른 사람들은 함
부로 접근할 수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곳 사람들 사이에서는 젊은
영웅들이었지요.".
구미의 노인들은 지금도 "그 집안에서 대통령이 나온다면 박상희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박상희의 성격은 아버지(박성빈)과 비슷하여 호담하
고 외향적이며 정치적이었다. 어머니를 닮아 내향적이면서도 빈틈이 없고
당돌한 동생 정희와는 대조적이었다. 박정희가 구미보통학교에 다니고 있
을 때 상희 형은 구미역으로 나가서 지역언론인으로 자립하고 있었다. 그
는 민족언론을 기반으로 삼아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지부와 청년단체를
조직했고 여러 차례 경찰에 구속, 연행, 예비검속되기도 하면서 사회주의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이러한 형을 가까이서 보고 자란 소년 박정희도
상당한 영향을 받게 된다. 박상희의 행적을 확인시켜주는 최초의 신문기
사는 1927년 10월14일자 조선일보 4면에 실린 '신간회기사일속'이란 제하
의 5단 기사였다. 맞춤법을 요사이식으로 고쳐 요약해 본다.
'경북선산지회 설립대회 - 경북 선산군 구미에서 전민족적 단일정당
인 신간회 선산 지회 설립을 준비한다는 것은 본보에서 이미 보도하였다.
설립대회는 지난 11일 오후 2시에 개최하려 했으나 엄중한 선산경찰의 간
섭으로 정각에 개최하지 못했다. 자동차로 시내에 '삐라'를 뿌리고 대회
선전을 하려 했으나 '삐라'만을 뿌렸다. 준비위원 박상희군이 경찰에 수
차질문을 하고 교섭하였으나 상부의 명이라며 절대 허가치 않음으로 '식
민지를 타도하자' 등의 글이 실린 집회도구는 모두 압수되고 정각보다 늦
은 오후 3시30분에 개회선언을 했다.'.
이 기사 아래에 연이어 보도된 내용은 박상희가 소환되었다는 소식을
담고 있다.
'경찰서에서 박씨를 소환 - 신간 선산 지회 설립 대회에 선산 경찰의
간섭이 심하다 함은 앞서 보도하였거니와 이 대회에 구산 구락부(균산구
락부)에서 축문을 보냈는데 그 축문 중 불온한 문구가 있다고 축문을 앞
수하고 구산 구락부 위원이요 설립대회준비위원인 박상희군을 대회일인
지난 11일 오후 1시경 현지 주재소에서 소환하여 서장이 취조실로 데리고
가서 장시간 요령부득의 말을 하고 같은 날 2시반 경에 돌려 보냈는데 일
반의 비난이 많다더라(선산)'.
1927년 1월부터 1931년 5월까지 존속한 신간회는 전국에 1백50여 개 지
회를 두었고 회원수는 4만여명에 이르렀다. 일제치하에서 가장 큰 항일
사회운동단체였던 신간회는 1920년대의 조선에서 양대 항일운동세력이었
던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민족협동전선론'으로 뭉친 조직이
었다.
신간회 창립 때 51명의 간부진 중에서는 조선일보계가 회장 이상재(조
선일보 사장)를 필두로 하여 안재홍(조선일보 주필) 신석우(조선일보 부
사장) 등 9명으로 가장 많았다. 기독교계가 조만식 등 7명, 불교계가 한
용운 1명, 천도교계가 권동진 등 3명, 유림계가 김명동 등 3명, 학계가
조병옥 등 4명, 조선공산당계가 김준연 홍명희 등 5명. 조선일보는 '신간
회의 결성을 적극 지원하여 그 대변지 구실을 하였다'(이균영의 '신간회
연구'). 조선일보는 1926년 12월16일부터 연4회에 걸쳐 사설을 통해 신간
회의 방향을 제시했다. 타협론자들이 조선 자치운동에 동조할 가능성을
경고하면서 민족해방을 위한 비타협적 투쟁을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신간
회 준비 모임도 주로 조선일보사에서 열렸다.
조선일보가 신간회 선산지회 박상희의 소환사건 등 일제의 탄압을 집
요하게 보도한 것도 조선일보와 신간회의 깊은 관계를 반영한다. 1927년
11월14일자 조선일보의 신간회간부 검거 기사에도 박상희의 이름이 등장
한다. 이 기사에는 박상희가 '신간회 선산지회 조사부 총무'로 기재되어
있다. '경북 경찰부원이 돌연 신간회원 검거 - 내용은 절대 비밀에 부치
어 - 불안에 싸인 구미(균미) 일대'라는 제하의 대구발 기사를 읽어보자.
'강북 경찰부 고등과에서는 돌연히 긴장한 중에 최석현 경부보는 형사
세명을 데리고 구미(균미)까지 가서 신간회 선산지회 조사부 총무 박상희,
구산구락부원(균산구락부원) 윤재우 김정술 3씨를 검거한후에 신간지회
사무실과 3씨의 집을 수색한 후에 지난 십일 오후 열시경에 대구로 압송
하여 대구서 유치장에다가 유치한 후에 방금 극비리에 취조하는 중인 바
모처로부터 탐문한 바에 의하면 방금 구미(균미)에서는 조금만 수상한 사
람이 지나가면 즉시 불문곡직하고 검속함으로 인하여 현재 구미 사람들은
매우 공포에 싸여 있는 모양이더라.'.
'조갑제 출판국부국장. 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