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김형, 고맙습니다" ##.
군내 좌익세포를 숙정하는 수사과정에서 박정희의 제보 어느정도였
던가, 박정희의 역할과 위상은 어느 정도였던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수사-재판기록이 없어진 현재,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관련자들의
증언을 종합하고 검토해야 한다. 숙군수사본부였던 육군정보국 첩보과
장 겸 전투정보과장 김점곤(육군소장 예편·평화연구원장)은 이 무렵
박정희 소령과 인간적으로나 업무적으로 무척 가까웠다.
육사 1중대장 박정희를 뒤따라 체포된 뒤 숙청된 1중대 2구대장 황택림 중위(왼쪽)와
2중대장 강창선 대위.
육사 1기 선배인 김점곤은 또 1연대 정보주임으로서 숙군수사를 사
실상 주도하고 있던 김창룡 소령의 보고상선에 있었다. 숙군수사에 시
동이 걸린 어느 날 김창룡 소령이 전화로 "이재복이를 잡았습니다"고
보고해 왔다.
"이재복이 누군데?"
"남로당 거물입니다.".
한 시간쯤 뒤 김창룡이 나타나더니 김점곤 과장에게 흑백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김(김) 과장은 "잘 모르겠는데 어디서 본듯하기도 하
고"라고 했다. 김창룡은 "이 놈이 이재복인데 김 과장과 춘천에서 저녁
을 같이 했다는데요"라고 했다. 그제서야 어떤 회식자리가 생각났다.
김점곤은 "박정희가 숙형라며 데리고 온 사람과 저녁을 먹은 것이 기억
난다"고 했다.
김창룡은 "이 놈이 그날 박정희의 숙형이라 위장하고 그 자리에 나
타난 겁니다"라고 했다. 1년반 전 8연대 시절 그 회식 자리가 마련된
것은 작전참모 박정희 소위가 김점곤 중위에게 "시골에서 산판을 하여
돈을 좀번 숙형(삼촌)이 계시는데 저녁을 사겠답니다"라고 말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원용덕 연대장을 모시고 술을 함께 마시는데 서로 인사
가 끝나고 잔이 몇 바퀴 돌고나서 원용덕이 소리를 빽 질렀다.
"야, 정희야, 너 아주 쌍놈이구나.".
박정희는 "예?"하고 묻더니 "저는 가난하게는 살았어도 쌍놈은 아닙
니다"라고 했다.
"이놈아, 숙질간에 성이 다르니 쌍놈일 수밖에.".
그 순간 김점곤과 박정희의 눈길이 마주쳤다. 김점곤의 눈은 '어떻
게 된거야?'라고 묻고 있었고, 박정희의 눈은 '어떻게 하지?'라고 도움
을 청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김점곤의 반응이 없자 잠시 머뭇거리다가
"저의 외숙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원용덕은 기다리던 대답이란
듯이 "그러면 그렇지"라고 하여 웃음을 터뜨려 분위기는 정상화되었다.
그때 박정희의 외숙이 사실은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 이재복이었다는 사
실에 경악한 김점곤은 다음날 일어나 생각하니 박정희도 붙들려 들어가
있을 것이라는 직감을 했다. 전화로 김창룡을 불렀다.
"박정희는 고문하지 말아요. 몸이 약해서 다른 사람들처럼 다루면
죽을 가능성이 있어.".
그때 박정희는 자신을 좀 혹사하고 있었다. 무슨 고민이 있는지 말
술을 퍼마시는데 체력이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점곤이 김창
룡으로부터들은 보고에 따르면 박정희는 남로당의 군사부책인 이재복의
직속인물로서 군내 남로당 조직도에선 최상층부에 위치하고 있었다."여
수 14연대 반란사건 직전에 이재복이 박정희를 군내조직 책임자로 임명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인간적으로 자신과 직접 연결되고 두뇌와 인격
이 뛰어난 박정희로 하여금 조직을 관리하도록 했을 것입니다. 그때 남
로당의 군내세포 관리체계는 엉망이었습니다. 박헌영은 빨치산 출신인
김일성과는 달리 군대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육사 3기생부터 군내당을 건설하기로 한 것 같은데 지휘체계의 혼선이
컸습니다. 여수 14연대 반란사건도 중앙당의 이재복이 지시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고 도당이 관리하던 하사관들이 멋대로 주동하여 일으킨 것입
니다. 중앙당은 장교들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김지회 중위가 뒤늦게 지
창수상사로부터 지휘권을 인수하여 반란군의 두목이 된 것입니다. 지창
수는 같은 부대에 있던 김지회가 남로당 세포라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김창룡이 박정희를 통해서 군내 남로당 조직의 윤곽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이 무엇보다도 큰 수확이었습니다. 저는 김창룡에게 박정희로부터 자
술서를 받되 그 내용이 우리가 후에 조사한 것과 다르게 나오면 용서할
수없다고 못을 박고 이 점을 말해두라고 했습니다.".
박정희가 조직을 털어놓기 전에도 김창룡은 이재복보다 먼저 붙든
그의 비서 김영식을 통해서 군내 조직원 수백명의 명단을 입수하였다.
수사책임자 백선엽 육군 정보국장에 따르면 경찰로부터도 군내의좌익명
단이 넘어왔다고 한다. 김태선 서울시경국장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
한 명단이었다. 군정시대 경찰은 좌익소탕에 앞장 선 때문에 체계적으
로 정보를 관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대통령은 미군사고문단장 로버
츠를 불러 그 자료를 내놓으면서 "그 동안 미군은 뭘하고 있었는가. 이
런 군대를 대한민국 정부에 인계했는가. 책임지고 숙청하라"고 다그쳤
다.
이 명단은 이응준 육군총참모장에게 건네졌고 숙군수사 때 기초자료
로 쓰여졌다. 이 경찰자료와 이재복 비서로부터 압수한 명단 중에 박정
희의 이름이 끼여 있어 그의 체포로 연결되었던 것 같다. 박정희가 털
어놓은 명단 때문에 군내의 좌익들이 몽땅 체포되었다는 주장은 과장이
다.
좌익세포가 가장 많이 들어가 있었던 곳은 육군사관학교였다. 1중
대장 박정희 소령에 이어 1중대 2구대장 황택림 중위, 4구대장 장구섭
소위, 2중대장 강창선 대위가 체포되었다. 그 이전에 사관학교에서 간
부로 근무했던 오일균, 조병건, 김학림도 제거되었다. 박정희의 만주군
관학교 2기 동기 출신들 가운데서도 이병주, 안영길, 강창선, 이상진이
숙청되었다. 혈연, 학연, 군맥에 의해 좌익인맥과 이중삼중으로 얽혀
있었던 것이 박정희였다. 김점곤의 관사는 박정희의 용산 관사와 길 하
나를 두고 대각선으로 마주보고 있었다. 박정희가 구속된 뒤에는 혼자
있는 이현란을 총각의 몸으로 찾아가기가 뭣했다. 옆집에 살고 있던 군
악대장 이종태 부부와 함께 들러 쌀도 갖다주곤 했다. 1949년 1월말,박
정희가 풀려나온 것을 김창룡의 전화를 받고 알게 된 김점곤은 다음날
아침 일찍 찾아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침상을 받아놓고 밥숟
가락에 김을 막 얹으려던 박정희가 김점곤을 보더니 달려나와 와락 끌
어안았다. 그는 "김형, 고맙습니다"라면서 엉엉 울었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