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뼈에 사무친 것 ##.
박정희의 4기생들이 3학년도에 금강산으로 수학여행을 갔다가 돌아
오는 길에 서울에 들르니 총독부로 전근된지 몇달 되지 않은 히라야마
전교장이 마중을 나와서 학생들을 비원으로 안내했다. 한 학생이 숲에
서 새가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야, 학이다!"라고 소리쳤다. 히라야마
는 "아니야, 그건 도요새야"라고 바로잡아 주었다. 그리고는 혼잣말처
럼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비원에까지 와서 도요새나 보고 신기하게
여기다니….".
이정찬이 편집한 대구사범 4기생 졸업앨범의 첫장. 학생들이 신사참배하는 사진
위에다가 교육자 페스탈로치의 사진을 배치시켜 천황이 아닌 페스탈로치를 향해서
경의를 표하는 것처럼 만들어버렸다. 박정희가 대구사범 5년 동안 배운 것은
나라 잃은 조선인의 사무친 한이었다.
망국의 정원에서 역사의 교훈을 배우려고 하지 않는 조선인 제자들
에 대한 한탄으로 들렸다. 1934년 3월 29일 히라야마의 후임으로 교장
이 된 도리카이는 '혼켄(본원)'이란 별명을 학생들로부터 얻었다. 강
의 때마다 그는 "천황은 삼라만상의 본원이다. 우리는 그 본원으로 돌
아가야 한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철저한 국가주의자 도리카이 교장의
치하에서 박정희는 조선과 조선인의 처지를 절절히 체험하였다. 대구
사범에서 조선인 학생들에 대한 사상통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구석
이 있다. 사회에서는 팔리고 있고 일반 고보에서는 하등 문제가 되지
않고 있던 책이나 잡지도 허가없이 갖고 있다가 적발되면 퇴학을 당하
곤 했다. 사회주의 서적은 물론이고 '삼천리' 같은 잡지와 '이순신'전
기도 독서금지였다.
박정희의 동급생 이성조(경북교육감 역임)는 "압제가 심할 수록
반발심도 거세어지고 나라를 잃은 설움이 뼈에 사무치는 것을 느꼈다"
고 했다. 이런 '사무치는 감정'은 다른 학교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졸업후에도 그런 감시는 계속되어 대구사범 출
신 교사들이 부임하면 현지 경찰서 주재소에서는 몰래 하숙집을 뒤져
편지나 책들을 살펴보기도 했다. 대구사범의 항일 전통은 박정희가 졸
업한 뒤에도 계속되었다. 1939년에는 근로봉사작업장에서 조선인 학생
들이 평소에 못되게 굴던 일본인 교사들을 구타했다가 7명이 퇴학되었
다. 1941년에는 6기생들이 5학년때 만들었던 우리 민요집이 뒤늦게 발
각되어 교사로 근무하던 6기생 18명이 조사를 받았다. 이 해에는 또 8,
9,10기생들의 항일 비밀결사조직이 '반딧불'이라는 문예지를 발간하는
등 민족혼을 깨우치는 운동을 하다가 발각되었다. 김영기 교사를 비롯
한 수십명이 구속되었다. 재판에 넘어간 학생이 34명, 그중 5명은 옥
사했고 다른 사람들은 광복 때 풀려났다.
1937년 3월 20일 박정희를 비롯한 대구사범 4기생이 5학년 과정을
마치고 졸업했을때 조선인 학생은 입학식 때의 90명에서 62명으로, 일
본인 학생은 10명에서 8명으로 줄어 있었다. 조선인 학생 탈락자 28명
중 대부분은 사회주의 서적들을 읽었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 많은 동
급생들이 이른바 '주의자'를 흠모하고 있을 때 박정희는 위인, 영웅,
역사, 조선어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그럼에도 박정희는 당시 조선의
지식인 사회를 주도하고있던 사회주의 경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
을 수는 없었다. 동급생들의 약 3분의 1이 그 사상문제로 학교를 쫓겨
나고 상희형이 그쪽으로 기울고 있는 상황에서 소작농 출신의 가난한
이 학생이 마르크스와 레닌을 강건너 불보듯 하고 있을 수는 없었을것
이다. 해방 뒤 그가 남로당에 포섭되는 토양이 이때부터 형성되기 시
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박정희가 사회주의에 관심을 일정하게 가졌다
고 해도 그것은 당시의 다른 학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민족해방 문제와
관련해서였을 것이다.
4기생들의 명단을 놓고서 그들이 졸업한 뒤에 살아간 과정을 알아
보면 격동기 현대사의 나이테와 단면이 떠오른다. 월북, 납북, 행방불
명,암살, 학병, 빨치산, 군인, 회장,경찰서장,변호사, 주필, 교수, 교
육감, 과학자… 우 익과 좌익이 교차하고 남과 북이 불연속되는 4기생
들의 경력과 경험들은 이들이 헤쳐가야 했던 세월의 자국들이다. 형은
우익총에, 아내는 좌익 총에, 자신은 부하 총에 죽은 박정희는 특별히
예외적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 4기생 나팔수 3인조의 운명이 상징적
이다. 김국진은 평탄한 교육자 생활에서 물러난 뒤에 지금 경기도 과
천에서 살고 있다. 이○○는 졸업후 교사를 하다가 대구의전에 들어갔
다. 의사로 일하다가 광복한 뒤에 남로당에 가입했다. 인천상륙 직후
지리산에 들어간 그는 빨치산부대의 의료부장으로 3년간 일했다. 줄톱
을 수술칼 삼아, 썩어들어가는 사지를 마취를 시키지도 않고 잘라내었
다.그러다가 토벌군에 포위되었다. 자살하기 위하여 심장을 향해서 발
사한 두 발의 총알이 빗나간 덕분에 그는 포로가 되었고 지금은 대한
민국 국민으로서 서울 하늘 아래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박정
희.
대구사범 4기생과 같은 시기(1932∼1936년)에 도쿄제국대학 법학
부를 다녔던 조선인은 장경근(전 자유당 의원)등 10명이었다. 이들은
모두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하였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제의
관리가 되었다. 몇년전 이들 9명의 운명을 추적해보았더니 납북자 1명
(이충영), 월북자 1명(장수길), 6·25를 전후하여 요절한 사람 5명(장
수철등), 망명자 1명(장경근)이었다.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한 뒤에 천
수를 누리고 있는 이는 임문환(전 농림부 장관) 한 사람 뿐이었다. 대
구사범과 도쿄제대 법학부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은 조선인들은 그 교
육과 지식 때문에 식민지 시대, 분단, 그리고 사상전쟁 시대를 살면서
서민대중보다도 더 많은 상처를 받게 된 것이다. 난세의 지식은 독이
되고 함정이 되어 죽음을 재촉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박정희가 형
제들 중에서도 비명에 간 이는 근대 교육을 받은 두 사람(상희, 정희)
이었다. 이런 세대를, 요사이의 시각으로서 친일, 반일, 반공, 좌익의
틀속에 무리하게 넣고 빼다가 보면 실존으로서의 인간은 실종되어버리
는 것이다.
대구사범 5년은 박정희가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평생동안 소
용이 될 인격의 틀 뿐 아니라 인맥의 그물을 만들어 주었다. 교련주임
아리카와 중좌, 조선어 교사 김영기, 한문 교사 염정권, 교육학 교사
박관수-김용하(대우그룹 김우중회장의 선친), 동기생 서정귀(작고·전
호남정유 회장) 황용주(전 문화방송사장) 권상하(전 대통령정보비서관)
조증출(작고·전 문화방송사장) 왕학수(작고·전 부산일보 사장) 이성
조(전 경북교육감) 김병희(전 인하대학장) 장병엽(납북·전 서대문경
찰서장). 이런 사람들은 박정희와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사교성이 없는
그를 따뜻한 인간관계속에 머물게 한다. 박정희를 육영수와 맺어준 것
도 한 기 후배인 송재천이었던 것이다.
박정희에게 있어서 대구사범이 가져다 준 가장 큰 축복은 꼴찌로
의 추락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는 음지와 양지를 다 같이 경험해봄으
로써 인간차별을 하지 않게 되고 인정의 기미를 파악하여 바닥 민심을
읽을수 있는 눈치 같은 것,그리하여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을 터
득했을 것이다. 이는 부잣집에서 태어난 뒤 일찍 출세하여 서민들의
숨결을 접할 기회를 상실함으로써 먹고 사는 문제의 엄숙함을 모르고
대통령직을 수행하다가 참담한 실패를 기록한 김영삼과 대조된다. 박
정희가 대구사범에서 모범생이었다면 강렬한 문제 의식은 자라나지 않
았을것이고 혁명가의 길도 걷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교사+군
인=혁명가'의 공식을 살았다. 대구사범 교육은 교사와 군인, 즉 칼과
붓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다.
1937년 4월초 만 20세의 박정희는 단신으로 경북 문경의 산간 학
교에 교사로 부임함으로써 우선 붓의 길에 접어든다. (조갑제 출판국
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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