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이현란 ##.
1947년 가을 춘천에서 8연대 경리장교 박경원(육군중장, 내무부
장관 역임)대위가 결혼식을 올렸다. 사관학교 중대장 박정희는 친
구들과 함께 하객으로 이 결혼식에 참석했다. 박정희는 박경원보다
여섯 살이 많았으나 "박형"이라 부르면서 접근하는 박경원과 친했
다. 이 결혼식의 신랑측 들러리는 김점곤) 대위였고 신부 고금옥의
들러리는 이현란이라는 이화여대 학생이었다. 김점곤은 그날 밤 이
현란과 하객들 하고 유쾌하게 놀았다. 이현란은 미인이었다. 몸매
는 날씬하고 얼굴은 이국적으로 생긴 데다가 성격이 쾌활했다. 나
이는 김점곤보다 많게 보여 친구들이 "다른 건 다 맞는데 나이가
안맞는군"이라고 농담도 했다. 몇 달 뒤 김점곤은 용산에 있는 육
군장교 관사로 박정희 대위를 찾아갔다가 깜짝 놀랐다. 그 들러리
아가씨가 박대위와 같이 살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놀란 것은 박경원도 마찬가지였다. 박경원도 결혼한 뒤에 용산
관사에서 살림을 차렸다. 이 관사촌은 미군들이 사용하다가 철수한
뒤 우리 장교들에게 넘겨준 것이었다. 서양식을 한국식으로 개조하
여 온돌과 장작아궁이를 만들어 쓰고 있었다. 한 집에 방이 서너개
있는 좋은 집이었다. 박경원이 하루는 퇴근하여 오니 아내 고금옥
이 말하는 것이었다.
"결혼식 때 들러리를 섰던 친구가 아무래도 박정희씨와 같이 살
고 있는 것 같아요.".
고금옥은 원산에서 출생하여 루시여고를 나온 뒤 교사생활을 잠
깐 하다가 월남했다. 이현란과는 여고시절 동창 사이였다. 박경원
은 섭섭했다. 평소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인데 왜 나에겐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더구나 한 3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관사인
데. 다음날 박경원 부부는 박정희의 관사를 찾아갔다. 이현란은 정
말 미인이었다. 박정희-이현란은 원만하게 보였다. 두 사람은 큰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박정희가 아무 내색도 하지않고 박경원 부
부를 맞아주니 이쪽에서도 할 말이 없었다. 두 박 대위는 그냥 세
상 돌아가는 이야기만 나누었다. 고금옥과 이현란은 부엌에서 무어
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박경원 대위는 짚이는 데가
있어서 같은 경리장교인 이효에게 물어보았다. 이대위는 껄껄 웃으
면서 자초지종을 말해주었다. 함남출신인 이효는 사관학교 2기생으
로서 박정희와 동기였지만 나이는 다섯 살이 많았다. 이효는 2기생
들 가운데 최연장자였다. 박정희도 나이가 많은 축에 들었기 때문
인지 두사람은 생도 시절부터 친했다. 이효 장군은 몇년 전 작고했
는데 부인 우정자(81세) 할머니에 따르면 박정희는 생도시절에도
신당동에 있던 이효의 집에 자주 놀러왔다고 한다.
"그분은 이야기를 아주 구수하고 재미있게 하셨어요. 자기 자랑
을 전혀 안하시는 분이라 인상에 남았습니다. 이현란은 남편의 조
카와 함께 영어학원에 다녔다고 해요. 우리 집에도 놀러온 적이 있
습니다. 들러리를 서게 된것도 남편이 권유했기 때문입니다.".
이효 대위가 박경원 대위한테 털어놓은 사정은 이러했다.
"당신 결혼식 날 우리끼리 한 잔 했지. 그 자리에서 박정희가
내게 오더니 이렇게 말하는 거야. '이형, 나도 혼자서 쓸쓸하게 지
내는데 아까 들러리 섰던 아가씨 하고 잘 좀 되도록 도와주시오'.
그래서 내가 소개시켜주었지.".
그때 스물 두 살이던 이현란은 고향에서 단신으로 월남한 뒤 이
화여대 아동교육학과 1학년에 재학중이었다. 이화여대에 보존되어
있는 이현란의 성적표를 보면 율동과목의 점수가 가장 높다(79점).
이현란은 생전증언(1987년)에서 '나는 그때 이화여대 다닙네 해서
포부도 크고 전성기였다'고 말했다. 화사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는 이현란은 토요일 오후에 이효 대위가 자꾸 나가자고
해서 명동 삼호정에 갔다고 한다.
"윤태일, 이한림, 이주일 등 몇 사람이 미리 와 있었습니다. 나
는 부끄러워서 말대꾸도 못하고 구석에 앉아 있는데 미스터 박이
소개되었습니다. 키도 조그마한 양반이 볼품이 없었습니다만 일본
육사를 나와서 그런지 박력과 기품이 있었습니다. 그 뒤 미스터 박
은 일요일만 되면 기숙사로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때 부모들은 북
에서 못나오시고 해서 저는 있는 돈을 까먹고 있었습니다. 의지할
곳이 필요했습니다. 그런 형편에 미스터 박이 침착하고 저에게 잘
해주니 여자로서 끌렸습니다. 좀 더 좋은 사람이었으면 하는 마음
도 있었지만 양쪽이 다 부추겨서 약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현란은 은사의 도움을 받고 가정교사도 하면서 등록금을 마
련하고 있었다고 한다. 박정희-이현란은 1948년에 들어서 약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지금 독일에 간 친구 하나만 참석했어요. 피아노책을 사려고
기숙사에서 나오는데 미스터 박이 '이의 없죠?'라고 해요. 저는 부
끄러워서 대답도 못했는데 그걸로 응한 걸로 되었습니다. 가 보니
여러 사람들이 와 있었습니다. 명동의 한식집인데 너무 당황해서
간판도 보지 못했습니다. 내 친구는 내가 마음의 준비가 있었던 줄
알았나봐요.".
박정희는 이현란에게 자신이 이미 장가를 들어 열 살이 넘은 딸
까지 두고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이즈음부터 본처 김
호남과 이혼을 하려고 애쓴다. 큰 딸 박재옥의 기억 .
"어느 날 아버지가 오랜만에 집에 오셨습니다. 집안 어른들과
뭔가 심각하게 의논하셨는데 아마도 이때 이혼하기로 결정하셨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너무나 속이 상해서 어쩔 줄 몰라 하셨습니
다. '너희 아버지가 아무래도 이상하다. 서울에 딴 여자가 있는 것
같구나. 어쩐지 내가 이 집 식구가될 수는 없을 것 같구나'라고 하
셔요.".
박재옥은 "엄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하고 물었다.
"이혼을 한다는 거지."
"엄마 이혼이 뭐예요."
"이제 너희 집에서 못살고 쫓겨나게 된 거야.".
그러면서도 김호남은 "절대로 내 손으로는 이혼을 안해줄 거야.
내가 이렇게 속이 썩었으니 자기도 당해봐야 돼"라고 했다.(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