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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제지배와 한국사회의 균열" 중에서
일제지배는 한국사회의 계급적·민족적 분열 이외에도, 민족해방투쟁
세력들의 활동을 고립시키고 분산시킴으로써 해방 후에 새로운 사회건설
의 통합적 지도부가 순조롭게 형성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즉 일제 말
기에 민족해방운동의 각 세력은 고립적으로 활동함으로써, 해방 후에 특
히 남한에서는 미국의 개입과 더불어 통합적인 지도부의 형성을 어렵게
만들었다.② 그러나 각 지방에서 활동하였던 중간 수준의 수많은 운동가
들이 해방 후에 각 지역에서 인민위원회를 비롯한 각종 대중조직을 통하
여 등장하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연구의 미진으로 이들의 구체
적 활동이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1920,30년대에 항일운동을 시작했던 수
많은 인물들이 해방 직후에 각 지방에서 다시 등장하였다고 말할수 있다.
일제지배하에서 잠재적으로 야기된 계급적·민족적 분열, 인구의 이
동, 강력한 관료기구의 유산, 민족해방투쟁 세력의 분산과 고립, 지방에
서의 수많은 운동가들의 활동 등 이 모든 요소들이 해방 후의 혁명과 반
혁명의 정치적 갈등에 영향을 미쳤다. 혁명에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측면에서 본다면, 일제 하의 모순의 심화로 인하여 노동자·농민을 중심
으로 한 민중들이 반제 반봉건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하여 광범위하게 동
원되었다는 점을 우선 들 수 있다.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상
태에서도 친일파·민족반역자의 처벌을 비롯한 식민 잔재의 척결을 요구
하는 애국적 역량과 토지개혁을 비롯한 봉건 잔재의 척결을 요구하는 계
급적 역량이 동원됨으로써 반제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인민민주 주
의 혁명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또한 해방 후 귀환동포의 대량유입은 혁
명적 상황을 창출하는데 일조하였고, 지방에서 숨은 운동가들의 재등장
은 전국적으로 대중을 조직할 수 있게 만들었다.
반면에 민족해방투쟁세력의 고립·분산적 활동은 해방 후 특히 남한
에서 혁명지도부의 통합성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예컨대 남한에
서 좌익세력과 중경 임시정부세력 사이의 대립,1946년 신전술 전후의 여
운형세력과 박헌영세력의 분열 등은 이를 보여준다. 한편 지주, 일부 한
인 자본가 등의 지배계급과 친일경찰을 비롯한 친일파·민족반역자들은
해방 후에 민중들의 혁명적 진출에 직면하여 반혁명세력이 되었고, 이들
은 미군정이라는 외세의 지원과 일제가 남겨 놓은 강력한 관료체제를 이
용하여 민중들의 도전을 물리적으로 진압하게 된다.
"(1)해방정국에서의 혁명과 반혁명의 구조와 성격"중에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제지배하에서 구조화된 한국사회의 성격
을 감안할때, 일제라는 국가권력이 붕괴된 해방의 시점에서 요구되는 혁
명의 내용은 반제 반봉건 민주주의혁명이라 할 수 있다. 첫째, 그것은
반제 반봉건의 내용을 지닌다. 우선 식민 잔재의 척결이 요구되었다. 식
민잔재의 척결에는 친일파·민족반역자의 처벌과 일제 및 친일 매판자본
가 기업의 국유화 등이 요구되었다. 즉 식민 잔재세력의 물적 기반을 박
탈하고 그들의 정치적 지위를 약화시키는 것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다음
으로 봉건 잔재의 척결이 요구되었다. 봉건 잔재의 척결에서 가장 중요
한 문제는 토지개혁이었다.
둘째, 그것은 일종의 인민민주주의혁명이었다. 민주주의혁명이 국가
의 강력한 파쇼적 성격에 대응하는 민중의 혁명이라면,당시의 혁명은 식
민성과 봉건성으로 야기된 일제 식민지 권력의 파쇼적 성격에 반대하여
노동자·농민 등 민중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인민정권을 수립하고자 하는
인민민주주의 혁명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당
시의 객관적 조건 속에서 혁명의 주체세력이 인민정권을 수립하고 이 국
가권력에 바탕하여 반제반봉건의 민주개혁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소의 분할점령은 이러한 혁명의 성공 여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소련군이 진주한 북한에서의 반제반봉건 민주주의혁명은
소련군의 후원에 힘입어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미군이 점령한 남한에서
는이 러한 혁명이 미군정의 반혁명 정책에 의해서 결국 좌절되었던 것이
다. 결국 북한에서의 혁명의 성공과 남한에서의 반혁명의 성공은 남북한
에 적대적인 두 정권이 수립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남한에서 형성되었던 혁명과 반혁명의 구조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
보자.
남한에서의 혁명과 반혁명의 구조는 아래로부터 제기되는 반제반봉건
의 혁명적 요구와 위로부터 부과되는 반혁명의 억압의 중첩 속에서 형성
되었다. 즉 사회경제적 수준에서 민중들은 반제반봉건의 혁명적 요구들
을 분출시켰고,반면에 국제적 수준에서 새로운 외세로 등장한 미국은 소
련에 대항하여 남한에서 자신의 제국주의적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친미 정권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아래로부터 제기되는 민중들의 요구와
위로부터 부과되는 미국의 반공·반소의 제국주의적 이해는 직접적으로
는 국내의 정치적 수준에서 미군정과 좌익세력 사이의 정치적 갈등으로
나타났다. 미군정은 반혁명을 위해서 국내의 지주 및 매판자본가들과 연
대하는 한편 일제의 관료체제를 복구하고 친일파·민족반역자·친미파등
을 등용하였다. 반면에 노동자·농민등의 민중들을 대변하는 좌익세력은
민중적 조직역량에 바탕하여 이에 대항하였다.
이와 같은 해방 정국의 구조 속에서 혁명세력과 반혁명세력의 성격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혁명세력은 노동자·농민의 기층민중들을 기반으로
하여 애국적인 모든 요소들과 연대하려 했으며,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등을 통하여 정치세력화되었다. 반혁명세력은 미군정을 중
심으로 지주계급·매판적 자본가·친일 친미파 등이 결집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한민당·이승만세력 등을 통하여 정치세력화되었다. 한편 혁명세
력과 반혁명세력 사이에서 이중적인 지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던 민족적
우익 세력을 하나의 세력 범주로서 상정할 수도 있다. 예컨대 김구의 중
경임시정부가 이러한 세력을 대표하는 바, 이들은 계급적으로 볼 때에는
우익세력에 속하면서도 민족적으로 볼 때에는 애국세력이 되는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 김구 세력의 반탁운동과 분단저지투쟁은 바로 이러한 이
중성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⑥그리하여 정치적 갈등은 반혁명세력으로서
미군정을 중심으로 한 매판적 극우세력, 혁명세력으로서 좌익세력, 그리
고 또 하나의 세력을 상정한다면 우익적 민족세력을 중심으로 전개되었
던 것이다.(19∼20쪽).
"(2) 미군정과 좌익세력 사이의 정치적 갈등의 전개"중에서
미국은 우선적으로 군정을 실시하는 한편 이를 뒤이을 친미·우익
성향의 분단정권을 세우고자 하였고, 좌익세력은 반제반봉건민주주의 혁
명에 상응하는 인민정권을 세우려 했다. 해방3년사는 국가권력의 수립
방식이라는 견지에서 볼 때 다음과 같이 세 국면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1945년 8월15일부터 모스크바3상 결정이 이루어진 1945년말까
지의 시기가 초기 국면에 해당한다. 이 국면에서는 미국과 소련 사이에
38선을 기준으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각각 담당한다는 것 이외에, 한국
에서의 국가권력의 새로운 창출에 대한 어떠한 명확한 합의도 부재한 상
태였다. 따라서 국내 상황은 임의적이고 유동적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
에서 점령군으로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이미수립된 조선인민공화국의 정
부 자격을 부인하는 한편 그들이 직접 통치하는 군정을 실시하였고, 군
정을실시하기 위해서 일제의 관료체제를 복구시키는 동시에 일제하의 친
일관료들과 친미적 인사들을 이에 끌어들였다. 한편 일제의 패망으로 곤
혹스럽게 되었던 지주·자본가 등의 지배계급과 친일파·민족반역자 등
의 반민족적 세력은 미군정의 실시로 새로운 구원자를 만나게 되었다.
반면에 남한의 좌익세력들은 즉각 당을 재건하고 인공을 수립하고 민
족통일전선을 추구하고 민중들을 조직화하기 시작하였다. 즉 좌익세력은
박헌영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고,미군의 진주를 고려하여 조
급히 인공을 수립하였으며, 친 일파·민족반역자를 제외한 민족통일전선
을 시도하는 한편 각 부문에서의 대중을 조직하고 각 지역마다 인민위원
회를 수립하였던 것이다. ⑦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좌익세력의 해게모
니 장악에 반대하고 미군의 진주에 영향을 받은 일부 우익적 또는 중립
적 세력들이 이에 참여하지 않거나 이탈해 나갔다. ⑧미군정과 좌익세력
사이의 대립은 국가권력을 둘러싸고 정면적 대치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양자 사이의 직접적인 충돌은 아직 전면적이지는 않았다. 미군
정은 인공과 인민위원회가 직접적인 통치행위를 수행하지 않는 한 전면
적탄압을 수행하지 않았고, 좌익세력은 가능한 한 미군정과 직접 충돌을
피하면서 그들의 지위를 기정 사실로 인정받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양자의 전면적인 충돌이 회피된 가장 큰 이유는 한국에서의
정부 수립에 대한 미·소의 명확한 태도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
다. 요컨대 상황의 성격이 분명하지 않았던 초기국면에서는 미군정이 관
료체제를 확보하고 좌익세력이 민중들을 조직화함으로써 민중역량과 관
료체제의 물리력 사이의 잠재적 충돌 가능성이 형성되었지만, 충돌이 전
면적으로 현재화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둘째, 모스크바 3상 결정으로부터 제2차 미소공위가 결렬된 1947년
중반에 이르기까지의 시기가 중기 국면에 해당된다. 이 국면에서는 현실
적으로 통일정부의 수립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칠수 있는 미국과 소련
사이에 모스크바 3상결정이 이루어짐으로써 표면적으로는 한국에서 새로
운 국가권력의 창출에 대한 기본적 방침이 분명해졌다. 그것은 미소공동
위원회의 합의를 거쳐 한국에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연합군
이 이 정부와 협의하여 5년간 신탁통치(또는 후견)를 실시하는 것이었
다. 그러나 문제는 미·소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이고, 국내의 각 정치세
력들이 이에 대한 태도가 어떠한 것이고, 나아가 궁극적으로 미소공위가
과연 성공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었다.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미소공위의 합의에 의한 통일정부의 수립을 표
명했으나 실제적으로는 시종 일관 친미적인 분단정권을 수립하고자 하는
이중적인 전략을 사용하였다.⑨ 또한 미군정은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된
이후 좌익세력에 대해 양면적인 정책을 사용하였다.⑩ 즉 한편으로는 좌
우 합작 공작을 통하여 좌익세력 중 온건세력을 회유하여 좌익세력을 분
열시키는 동시에, 과도입법의원을 설치하여 강경 좌익세력만을 배제한채
극우에서 온건 좌익에 이른 분단정권의 예비의회를 창출하고자 했다. 다
른 한편으로는 강경 좌익세력에 대한 직접적이고 대대적인 탄압을 가함
으로써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하였고, 민중들의 조직적 운동과 자연
발생적 항쟁에 대해서도 무력으로 진압함으로써 좌익세력의 민중역량을
파괴시키고자 하였다. 요컨대 미국은 미소공위의 외피 속에서 실제로는
분단정권을 추진하였고 미군정은 회유와 강제에 의한 분할지배를 통하여
좌익세력을 분열·약화시켰고, 민중조직역량에 대해 무력적 파괴를 시도
했던 것이다. 이같은 미국과 미군정의 태도와 후원에 힘입어, 반탁운동
을 통하여 결집된 우익세력 역시 제1차 미소공위 결렬 이후 좌익 세력에
대해 테러적 공격을 강화시켰다.
반면에 모스크바3상 결정을 총체적으로 지지하고 미소공위의 성공에
전적으로 매달렸던 좌익세력은 모든 노력을 이 목적에 집중하였다. 그리
하여 제1차 미소공위가 진행되는 동안 좌익세력은 이의 성공을 위해서
미군정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행위를 삼갔다. 그러나 제1차 미소공위가
아무런 성과 없이 결렬되고 미군정의 좌우합작 공작과 직접적인 탄압의
양면적 공세와 우익세력의 테러적 공격이 강화되자, 좌익세력은 새로운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7월 말에 채택된 신전술(정당방위의
역공세)은 그러한 요구에 부응하는 전술 변화로서, 이는 미소공위 속개
와 미군정의 탄압에 대한 정면 대응의 성격을 지닌다. 그렇지만 좌익세
력이 신전술에 의한 민중들의 시위와 항쟁을 효율적으로 지도하기에는
그들 지도부내의 분열이 너무 심화되어 있었다. 좌우합작노선을 지향하
는 온건세력과 신전술을 지향하는 강경세력 사이의 노선갈등과 한층 고
양된 투쟁을 위해 당의 강화를 모색하고자 하는 3당합당에 있어서 헤게
모니 장악을 위한 분파적 갈등은, 민중투쟁에 대한 좌익세력 지도부의
통일적이고 체계적인 지도를 방해하였다.
미국의 미소공위 추진 및 분단정책의 이중적 태도에 있어서 그들의
진정한 의도는 반혁명 분단정책이었고, 미군정의 회유 및 탄압의 양면정
책은 좌익세력의 분열과 약화를 의도하였다. 이에 비하여 좌익세력은 미
소공위의 성공을 과신하였고, 내부 분열 속에서 민중역량을 과도하게 노
출시켰다. 제2차 미소공위가 결렬되었을 때, 좌익세력은 탄압과 분열로
인하여 약화되어있었고 민중의 조직역량은 대량으로 파괴된 상태였다.미
국과 미군정의 교활성과 폭력성은 유감 없이 그 성과를 거두었고, 좌익
세력의 낙관성과 분열성 및 무모성은 자신들과 민중역량을 파괴시켰던것
이다.
셋째, 제2차 미소공위가 결렬된 이후부터 1948년 8월 15일 남한에 단
정이 수립될 때까지의 시기가 후기 국면에 해당한다. 이 국면에서는 이
제까지 이중적이고 은폐되었던 미국의 본래적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났
다. 미국은 이제까지 내면적으로 추진해온 분단정권 수립을 공개적으로
추진하였으며, 이를위한 명분을 획득하기 위해 유엔의 이름을 빌었다.한
편 소련은 미소공위가 결렬됨에 따라 양군 철수와 자주적인 정부수립 대
안을 제시하였다. 이제 정부 수립의 문제는 형식상 유엔의 권위나 또는
한국인 자신의 자주적인 태도에 맡겨졌지만, 실제 상황은 남북 각각에
분단정권이 수립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와 같이 분단정권 수립이 분명해지자, 남한의 정치세력들은 분단지
지세력과 분단 반대세력으로 재편되게 된다. 이승만세력과 한민당만이
분단정권을 지지하였고, 좌익세력을 비롯하여 김구세력 및 대부분의 중
간적 정치세력들은 분단정권 수립에 반대하였다. 분단 반대세력은 두 방
향으로 분단저지투쟁을 전개하였다. 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좌익세력은
단선단정을 파탄시키기 위한 비합법적 직접투쟁을 전개하여 2·7구국투
쟁, 4·3제주민중봉기, 5·8총파업 등을 일으켰다. 한편 북로당을 중심
으로한 좌익세력은 김구 및 김규식세력까지 포함하는 단정반대세력의 범
연대적 시위와 통일정부 수립의 논의를 위해 남북조선정당·사회단체대
표자 연석회의와 남북조선정당·사회단체지도자 협의회를 평양에서 개최
하였다. 그러나 결국 남한에서 5·10단선이 이루어지고 8월15일에 이승
만 세력과 한민당세력만이 참여하는 단정이 수립되었다. 북한은 이에 뒤
이어 9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남한정권은 유
엔의 권위를 빌어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였고 북한정권은 남북한의 총
선거에 바탕하여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였지만, 실제 한반도에는 성격
이 상반된 두 개의 정권이 수립되어 적대하게되었던 것이다. 남한에서의
국가권력 장악에 있어서는 미군정의 후원을 받은 극우세력이 반혁명의
분단정권 창출에 성공하였고, 반제반봉건민주주의 혁명을 위해 인민정권
을 세우고자 했던 혁명세력으로서의 좌익세력은 일단 국가권력 장악에
실패하게 되었다. 따라서 분단정권 수립 이후에는 이승만정권에 저항하
는 남한에서의 무장투쟁과 통일을 위한 남북 사이의 정권적차원의 대결
이 전개되게 된다.
"(3) 민중투쟁의 전개"중에서.
해방 직후 민중들의 혁명적 열기는 유례 없는 것이었다. 그것의 한
이유가 일제지배하에서 형성된 사회적 균열이었음은 앞에서 살펴본 바있
다. 해방 후 민중들의 혁명적 진출의 원인은 이와 같은 일제하 계급적·
민족적 착취의 심화 이외에도 좌익세력에 의한 민중역량의 전국적 조직
화, 미군정의 폭력적 탄압에 대한 저항, 미군정기의 생활상의 곤란 등의
요인들을 더 들 수 있다. 우선 좌익세력은 해방과 더불어 민중조직화에
착수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노동자·농민·청년·부녀등의 각 부문별
로 전국적 조직을 수립하는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각 지역별로 인
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이들을 결집시키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관료체제를
복구한 미군정은 좌익세력과 연결된 각 지역의 민중에 대하여 점차적인
탄압을 강화하였는바, 이에 대하여 민중들이 저항하였다. 마지막으로 미
군정기 동안 민중들의 생활상의 어려움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수백만의
귀환동포의 유입, 실업, 통제되지 않은 시장메카니즘과 인플레, 식량난
과 미군정의 식량 강제매입 등 여러요인들이 민중들의 생활을 어렵게 만
들었다. 특히 모리배의 매점매석과 미군정의 임기응변적인 식량정책은
민중들의 식량난을 극도로 악화시켰다. 이상의 제반 요인,즉 일제지배가
남긴 구조적 영향, 민중역량의 조직화, 미군정의 혹독한 탄압에 대한 저
항, 민중들의 생활난 등은 일정한 계기가 주어질 때에는 한꺼번에 분출
할수 있는 민중들의 내재적 폭발성을 증대시켰던 것이다. 좌익세력에 있
어 이러한 민중들의 내재적 폭발성은 지도와 통제가 효율적으로 이루어
지는한 혁명적 역량으로 표출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지도부의 조직적 지도와 통제였다.
민중투쟁은 각 부문의 조직적 투쟁과 지역단위의 항쟁적 투쟁으로 나
누어볼 수 있다. 우선 각 부문의 조직적 투쟁으로서는 대표적으로 노동
운동과 농민운동을 들 수 있다.
당시의 노동운동은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해를 도모하는 경제투쟁적
성격 이외에도 인민정권 수립과 관계되는 정치투쟁의 성격을 동시에 지
녔다. 따라서 노동운동은 좌익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으며,미
군정 역시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정치적 고려에 의하여 노동운동에 대처
하였다. 즉 당시의 노동운동은 정치적 상황의 전개와 밀접한 관계 속에
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⑪ 노동운동의 첫 단계는 일제 소유 귀속공장에
대한 노동자의 공장관리와 미군정의 접수 시도 사이의 갈등에서 시작되
었다. 1945년 11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의 결성은 노동자들의
전국적 조직과 공장관리노선의 전면화를 보여준다. 그러나 미군정과의
충돌을 회피하기 위해 전평은 산업건설협력방침을 뒤이어 천명한다. 결
국 노동운동의 첫 단계에서 전평의 공장관리노선은 일정하게 양보하지
않을수 없었고 미군정의 접수 정책은 대체로 관철되었다고 할 수 있다.
노동운동의 두번째 단계에서는 미소공위의 개최에 상응하여 산업건설
노선이라는 온건한 노선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좌익세력이 신전술을 채
택하자 이제까지의 온건한 노선이 비판되고 총파업 전술이 채택됨으로써
세번째 단계에서는 총파업이 실시되게 된다. 1946년 9월 총파업은 좌익
내부 분열의 영향, 총파업 시기의 조급한 결정 등으로 충분한 준비 없이
시작되었다. 노동운동을 좌익세력의 정치투쟁으로 판단한 미군정은 이러
한 총파업에 전면적인 물리적 탄압으로 대응하였고 그결과 노동운동의
조직적 역량은 대량 파괴되었다. 이후 3·22총파업, 2·7총파업, 5·8총
파업 등 세 번의 총파업이 시행되었지만, 이미 약화된 노동운동의 효과
는 그리 크지 않았다. 대신 전평의 조직이 파괴됨에 따라 우익 노동운동
조직인 대한노총이 들어서게 되었다.
한편 당시의 농민운동 역시 조공과의 관계 속에서 전국농민조합총연
맹(전농)에 의해서 조직화되었다. 전농은 소작료 3·7제 투쟁,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에 따른 토지개혁 등을 주장하였지만, 농민투쟁의 대부분
은 각 지역의 인민위원회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농민투쟁이 가장 격렬히
전개되었던 때는 10월인민항쟁 때였으나, 이 항쟁을 농민운동 자체로만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농민운동은 전농의 활동과 더불어 각 지역에서의
지방정치를 중심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농민투쟁과 관련하여 우리
가 주목해야 할 문제로서 토지개혁 요구 이외에 식량문제가 있다. 당시
의 식량난에 대하여 농민들로부터 추곡과 하곡의 강제적인 공출로 대처
하려했던 미군정의 임기응변적 대응은 농민들의 불만을 심각하게 증폭시
켰다.
앞에서 살펴본 민중투쟁이 보다 조직적인 투쟁이라 한다면, 다음에서
살펴볼 10월인민항쟁과 제주4·3민중무장봉기는 보다 일규적이고 폭발적
인 지역적 민중항쟁이라 할 수 있다. 지역적 민중항쟁은 해방정국 초기
에 전국에 뿌리박은 인민위원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인공의 지역적
민중권력기관으로서 조직된 인민위원회는 비록 인민행정과 치안의 기능
을 행사하는 권한을 미군정에 의해서 초기에 부인당했지만, 여전히 각
지역의 강력한 민중조직으로서 남아 있었다.
1946년 10월 1일 대구항쟁으로부터 시작되어 12월 중순 전주항쟁으로
종결되었던 10월인민항쟁은 약 두 달 반 동안 전국에 걸쳐 전개된 민중
들의 들불과 같은 항쟁이었다. 10월 인민항쟁은 친일파·민족반역자 처
벌, 좌익인사 석방, 인민위원회 복구, 식량문제, 토지문제 등 복합적인
제반 원인들에 의해 야기되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10월인민항쟁은 반제
반봉건의 제반 요구들이 해결되지 않고 나아가 식량난을 비롯한 생활난
이 가중되는 상황 속에서 대구에서의 9월 총파업을 계기로 폭발·전개된
민중의 항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10월인민항쟁의 전개에 있어서 좌
익 중앙지도부의 지도와 통제는 거의 효율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0
월인민항쟁 역시 9월 총파업과 마찬가지로 미군정에 의해서 무력적으로
진압됨으로써 좌익세력의 지역적 민중조직역량이 대량으로 파괴되는 것
으로 귀결되었다.
1948년 4월 3일에 시작되어 약 1년에 걸쳐 제주도에서 전개되었던
4·3민중무장봉기는 반혁명이 분단으로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 제주도민
에 대한 육지의 경찰 및 서북청년단의 무자비한 탄압에 대항하여 민중들
이 무장봉기를 일으켰던 사건이다. 이 봉기 역시 중앙의 지시 없이 야기
되고 사후 추인된 듯하다. 이 봉기는 국군과 경찰의 진압으로 약 1년만
에 거의 종식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약 3만∼8만의 양민이 진압군에 의해
살해되는 참극을 낳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해방 정국에서의 민중투쟁은 우선 대단히 격렬했다
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민중들의 가열찬 투쟁과 미군정의 폭력적 진압이
반복되면서 수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민중들의 고조된 열기에 상응할 만큼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지도와
통제가 존재했었는가 하는 점이다. 9월총파업과 10월인민항쟁에서의 민
중들의 드높은 투쟁은 그 성과보다 조직역량의 대량 파괴란 결과가 더
컸다. 물론 이에는 미군정의 폭력적 진압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는 것이
지만, 민중투쟁을 효율적으로 지도하고 통제하지 못한 좌익세력 내부에
도 또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제주4·3민중무장봉기에서도 그 지역적 투
쟁성이 높았다 할지라도 중앙과의 연계, 시기선택, 투쟁 방식 등에 대해
서는 여러 측면에서 숙고되어야 할 것이다.
여하튼 당시의 민중들은 미군정의 반혁명과 조국의 분단에 대항하여,
비록 수많은 피해를 당했지만 그만큼 치열하게 저항함으로써 민중역량의
진정한 실체를 보여주었다.
"3) 남한에서의 분단정권의 수립과 무장투쟁"중에서.
1948년 8월 15일에 남한에 분단정권이 수립되고 뒤이어 9월 9일에 북
한에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됨으로써, 현실적으로 한반도에
는 적대적인 두 개의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따라서 남한 내부에서의
투쟁은 이미 수립된 국가권력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무장투쟁으로 나아갔
고, 동시에 38선상에서는 남북한 두 정권 사이의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
하였다. 남한의 국가권력과 유격대 세력, 남한의 국가권력과 북한의 국
가권력 사이의 대립은 이제 무력적인 형태를 띠지 않을 수 없게 되었
다. 다음에서는 1948년 단정 수립에서 1950년 한국전쟁에 이르는 기간동
안 남한 내부에서 전개되었던 무장투쟁을 살펴보자.
1948년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기간 동안 전개되었던 무장투쟁은 다
음과 같이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⑫ 1948년 10월 여순봉기 이후에서
1949년 5월까지의 기간이 첫번째 시기이다. 물론 남한에서 무장투쟁의
출발이라 할 수 있는 제주 4·3민중무장봉기를 여기에 포함시킬 수도 있
을것이다. 이 시기의 특징은 각 지역에서 자연스럽게 유격전구가 형성되
었다는 점이다.
남한 전역에 5개의 유격전구가 형성되었는바, 호남 유격전구는 전남
과 일부 전북지역의 야산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지리산 유격전구는 지
리산 부근에서 입산한 사람들과 여순봉기에 참여했던 천여 명의 반란군
이 주축을 이루었고, 태백산 유격전구는 동해안 지역의 좌익세력들이 입
산하여 형성되었고, 영남 유격전구는 경남북 지역의 좌익세력과 대구 6
연대 반란군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제주도 유격전구는 제구4·3민
중무장봉기의 결과 형성된 유격전구였다. 무장투쟁에 참여한 유격대들은
10월인민항쟁 이후 각지역에서 경찰의 탄압을 피해 입산한 '산사람', 단
선단정 반대투쟁을 수행하면서 조직된 '야산대', 그리고 여순봉기 후 지
리산으로 도피한 '반란군' 등이 주축이었다. 유격대의 규모는 분명하게
파악되기 어렵지만, 제주도를 제외한다면 1949년 초에 약 3,500∼6,000
명 정도로 추정된다.⑬ 본격적인 무장투쟁의 시발이 되고 무장유격대세
력의 일부 주력을 형성시킨 여순봉기에 대해서는 좀더 살펴보자. 여수
제14연대에 침투해있던 좌익세력들은 제주도 출동명령에 반대하여 봉기
하고 여기에 여수·순천 지역의 좌익세력이 호응하여 발생한 여순봉기는
이승만 정권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지만, 이승만정권은 오히려 이를 계기
로 남한을 경찰국가로 만들었다. 즉국가보안법을 제정하였고 숙군작업을
통하여 극우 반공 일색의 군을 만들었다.⑭ 여순봉기는 좌익 중앙지도부
의 지시와 계획 없이 폭발되어 군 내부에서 좌익세력이 근절되고 남한의
군사적 반공체제가 구축되는 빌미가 되었지만, 무장투쟁에 있어서는 하
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여순봉기에서 살아남은 천여 명의 군인들이 지리
에 입산함으로써 강력한 무장유격대세력에 의한 무장투쟁이 본격화되었
던 것이다.
무장투쟁의 두번째 시기는 1949년 6월 이후에서 10월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 무장유격대들은 적극적인 공세를 시도하였다.첫
번째 시기의 무장투쟁이 자연발생적이고 산발적인 투쟁이라 한다면, 이
두번째 시기의 무장투쟁은 보다조직적으로 공세를 시도했던 시기이다.이
시기의 무장투쟁은 남북한 좌익 내부의 일련의 조직 개편 및 통일방침의
확정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즉 1949년 6월에 남북로당이 합당하여 조선
노동당이 결성되고 남북민전이 통합하여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이 결성되
었는바, 이것은 이제 남북의 좌익세력에 대한 통일적인 지도와 통일방침
의 확정을 의미하는 듯하다. 남한내의 유격대도 오대산의 1병단, 지리산
의 2병단, 태백산의 3병단 등 3개 병단으로 조직을 재편성하고, 6월부터
공세를 강화시켜 9월 공세·아성공격 등을 감행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강동정치학원 출신 유격대들이 수백 명 단위로 남파되었다. 그렇지만 이
시기의 이러한 대대적인 공세의 배경과 목적이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미군의 철수, 조선노동당의 결성, 조국전선의 결성, 38선에서의 무장
충돌의 격화 등의 제반 요소들과 관련하여 대대적인 공세가 취해진 것은
상정할 수 있으나, 무장유격대의 공세만으로 이승만정권을 전복하는 것
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미군이 철수했지만 미 군사고문단은
남아 무장유격대 진압을 지도하고 있었다. ⑮무장투쟁의 세번째 시기는
1949년 11월 이후에서 한국전쟁 직전까지의 기간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
유격대 세력은 군과 경찰의 동계토벌에 의해 거의 궤멸되다시피 하였다.
계절적으로 유격대가 활동하기 어려운 겨울에 강력하게 시행된 토벌은
유격대원들에게는 고난의 시기였다. 1948, 49년 겨울에 제주도의 유격대
가 궤멸되었듯이 1949,50년 겨울에 남한내 거의 대부분의 유격대원들이
죽었다.
이렇게 하여 한국전쟁 이전에 남한의 혁명세력은 사실상 거의 파괴당
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1945년에 진주한 미군은 남한 민중의 혁명적 열
기를 진압하여 분단정권을 수립하였고, 이어 이에 도전하는 무장유격대
를 거의 궤멸시키는 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무장투쟁에 대한 진압에 있
어 미국의 지원과 이승만 정권의 강력한 물리력 사용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1945년에서 1948년 사이의 민중투쟁과 마찬가지로,
무장투쟁에서도-예컨대 여순봉기에서처럼-좌익지도부의 지도와 통제는
불완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투쟁에 대한 지도부의 지도와 계획의
부재, 아니면 지도부의 모험주의적 시도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심
각한 문제가 된다. 여하튼간에 남한에서 약 5년에 걸쳐 혁명과 분단저
지를 위한 격렬한 투쟁이 전개되고 약 10만명의 인명이 희생되었지만,남
한내의 혁명역량은 거의 파괴되는 상황으로 귀결되었다.
"4)북한에서의 혁명과 민주기지 노선"중에서.
남한에서는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 성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반혁
명으로 귀결되었음에 반하여,북한에서의 혁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아
래로부터 올라오는 민중들의 혁명열기가 소련군의 후원이라는 유리한 조
건속에서 혁명의 성공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북한을 바라
볼때 북한 자체의 혁명의 진전이란 측면 이외에도 통일문제와 관련된 북
한의 정책이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통일문제에 있
어 민주기지노선으로 지칭되는 북한의 통일전략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
은 한국전쟁까지 전개되는 북한의 통일에 대한 입장을 이해하는데 관건
이 된다. 물론 소련이 북한에 대해서 가지고있는 이해와 영향 등을 동시
에 살펴보아야 될 것이다. 그렇지만 소련 영향력의 실제적 규정성의 정
도는 또한 엄밀하게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 북한의 혁명과정을 살펴보자. 북한은 소련의 후원이라는 유리한
조건 속에서 반제반봉건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혁명적 열기를 수렴하여
식민 잔재와 봉건 잔재를 척결하는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을 수행하게
된다. 즉 혁명을 수행할 당과 정권이라는 정치권력이 수립되었고, 이에
바탕하여 제반 민주개혁이 실시되었다. 1945년 10월 10일에서 13일 걸쳐
개최된 북조선 서북5도 대표자 및 열성자 대회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
국이 수립되었고(이는 나중에 북조선공산당으로 되고, 1946년 8월에는
신민당과 합당하여 대중적 성격의 북조선노동당이 된다), 1946년 2월에
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되었다. 북한은 이러한 정치권력에 바탕
하여 이후부터 1947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정식으로 수립될 때까지
토지개혁을 비롯한 제반 민주개혁을 단행함으로써, 반제반봉건민주주의
혁명을 수행하고 나아가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정치적·경
제적기초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1947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출범을
시작으로 하여 전개된 사회주의혁명에 있어서 북한은 한국전쟁에 이르기
까지에는 사회주의혁명의 핵심내용인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전면적으로
실시하기보다는 자립적 경제의 기초를 구축하고 경제를 복구하는 일에
더많은 노력을 투여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전쟁직전에 이르기까지 북한은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의 성과에 바탕하여 상당 정도의 혁명역량을 축
적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보다 눈여겨보아야 되는 민주기지 노
선을 살펴보자. 민주기지의 실제적 내용은, 이에 대한 분석이 제대로 된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상황 변화와 민주기지의 실제적 내용 변화를 감
안할 때 다음과 같이 네 계기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첫번째 계기는 북한에서의 당 건설이다. 소련군과 김일성은 해방 직
후에 남북이 처한 서로 다른 환경을 감안하여 서울이 아닌 평양에 당 중
앙이 수립되어야 할 것을 주장한 듯하다. 따라서 10월 중순에 북한에서
수립된 조공 북조선분국은 이러한 소련군 및 김일성의 주장과 이미 서울
에서 수립된 조선공산당 사이의 관계 속에서 나온 산물이라 보여진다.이
후의 과정은 소련군과 김일성의 주장이 점차 관철되어갔음을 반영해준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민주기지론은 분명하게 표현된 것은 아니지만 당중
앙의 설치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두번째 계기는 미소공동위원회 개최와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다.
미소공위를 둘러싸고 민주진영과 반민주진영(또는 찬탁진영과 반탁진영)
으로 분열되고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을 둘러싸고 혁명세력과 반혁명세
력으로 분열됨으로써, 특히 남한에서 두 세력의 적대적 대립이 심화되어
갔을 때, 북한은 한반도내에서의 민주진영과 혁명세력의 기지가 될 수
있도록 제반 민주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러한 맥락에서 볼 때 북한에서의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은 민주기지를 강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
다고 할 수 있다. 미소공위의 성공 여부가 유동적이었지만 통일적인 민
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있어서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을 통하
여 북한을 민주기지로 만드는 것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세번째 계기는 남한에서의 단정 수립이다. 미국이 유엔의 이름으로
남한에서 단정을 수립하고자 하고 소련이 양군 철수와 자주적 정부 수립
을 주장함으로써 분단저지와 통일의 문제가 북한 자신의 직접적인 문제
로 되었을때 민주기지론은 미국의 분단 정책에 대항하는 강력한 민주세
력의 기지를 의미하였다. 이때에는 미제에 대한 대항을 분명히 하고 있
다. 아마도 이때의 민주기지론은 북한을 민주기지로 하면서 분단에 반대
하는 모든 애국세력의 통일전선적 연대를 모색한 듯하다. 그러나 아직은
군사적 해결을 전제로 하지는 않는 듯하다.
네번째 계기는 북한 대 미국과 남한 정부 사이의 군사적 대립의 격화
이다. 1949년 여름 이후 상황은 국제적으로는 중국의 공산화로 인하여
동북아에서 미국의 지위가 위협받고 있었으며, 국내적으로는 남한 내부
에서 무장투쟁이 격화되고 38선상에서 남북의 군사적 충돌이 격화되고
있었다. 북한은 이러한 상황에 대비하여 남북로당과 남북민전을 합침으
로써 한반도내의 혁명세력에 대한 통일적 지도를 꾀하였고, 남한정부의
군사적 도발에 대한 군사적 대응을 고려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이때의
북한의 민주기지론은 군사적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북한은 1949년 후반 이후 군사력을 상당히 증대시켰다.
주.
②소련군이 진주한 북한에서는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의 각 세력이 좌
익세력 중심으로 통합되어 갔으나, 그 과정에서 민족주의세력과 일부 국
내파 좌익세력이 배제되었다. 반면에 미군정이 실시되었던 남한에서는
우선 초기에 상해 임정세력과 좌익세력 사이의 민족통일전선이 이루어지
지않았고, 다음으로는 좌익세력 내부의 분열상이 노정되었다.
⑥여기에서 우리는 민족적 우익세력으로서의 김구세력의 자기모순성
을 확인할 수 있다. 즉 계급적으로는 우익세력이면서 민족적으로는 애국
세력인 김구세력은 혁명에 대해서는 반대를, 분단저지에 대해서는 찬성
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⑦조선공산당의 재건이나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에서 박헌영과 여운
형이 소련군과 협의를 거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수립과 북한측의 인공 부인에서 드러난다.
⑧건준에서 좌익세력이 강화되면서 안재홍 중심의 신간회세력이 이탈
했고, 이승만과 임정계열과 일부 한민당계 인사들이 인공에 참여하지 않
았다.
⑨커밍스는 이러한 미국의 이중적 전략을 미국의 대외정책 결정에 있
어 국제주의자와 국가주의자 사이의 대립으로 설명하여, 현지사령부인
미군정은 후자의 입장에서 시종일관 분단정책을 추구했다고 보고있다.그
리고 분단정권 수립추구의 구체적 방안을 랭던이 1945년11월20일 국무성
에 보낸 서신의 정무위원회안에서 확인하고 있다(브루스 커밍스, 앞의
책,제6,7장). 정무위원회안에 대해서는 같은 책,244쪽을 참고할 것.
⑩미소공위의 순조로운 전개는 모스크바3상 결정에 의한 통일정부의
수립가능성을 높이는 것이었지만, 그 결렬은 분단정권의 수립가능성을
높이는 것이었다. 따라서 미소공위의 속개와 결렬은 당시의 정치상황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⑪당시 정치적 상황의 전개와 연관시켜 전평의 노동운동을 살펴본 논
문으로서는 정해구, '미군정과 좌파의 노동운동',"경제와 사회"제2호(까
치, 1988 봄)가 있다.
⑫장규진, '1948∼50기간의 남한내전',"성균"제40집(성균관대학교 교
지편집위원회,1988),233∼37쪽.
⑬브루스 커밍스·존 할리데이, "한국전쟁의 전개과정"(태암, 1989),
45쪽.
⑭여순무장봉기를 계기로 이승만정권이 취한 조치들로서는 숙군작업,
국가보안법제정, 학도호국단 설치,청년단체들의 대한청년단으로의 합병,
육군병력의 강화 등을 들 수 있다.
⑮이 두번째 시기에 나타난 두 특징, 즉 무장유격대의 공세와 조국
전선이 발표한 선언서의 통일방안 내용 사이에는 일정한 논리적 부조화
가 존재한다. 선언서에 나타난 통일방안의 주요내용은 남북정당·사회
단체대표들이 협의체를 소집하고 선거지도위원회를 구성하여 9월에 총
선을실시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남식의 연구에 따르면, 조국전선의
평화통일선언서를 접한 노동당 서울지도부는 지방 당에 결정적 시기가
곧 도래하고 인민군이 진격하게 되므로 각 지방당은 정권 접수를 위한
준비를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김남식,"남로당 연구",돌베개,1984,
413쪽).여기에서 총선대비와 정권접수까지 고려하는 유격투쟁의 공세
사이에서 논리적 부조화가 나타나고 있다. 이에 관련하여 북한의 한 자
료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박헌영 도당은 1949년 여름에 '조국이
불원간 통일된다'는 거짓풍설을 퍼뜨리면서 당원들과 유격대들을 원쑤
들의 총부리 앞에 내몰았다"(당 력사연구소,"조선로동당 력사교재", 조
선로 동당출판사, 1964,240쪽).
박헌영·남로당 노선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에서 두 개의 경향성이
존재한다. 그 하나는 좌경적·모험주의적 지도에 대한 비판 견해이며
다른 하나는 이들의 주체적인 측면보다는 당시 남한 사회가 처하고 있
었던 객관적 상황 특히 미·소의 규정성을 중시하는 견해이다. 그러나
실제로 밝혀야 할것은 구체적 사실에 근거한 객관적 상황의 규정성과
주체적 대응의 상호관계 속에서 양자의 비중 정도를 명확히 하는 것일
것이다. 박헌영·남로당노선에 대한 평가의 두 경향성을 대표적으로 보
여주는 논문으로는 이미숙, '박헌영·남로당에 대한 비판을 비판한다'
("역사비평"제5호, 역사문제연구소,1989 여름)와 정병준,'박헌영·남로
당노선 무엇이 문제인가'(같은 책)가 있다.
민주기지(혁명기지)란 "혁명하는 나라의 한 지역에서 승리한 혁명을
공고히 하여 혁명의 전국적 승리를 담보하는 책원지"를 말한다(김남식,
'북한문제 입문',"연세"24,1986,73∼75쪽).
한국전쟁 이전까지의 민주기지 내용의 변화를 살펴본 논문으로는 소
차목정부,'민족해방전쟁으로서의 한국전쟁',"한국전쟁"(청계연구소,1986),
제4장 '공산주의자-민주기지론'이 있다. 민주기지 노선의 실제적 내용
변화에 대한 깊은 연구는 현재로서는 자료의 한계상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따라서 다음에서 제시되는 내용은 여전히 가설적인 성
격을 지니며 보다 심화된 연구를 요한다. 여기에서 서술한 민주기지론
의 내용변화에 대해서는 당 력사연구소,"조선로동당 약사"I(돌베개,1989)
과, 과학원 역사연구소,"조선통사" 하(오월,1989), 그리고 당 력사연구
소, "조선로동당력사교재"등의 해당부분을 참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