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④ 포병학교장 ##.

1954년 6월27일 오전 박정희 준장이 여섯달간의 미국 유학에서 돌아
와 인천항에 내렸을 때 그 또한 대부분의 장교들처럼 '너무나 비참한 조
국의 현실에 분노와 절망감'을 느꼈을 것이다. 지금의 한미간 격차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천국과 지옥의 대비를 경험하고 온 장교들 의이런 충
격은 나라를 뜯어고쳐야겠다는 개혁에의 의지로 발전된다.


사진설명 :
포병학교장 박정희 준장, 교무처장 오정석 중령(맨 왼쪽)과 참모들.

1881년 조선
정부가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하여 선진문물을 살피고 오게 했을 때
그 선비들은 개혁의지를 품고 돌아왔으나 개혁의 수단을 갖지는 못했다.
그러나 1950년대 미국에서 군사학과 미국사회를 공부하고 돌아온 젊은
장교들은 한국사회의 최강집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군인들이 우리 사회
의 선두집단으로 등장한 것은 1170년 고려 무신란 이후 약 8백년만의 일
이었다. 미국에서 장교들이 품고 온 개혁의지가 총구와 결합하기만하면
'혁명의 권력'을 창출할 수 있는 조건이 성숙되어가고 있었다. 그 결합
의 매개자가 되는 박정희는 그러나 한번도 "내가 미국에 가서 보니까 이
러이러하던데…"라면서 미국식을 기준으로 한 부대운영을 지시하지 않았
다. 그의 문법은 항상 동양적 가치관과 방법론에 기초하고 있었고 미국
식은 교과서가 아니고 참고서였다.

6·25이전부터 시작된 미군에 의한 한국장교 도교육은 문화적 충격
을 경험한 장교들을 배출했다. 1년∼6개월간의 미국체험을 통해서 이들
은 호기심, 경외감, 열등감, 울분을 느껴가면서 미국식 군사교리, 과학
적 조직운영 원리, 그리고 한국인으로 태어난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위
관급 장교에서 3군총사령관을 지낸 정일권까지 한국군의 핵심 장교들이
이런 체험을 공유함으로써 한국군은 가장 먼저 국제화되고 현대화되고,
그리고 개혁의지를 지닌 집단으로 변모해갔다. 교수집단보다도, 고위관
료 집단보다도, 정치인보다도, 언론인보다도 당시의 한국군 장교단엔 외
국물을 마신 사람들이 많았다.

많은 도미교육 과정에서는 민족적 충돌이 자주 빚어졌다. 주로 미군
장교들이 민족적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언동을 하는 데 대한 한국군 장
교들의 반발이었다. 10·26사건 때의 국방장관 노재현 대령은 유학생 인
솔단장이 되어 포트 실 포병학교에 갔다가 이런 충돌과정에서 수학을 포
기하고 중도 귀국해버리기도 했다. 젊은 장교들 가운데는 미군 하급 장
교들에게 너무 친절한 한국군 장성들에 대하여 경멸감을 품게 되는 사람
들이 늘어났다. 그러나 도미 유학은 한국군 장교들에게 압도적인 미국의
힘과 미국식의 합리성, 그리고 미국인의 선량함을 알려줌으로써 친미화
의 효과를 거두었다. 흔히 반미적이라고 평가되는 박정희의 태도도 한국
인의 자주성에 대한 미국측의 부당한 간섭에 대한 반발이었지 카스트로
나 나세르형의 이념적 반미는 아니었다.

박정희는 귀국하자마자 2군단 포병단장으로 발령났다. 그를 데리고
간 것은 장도영 군단장이었다. 육본 정보국장으로 있을 때인 6·25 직후
민간인 박정희를 소령으로 복직시켜준 장도영은 9사단장-참모장관계에
이어 세번째로 박정희를 부하로 쓰게 된 것이다. 5·16까지 계속되는 두
사람의 관계에서 늘 베푸는 쪽에 있었던 것이 장도영이었다. 귀국 사흘
뒤 딸 근영이 태어났다. 박정희는 귀국할 때 선물을 하나 사왔는데 요사
이 가정에서 목욕탕에 치는 비닐 커튼이었다. 육영수는 이것을 창문 커
튼으로 치고 친척들에게 자랑했다.

어느 날 군단 휼병참모가 장도영의 숙소를 찾아왔다. '박정희 장군
은 청빈한 것이 지나쳐 가족들이 아직도 셋방살이를 하고 있다'고 보고
하는 것이었다. 장 군단장은 대민사업으로 돈을 벌고 있던 휼병참모에게
"박 장군에게 집을 하나 구해주면 어떨까"하고 말했다. 휼병참모도 그러
겠다고 했는데 박정희가 곧 광주에 있는 육군포병학교 교장으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성사되지 않았다.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느라고 문경보통학교 교사직을 그만두었던 박
정희는 1954년 10월18일에 드디어 교장선생님이 되었다. 포병학교는 교
육총본부소속이었다. 총본부 총장으로는 미국 육군대학에서 공부하고 막
귀국한 유재흥 중장이었다. 당시 육군은 16개소의 병과학교, 2개소의 신
병훈련소, 의무기지사령부 1개소, 그리고 교재창을 거느린 거대한 교육
기관이었다.

박정희는 포병학교장으로 부임하자 먼저 교장실 입구에 있던 두 그
루의 버드나무를 뽑아버리고 그 자리에 소나무를 심었다. 박정희는 시찰
나온 유재흥 총장이 "근사하게 보인다"고 말하자 이렇게 설명했다.

"버드나무의 축 늘어진 모습이 군인의 기상과는 맞지 않다고 생각하
여 뽑아버리고 쭉 뻗은 소나무를 갖다 심었습니다.".

그 뒤 유재흥 총장이 다시 찾아가보니 잎이 빨갛게 마른 소나무가
베어져 한쪽에 쌓여 있었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더니 박정희는 "토
질이 맞질 않는지 실패했습니다"라고 했다. 이때 유재흥 총장은 '맥아더
원수의 회고록에 (그의 아버지가 한 말인지 기억이 애매하나) "군인은
나무를 자를 줄은 알아도 성장과정은 모른다"고 한 말이 생각났다'고 자
신의 회고록에 적었다.

박정희는 집권한 뒤 '미국식 민주주의를 사회발전단계가 다른 한국
에 무조건 이식하려는 것은 착각이다. 토양이 다른 한국 땅에 미국 밀감
나무를 옮겨다 심으면 탱자가 열린다'는 비유를 동원하곤 했는데 이때
의 체험에서 우러난 이야기가 아닌지 모르겠다. 박정희는 문경보통학교
시절에 학생들을 자상하게 가르쳤듯이 참모장교들을 그렇게 교육하곤 했
다. 3군단 포병단에서 작전참모로 박정희 단장을 모셨던 오정석 중령은
포병학교에서 교무처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박정희가 한 훈시를 지
금도 외다시피한다. 두보의 시를 인용한 훈화에서 박정희는 이렇게 말했
다.

"'봄을 찾기 위해 산과 들을 헤매다 심신이 지친 사람이 주저 앉아
있다가 눈을 들어보니 바로 앞에 있는 매화가지에 봄이 와 있더라'는 두
보의 시처럼 진리나 애국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애국이란 '작전요
무령'이나 철학서적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자기 직분에 충실하는 것이
바로 애국입니다.".

박정희는 10월 유신 뒤에 "유신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자기 집 앞
을 자기가 쓰는 것이 유신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