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스펙트럼을 넓혀줄 또 하나 물건이 나왔다. '처녀들의
저녁식사'(10월3일 개봉)는 처음부터 끝까지 섹스를 이야기한다.하
지만 이 영화에서 여자는 성의 대상이거나 성을 자극하는 모티브가
아니다. '처녀들의 저녁식사'는 섹스를 철저하게 여자 시각에서 본
다. 그래서 성의 객체는 바로 남자들이다. 신인감독 임상수의 대본
과 연출는 당돌하기까지 하다.
애인과 지속적으로 관계하면서도 절정을 맛보지 못하는 호텔식
당 웨이트리스 연이(진희경), 가리지않고 남자를 탐하는 디자인회
사 사장 호정(강수연), 아기를 갖고 싶어하는 숫처녀 대학원생 순
이(김여진). 세 29살 여자들은 한지붕 아래 살며 수다와 상상과 실
험으로 성을 탐구한다.
이 영화에서 섹스는 야단스럽거나 내숭스러운 게 아니라 일상이
다. 섹스 신을 멋지게 찍어야 한다는 강박이나 그에 따른 과장이
없다는 게 가장 돋보이는 미덕이다. 그간 많은 한국영화들이 숱하
게 섹스를 다뤘지만 '처녀들의 저녁식사'처럼 천연덕스럽게 찍어낸
영화는 없었다. 환희에 찬 여인 모습을 클로스업하는 식으로 여러
컷으로 나눠 찍는 관행과 달리, 비교적 길게 핸드헬드(들고 찍기)
로 잡아 담백하기까지 하다.
파격적으로 이어지는 섹스신 만큼이나 깜짝 놀랄 노골적 대사들
이 모두 네차례, 처녀들의 저녁식사 자리에 넘친다. 하지만 거부감
보다는 웃음이 먼저 터져 나온다. 타이밍을 놓치지않는 대사들이
그만큼 재미나다.
영화사측은 '세 여자 이야기'라고 홍보 포인트를 내세웠지만 실
상 영화는 3각구도가 아니라 연이 역 진희경의 시각과 심리로 풀어
간다. 연이는 영화 전체 톤에 잘 어울리고 매우 그럴법해서 공감가
는 인물이다. 반면 강수연이 연기한 호정은 너무 비현실적이고 위
악적이다. 분방하다 못해 난잡한 호정과 결합하길 원하는 남자 파
트너도 전혀 있을 것 같지않은 캐릭터다.
이 영화가 90년대 말 한국 여자들 성의 초상이라기엔 무리가 있
다. 일반적 모습과 거리가 있는 게 사실이고, 거부감이 드는 관객
도 적지않겠다.
하지만 '처녀들의 저녁식사'로 한국영화는 그간 발 딛지 못했던
신천지를 발견한 것은 틀림없다. 그것은 '생활속 자연스런 섹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