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동양의 서부 ##.
박정희는 1940년4월에 만주제국 육군군관학교에 제2기생으로 입교했
다. 제2기생은 만계2백40명, 일계2백40명으로 구성되었다. 조선인 11명
은 만계에 포함되었다. 박정희의 동기생은 이한림(1군사령관,건설부장
관 역임) 김묵(육군소장 예편) 이재기(작고·육군대령 예편) 이섭준(이
섭준·작고) 이병주(군내 남로당 수사 때 연루되어 숙청됨) 이상진(숙
청) 안영길(숙청) 강창선(숙청) 김재풍(재북) 김원기였다.
사진설명 :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다니다가 겨울방학을 맞아 문경보통학교를 찾아
정문 앞에서 기념촬영했다. 맨 오른쪽은 자신이 하숙했던 집의 아들
임창발이고 가운데는 하숙동기인 허동식이다. 박정희는 방학 때만 되면
문경에 내려와 옛 하숙집에서 기거하면서 제자들과 어울렸다.
박정희의 동기생들 가운데는 5·16거사에 가담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오히려 박정희의 쿠데타를 저지하려고 한 사람이 있는데 당시
1군사령관 이한림 중장이었다. 1기생은 13명으로서 12명이 간도 용정
에 있던 광명중학교 출신들이었다. 이 선배기수에 박정희의 5·16을 지
지한 핵심인물들이 있었다. 이주일(최고회의 부의장·당시 2군참모장)
김동하(작고·해병대 소장) 윤태일(작고·육군중장, 서울시장) 박임항
(작고·당시 5군단장) 방원철(당시 육군대령)이 그들이다. 김포주둔 해
병여단을 이끌고 선두에서 한강을 건넜던 김윤근여단장은 만주군관학교
제6기출신이었다. 박정희와 주한미군측의 화해를 도왔던 강문봉(육군중
장예편)은 박정희의 3년 후배(5기)였다.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가지
않았더라면 5·16거사는 성공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만군인맥
은 박정희의 단단한 기반이 되었다.
만주군관학교 1∼7기생출신 한국인들은 48명. 그들중 10명 정도는
5·16지지세력으로 분류된다. 이와 비슷한 인원이 좌익으로 기울어 여
순14연대 반란사건을 전후한 숙군수사 때 제거되었다. 좌익과 우익이
공존하고 교차한 만주군관학교 인맥의 한가운데 있었던 것이 두 세계를
다 경험한 박정희였다.
만군인맥은 끈끈한 인간관계에 바탕을 둔 강력한 결속력으로 유명했
다. 이런 단결력과 함께 그들은 사회와 국가를 건설하고 개혁하겠다는
정치성향이 강했다. 일제에 의한 중국 대륙 침략에 있어서 첨병으로 뽑
혔다는점이 그들로 하여금 권력과 총구의 함수관계와 개혁과 군대의 역
할에 대하여 눈을 뜨게 만들었으며 현실을 직시하도록 했다. 국가건설
과 사회개혁에 대한 열정은 같았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 만군군관학교
인맥은 좌, 우로 갈렸던 것이다. 박정희와 몇 사람들은 먼저 좌익으로
기울었다가 환상이었음을 깨닫고 우익으로 전향한 경우이다. 이 전향이
늦어 처형된 사람들도 6명이나 된다.
만군인맥을 4년제 만주군관학교(신경, 지금의 장춘)의 전신인 2년제
봉천(지금의 심양)군관학교로 넓혀보면 봉천 5기 정일권(작고·육군참
모총장, 국회의장) 신현준(해병대사령관) 김백일(육군중장·작고), 9기
백선엽(육군참모총장)이 등장한다. 원용덕(육군중장·작고)은 만주 육
군군의 학교출신이다. 이들 만군인맥은 거의가함경도와 간도 출신들이
다.
이들이 6·25동란 때는 공산군의 침력을 저지하는 지휘관들이었고
전후에는 한국군을 사실상 지배하였다. 함경도 출신 만군인맥은 경상도
출신 박정희를 뒷받침하여 5·16거사를 성공시키는 데까지는 함께 갔으
나 그 뒤의 권력투쟁에서 박정희-김종필 세력에 의해 거세되어(소위
'알라스카 토벌작전') 권력의 무대에서 퇴장한다.
박정희의 만주행은 이러한 만군인맥과의 연결고리를 만들었을 뿐 아
니라 집권한 뒤에는 일본의 만주인맥과 제휴하는 고리가 되었다. 박정
희가 만주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있던 무렵에 만주국 총무청차장(산
업부차장)으로서 사실상 괴뢰국 경영의 실권을 쥐었던 기시 노부스케
(일본수상 역임)와 시이나 산업부 국장(자민당 부총재 역임)은 일본내
만주인맥의 중심으로서 한일 국교정상화에서부터 박정희 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인맥이나 인간의 성격은 무대가 되었던 지역의 성격을 닮는 면이 있
다. 도시는 영리함을, 농토는 성실함을, 초원은 활달함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1930∼40년대의 만주는 질풍노도의 시기로서 이 시대를 호흡한
사람들을 과감한 행동파로 만들었다. 만군인맥의 공통점은 결속력, 친
화력,행동력, 그리고 정치지향으로 상징된다. 이종찬(육군참모총장) 이
형근(육군참모총장)으로 대표되는 일본육사출신들은 엘리트의식이 강하
고 깔끔하며 비교적 정치에 중립적인 성향을 보였다. 일본육사에서도
2년을 보낸 박정희는 만군과 일군인맥의 성격을 공유하게 된 면이 있다.
단정하고 사색적인 면은 일군인맥을 닮았고 정치지향과 행동력은 만
군적인 것이다.
박정희가 자신의 운명을 바꾼 만주대륙을 처음 구경한 것은 1935년
대구사범 4학년 수학여행 때였다. 이때 그가 어떤 충격을 받았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동급생들의 기행소감을 기준으로 하여 짐작은 할 수가
있다. 이성렬(82·전 김해여중 교장)은 이렇게 말했다.
'만주를 우리 영토로 착각할 정도였다. 여권도 필요없고 검문검색도
없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대평원, 그것은 황량한 신천지였다. 신경
의 관동군사령부도 견학할 수 있었다. 대포 탱크 같은 신예무기도 보여
주었는데 '까마득한 절망감'을 느꼈다. 일본의 세력이 이 광활한 대지
곳곳에 미치고 있음을 실감했다. 우리의 기를 꺾어놓겠다는 것이 이 수
학여행의 목적이었을지도 몰랐다. 일본의 저력을 보라는 취지였을 것이
다. 지금 생각하면 이광수가 변절한 것도 이해를 할 수 있을 것같다.
그도 이런 일본을 상대로 어떻게 저항하란 말인가 하는 무력감을 느꼈
으리라. 대련의 기름짜는 공장을 견학했는데 꾸리(고력)라고 불리는 중
국인 노동자들이 나체상태에서 일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식사하는
것을 보았는데 검은 빵을 손으로 뜯어서 입에 넣고 파를 춘장이라 불리
는 중국식 된장에 찍어먹는 것이 전부였다. 만주국을 세운 일제는 5족
협화를 부르짖었지만 대우는 일본인 다음이 조선인이고 한족과 만주족
은 그 뒤이고 몽골인이 최저였다. 우리는 착잡한 마음이 되어 대구로
돌아왔다'.
박정희와 단짝이었던 김병희(전 인해대학장)는 "끝간 데 없이 계속
되는 수수밭과 붉게 타오르는 태양, 그리고 신경의 엄청난 신시가지 건
설이 인상적이었다"고 회고했다. 수학여행 경로에는 여순의 러일전쟁
전적지인 203고지 견학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의 노기 대장이 기관총
을 처음으로 실전에 동원한 러시아 수비대에 대해 수만 명을 희생시켜
가면서 점령한 고지였다.
박정희가 발길을 내디딘 당시의 만주는 '동양의 서부'였다. 야망에
불타는 군인과 관료들, 만주철도회사 조사부와 같은 세계최대의 두뇌집
단, 관동군, 만주군, 팔로군, 장개석군, 마적, 김일성계 빨치산, 첩자,
아편 밀매자, 사기꾼 등 갖가지 모습의 인간군상이, 5족(일본족, 조선
족, 한족, 만주족, 몽골족)과 뒤엉켜 사는 이 넓은 대지에서 기회를 찾
아 나름대로의 꿈을 펴려고 좌충우돌하고 있었다. 좋게 말하면 용광로
요 나쁘게 표현하면 쓰레기통이고 시궁창이었다. 야만, 음모, 살인, 방
화, 벼락출세, 떼돈벌기 등 비일상적인 사건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
었던 만주는 박정희를 단련, 오염, 고무시키면서 안개처럼 그를 감싸게
되는 것이다.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