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산 플라망스, 모기업 부도-퇴출 위기 딛고 '눈물의 투혼' ##.

♧ 지난 12월17일 오후 광주 나산 플라망스 농구단의 체육관. 최근 3
연패의 부진에 빠진 탓인지, 황유하 감독은 다른 날과 달리 훈련 강도를
높였다.

5명씩 2팀으로 나눠 연습 경기를 갖고 패배한 팀에는 코트를 5차례
왕복 달리기하는 페널티까지 주었다. 전날 회식 때 "농구 이외에 다른
생각은 하지도 말라"던 황감독의 말이 최면처럼 작용한 듯, 선수들의 분
위기도 진지했다.

모기업 부도와 농구판에서의 퇴출 위기에 몰려 탈출구는 땀을 흘리는
길밖에 없다는 듯이 선수들은 이를 악물었다. 외국 용병들도 마찬가지였
다. 아시안게임으로 모처럼 생긴 사흘 휴가 동안, 애인과의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이날 오후 합류한 외국인 선수 로즈그린도 선수단의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나산 농구단에게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춥다. 사람들은 그들을 '헝그리
구단'이라고 부른다. 나산은 서울에 원정할 때 버스에 쌀 고기 등 음식
을 싣고 올라온다. 모두 외상으로 구입한 물건들이다. 올해 초 모기업이
부도나면서 월급도 제대로 못받다가 한국농구연맹(KBL)의 지원으로 겨우
꾸려가고 있으니 극한의 내핍을 감내하지 않을 수 없다.

프로의 자존심도 이미 버린지 오래다. 서울 숙소가 호텔에서 아파트
로 바뀌었고, 구로중학교 체육관을 빌어 눈치보며 연습하는 것 등등이
다. 프로로서의 자존심을 구기는 일이다. 간혹 자신들을 손가락질하며
"저런 팀에게도 지느냐"는 말을 듣기라도 할 때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

이런 정신적 고통에 비하면 난방시설이 없는 체육관에서 언 몸으로
운동하는 것이나, 부식비가 줄어 마음껏 못먹는 것 등은 큰 문제가 아니
다. 7월부터 9월까지 3개월간 월급을 못받은 것도, 이번 시즌을 뛸 수
있게 됐을 때의 안도감으로 보상이 됐다. 나산 농구단은 이번 시즌 퇴출
위기에 있었으나, 한국농구연맹이 10억원을 지원하면서 한 시즌의 시한
부생명을 얻었다.

나산은 이번 시즌이 시작되기 전, 간판 슈터 김상식을 SBS로 현금 트
레이드했다. 돈을 받고 동료가 팔려갔다는 사실에 선수들은 착잡했다.기
업은행시절부터 같이 지내던 이민형 김현국 박세웅 등은 더욱 마음이 아
팠다. 하지만 "프로는 그런 것"이라며 애써 마음을 달래야 했다.

이런 그들에게 올시즌 출발은 참담했다. 프로농구 개막 후 4연패. 시
즌 개막에 앞서 남들은 해외로 전지 훈련을 다녀올 때,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올 비용이 없어 연습 경기도 제대로 못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게
다가 구단이나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경기에
전념하기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4연패 후 선수들 사이에 위기의식이 다시 머리를 치들었다."이
렇게 나가다간 앞으로 7연패, 8연패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럴려고
농구를 한 것은 아닌데…." 4연패를 한 다음날, 선수들은 숙소에서 '만
남의 시간'을 가졌다.

주장 김현국은 용기를 내서 말을 꺼냈다. "우리가 4연패를 당했지만
마음먹기에 따라 연승을 할 수도 있다. 우리도 잘할 수 있다." 플레잉
코치 이민형도 거들었다. "우리는 베스트와 후보가 따로 없다. 왜 외국
인선수들에게 미루고 자신없는 플레이를 하느냐.".

그러자 여기저기서 호응이 왔다. "너무 잘하려고 해서 실수가 많다.편
하게 경기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신인 김병천은 "팀에 적응하기가
너무 힘들다. 선배들이 분위기를 잘 이끌어 달라"고 주문했다.

선수들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김태일 코치를 통역 삼아 외국인 선
수 로즈그린에게도 평소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너무 1 대 1 공격만 고
집하지 말라"는 주문이었다. 로즈그린은 "한국 선수들은 연습 때 그렇게
잘하면서 정작 슛타임 때 왜 슛을 안던지느냐"고 반문했다. 외국인 선수
중 부진했던 잭슨도 "앞으로 잘할 것"이라고 각오를 보였다.

2시간쯤 마음 속에 있던 말을 털어놓자 선수들 간에 맺혔던 응어리도
풀렸고 마음도 후련해졌다. 그들은 "앞으로 매일 30분 이상씩 회의를 갖
자"고 합의했고 그 약속은 아직껏 지켜지고 있다. 나산은 '만남의 시간'
을 가진후 처음 가진 지난달 24일 SK와의 대전에서 첫승을 거뒀다.

11월 26일 삼성전에서는 패배했다. 하지만 이 경기는 자신감을 완전
히 되찾는 계기가 됐다. 3쿼터에서 18점이라는 큰 차로 지고 있었지만,
경기 종료 30초 전 84대84까지 추격했고, 16초전에는 공격권까지 잡아
승리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공격을 맡은 로즈그린의 실수
로 경기는 84 대 87로 졌다.

선수들은 "로즈그린이 잘하지만 실수도 한다. 우리가 분발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을 갖게 됐고, 강적 삼성에게도 역전승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힘을 얻었다.

나산은 이후 강호로 꼽히던 SBS에 96 대 91로 승리하더니, 올 우승후
보 나래와 현대를 잇달아 꺾고 3연승을 올렸다. 수비 전문으로 알려진
김현국이 3점슛을 펑펑 쏘아댔고, 이민형이 고비마다 득점했다. '만년
후보' 박세웅도 펄펄 날았다. 부진했던 신인 최명도 김병천 등도 제자리
를 찾았다. 로즈그린은 특유의 훅슛을 마음껏 날렸고 잭슨도 리바운드에
서 맹활약을 했다. 현재까지 전적은 5승9패로 7위.

나산 농구팀의 운명은 이제부터가 더 험난하다. 서장훈 현주엽 강동
희 문경은 이상민 추승균 이은호 정재근…. 아시안게임 때문에 결장했던
국가대표 선수들이 합류한 다른 팀들의 전력은 배가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산은 좌절하지 않는다. 김현국 박세웅 김병천 김영주 박상
욱 변청운 이병률 이호재 장창곤 최명도. 플레잉 코치로 뛰고 있는 이민
형이 좀 이름이 있는 것 외에는 대부분 무명인 그들은 "어느 팀 하나 쉽
게 이길 수 있는 팀이 없다"는 현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들은 "우리가
뭉치면 어느 팀에게도 호락호락하게 지지 않을 것"이라는 오기로 가득차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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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유하 나산 감독
"꼭 6강 올라 뭔가 보여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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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초 4연패하다가 3연승했으나 최근 다시 3연패했다. 국가대표들
이 복귀하면 앞으로 더욱 어려운 경기가 될텐데.

▲허리 부상인 변청운과 발바닥에 금이 간 김병천 등 신인들이 가세
해 선수층이 두터워졌다. 3연패한 경기에서도 내용은 대등했다. 선수들
의 각오가 굳어 앞으로 우리가 꼭 진다는 법도 없다.

-평소 선수들에게 무슨 말을 하는가.

▲"선수들이 뿔뿔이 흩어져 다른 구단으로 팔려가면 더부살이의 서러
움을 겪게 된다. 어떻게 하든 6강이 겨루는 플레이오프에 올라가 나산구
단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해 팀으로 인수돼야 한다"고 말한다.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

▲선수들은 구단을 인수할 기업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그 희망으로
버티고 있다. 꼴찌 후보가 7위에까지 올라있는 것은 그 힘 때문이다. 그
런데 기다리던 소식이 끝내 없고, 선수들이 허탈감에 빠지면 모래성처럼
무너질 것이다. 그것이 가장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