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죄인이 입을 놀리다니" 노비가 호통친 이근택 ##.
경운궁(덕수궁) 중명전에서 나라를 반신불수로 만드는 을사조약을 둔
마지막 어전회의 진행을 보자.
당일 한국 주둔 일본군 사령부 휘하 13사단은 광화문 앞에서 덕수궁에
이르는 큰 거리에서 무력 시위를 했다. 완전무장한 보병이 전진 후퇴 공
격연습을 하는 체하고 장안 여덟 성문을 점거했다. 전 시가를 내려다볼
수 있는 남산 왜성대에는 야포 수십 문을 덕수궁으로 겨누어 포열을 가
지런히 했다.
일본군은 을사조약을 앞두고 남산에 대포를 배치, 조약 체결 장소인 덕수궁을
향해 위협 시위를 했다.
물론 고종과 내각에 이 사실이 통고되었으며, 총포 소리는 들리지 않
아도 황제와 대신들은 10년 전에 있었던 민황후 시해가 연상되어 공포의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그날 저녁 착검한 총으로 무장한 일본 보병이 황궁에 들어가 요소에
배치한 다음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는 조선군 사령관인 하세가와 대장
과 하야시(임권조) 공사를 대동하고 황궁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어전
내각회의 개최를 강요, 현안 곧 을사오조약 가결을 재촉한것이다. 외국
사신의 강요에 따라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된 어전내각회의란 세
계역사에 전무후무할 것이다.
학부대신 이완용이 나지막이 입을 열어 자기인들 이 조약을 좋아하겠
느냐며 "내각 전원이 이 조약 조인에 부표를 던지면 이토는 직접 폐하에
게 조인을 요구할 것이요 폐하는 거부할 것이 자명한데 그렇게 되면 일
본은 어떤 수단을 써서든지 압박하고 나올 것이며 그때는 조약 조문의
일언반구도 고치지 못하고 말 것이고, 그래서 일본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으며 다만 외교에 국한해서 한국이 실력이 생길 때까지 위임한다는 조
건부로 하는 것이 실리를 취하는 길일 것입니다"했다.
이어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 "거기에 한국 황실의 안녕을 보장하는
한구절을 첨가하는 조건으로 학부대신 이완용의 의견에 동조한다"했고
군부대신 이근택과 내부대신 이지용이 찬성했고, 처음에는반대했던 박제
순마저 찬동했다.
나머지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이 찬성에 주저했으며 대
세가 기울자 참정대신 한규설은 아이고를 연발하며 그 조인 자리를 떠났
다. 이렇게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을 을
사오적으로 일컫기에 이른 것이다.
흥선대원군의 종손으로 오적 중 하나인 이지용은 조인을 하고 나오면
서 "오늘 내가 지천 최명길의 심정으로 도장을 찍었다"고 장담을 했다.
병자호란으로 오랑캐에게 포위당한 남한산성 속 어전회의에서는 화의
하여 왕실을 구제하자는 주화파와 끝까지 싸워 옥쇄를 하자는 척화파가
갈등을 빚고 있었다. 이때 주화문을 척화파가 찢자 최명길이 이 찢어버
린 종이 쪽을 주워 모으며 '조정에는 이를 찢는 자도 없어서도 안되지만
이를 주워 모으는 자도 없어서는 안된다'며 주워 모았던 고사로 자기 매
국행위를 정당화한 것이다.
이지용이 재색이 뛰어나기로 팔도에 소문난 진주 기생 산홍을 천금을
주고 애첩으로 들였는데, 낭군이 나라 팔아먹은 오적이라는 사실을 알자
"나 비록 천인이지만 역적 첩 노릇은 하기 싫다" 하고 가출해 버린 것이
다.
'누군가 이지용에게 시를 써 보내기를 '온 세상이 나라 팔아먹었다 떠
들썩한데/종놈 얼굴이나 종년무릎에도 예외가 아니다/그대 집채 안에 금
과 옥이 산처럼 쌓여도/산홍 일점홍을 꺾지 못하는구려'.
이근택은 동대문 밖 13도 사찰을 관할하는 친일계 원흥사의 승군 50
명을 거느리던 총사장으로 왜승 히로야스 등을 불러들이는 등 일본 불교
침투의 앞잡이 노릇을 해오던 자다.앞서 등장한 한규설의 조카이기도 한
이근택은 왜승과 친한 미끼로 일본인 상점을 자주 출입했다. 어느날 고
물상에서 수를 놓은 비단 띠를 발견했다. 알고 보니 명성황후를 살해한
한 일본 낭인이 현장에서 주워 간직했다가 팔고 간 것으로, 바로 황후가
시해당했을 때 두르고 있던 띠였다. 그래서 핏자국이 고스란히 남아있기
도 했다.
이근택은 이 민황후의 유일한 유물인 띠를 자그마치 6만냥을 주고 사
들였다. 그리고 한규설로 하여금 길을 터 고종황제에게 이 수띠를 바친
것이다. 황제와 황태자는 이 띠를 보고 마치 황후가 살아온 것처럼 부여
안고 통곡했다. 또 이 띠를 타고 소위 오귀라 일컫는 이근택과 그의 다
섯 형제 근호 근용 근상 근홍의 벼락 출세 길이 트인 것이다.
'대한계년사'에 보면 이근택이 경위원총관으로 있을 때 가렴주구가
혹심하여 원을 품고 죽은 이가 부지기수이며 궁중에 들어가서는 일본 밀
정으로부터 30만원을 받아 국가 존망의 비밀 정보를 팔아먹었다 했다.
오적 중 가장 흉악한 것이 이근택으로, 일본군 사령관인 하세가와와
결의형제하고 이토 히로부미와는 부자의 의를 맺었으며 단발 양복을 입
고 왜차를 타고 왜병의 호위를 받으며 출입했다.
매국 오조약에 조인하고 돌아온 이근택이 자기가 한 일에 대해 자랑
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을 문 밖에서 그 집 비녀가 엿들었다. 이근택의 며
느리로 한규설의 딸이 시집오면서 데려온 교전비다. 이 말을 들은 비녀
는 부엌칼을 들고 들어와 이근택을 겨냥하며 '한 나라 대신이란 자가 국
은은 어찌하고 망국에 즈음하여 죽지는 못할망정 나라 판 일을 자랑스럽
게 말하느냐. 나 비롯 천인이긴 하지만 개나 승냥이만도 못한자 밑에 밥
얻어 먹은 것이 구역질난다. 내 비록 힘이 달려 네 놈을 찌르지 못하나
옛상전 찾아 돌아가겠다' 하고 집을 나가 사람들을 불러 모아 놓고 상전
이 나라 팔아먹은 대역을 큰소리로 호소했다. 이에 감동하여 이근택의
집에서 일하던 침모와 주방에서 일하던 찬모도 같이 집을 나와버렸던 것
이다.
그 뒤 이 오적들은 잠자는 동안에 자객이 침입, 난자를 하는가 하면
길가다가 술취한 사람에게 뺨을맞고 모욕을 당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기
산도 나인영의 오적 암살 음모는 미수에 그쳤지만 위협적인 것이었다.
나인영은 폭약 두 궤를 마련하여 이를 열면 폭발하게끔 장치를 하고
오적인 박제순과 이지용의 집에 미국인 아무개가 보낸 선물처럼 전달했
다. 집사람이 열어보려는 것을 만류하고 칼끝으로 제쳐 속을 들여다보고
폭약임을 알아낸 것이다. 이 말이 급히 전달되어 이지용도 화를 면했다.
이에 좌절하지 않은 나인영은 장사 18명을 모집, 을사조약의 일본 앞
잡이로 활약한 대가로 대신까지 된 박용화까지 육적으로 삼고 장사 3인
당 일적씩 배당하여 뒤를 쫓게 했다. 이에 권중현을 사동에서 만나 육혈
포를 세 발 쐈으나 맞지 않았고 박용화는 끝내 자살당하고 만다.
철종의 임종이 가까워지자 파락호 흥선대원군이 사는 운현궁 문턱을
자주 넘나드는 이가 있었다. 대원군이 지금 미국대사관이 자리잡고 있는
사복시(사복사) 제조로 있을 때 휘하에서 일했던 이호준이다. 바로 이호
준의 사위가 조성하요, 조성하는 철종이 승하하면 그 대권을 정할 권한
을 쥔 조대비의 친정 조카인 것이다.
이 인맥을 통해 대원군은 그의 둘째 아들 개똥이를 고종으로 받드는
데 성공한다. 이호준은 이 공으로 전라 관찰사로 나갔다. 그에게 아들이
없자 우봉 이씨 항렬에 맞는 머리가 좋은 아이를 골라 양자로 들인 것이
이완용이다. 이렇게 고종 치하의 이완용은 승승장구 출세 길을 더듬었던
것이다.
그는 일본말을 모르고 영어를 좀 할 줄 알았기에 친미 친로파였다가
일본 세력이 비대하자 고민하지 않고 서슴없이 친일파로 변신한다. 그는
권력을 노린 수많은 변신과는 달리 외세 아니고는 나라를 영위할 수 없
다는 소신 있는 매국노라는 편이 옳다. 매국 오적의 괴수가 된 연후로
인력거 타고가다가 습격당하고 집에 방화가 잇따라 집을 숨기며 옮겨 다
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이완용의 집 가운데 하나가 후에 기미년 33인의 민족 대표가 독
립 선언을 한 명월관이라는 것은 역사의 장난이 아닐 수 없다. 그 집에
서 일어난 변고도 하나 둘이 아니다.
이를 테면 1908년 4월에 이완용의 집 장독대에서 장독 6개가 영문도
모르게 깨진 일도 그것이다. 지금은 인사동 이문안에 있는 그 터에 빌딩
이 들어섰지만 30∼40년 전만 해도 그 이완용의 옛 집터에 벼락 맞아 새
카맣게 갈라진 느티나무 고목이 서 있었다. 이완용의 조카로 일제 때 한
국경제를 주물렀던 한상룡의 회고록에 이런 대목이 있다.
젊었을 적에 한상룡이 이 이문안 집에 자주 놀러가 이완용의 아들 이
항구와 당구를 치곤 했다. 어느날 갑자기 먹구름이 끼더니 찢어지는 듯
한 천둥 벼락 소리가 났다. 문전 느티나무에 벼락이 떨어져 두갈래가 난
것이다. 이항구가 이에 기겁을 하고 방으로 도망쳐 이불을 둘러쓰고 있
자 이완용이 부동자세로 서 있더니 '벼락 친 다음에 도망쳐야 소용없는
일이다' 하면서 이전에 보지 못했던 서글픈 표정을 얼굴에서 읽을 수 있
었다고 매국노의 생질은 회고하고 있었다.
이문안 고목은 제 몸을 다쳐가며 민족의 원한과 분노를 대변한 것이
다. 베어 없애지 말고 역사의 교훈으로 길이길이 보존해야 했을 역사 문
화재라는 아쉬움이 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