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8월29일 외부에서 일본 전 총리대신 이토의 내한을 축하하는
잔치를 벌였었다. 각부 대신과 주한 외교관들이 참석한 잔치를 마치고
돌아가는데 상에 놓아두었던 이토의 안경이 없어졌다. 평소에 안경을
쓰지 않던 이토는 노안현상이 일어나면서 유럽제 금테 안경을 종종 꺼
내 쓰곤 했던 것이다. 우연이 아니라 고의적인 증발일 것으로 낌새를
챈 이토는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하고 돌아갔으며 조정에서는 범인을
잡아 돌려줄 것을 내부대신과 경무사에 명했다. 그날 잔치 심부름하던
하인과 하급관리들을 차례로 불러다가 태를 치고 주리를 틀었으며 수십
명이 옥에 갇히기까지 했다.
1902년에 한국을 여행한 한 프랑스화가의 풍물지 속의 식사하는 여인이 안경을 끼고 있다. 이맘때만해도 안경이 꽤 번져있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백성우, 이한우저 '파란눈에 비친 하얀 조선)
그때 이 안경사건을 두고 황성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8월29일에 외부에서 일본국 총리대신 이토 후작을 초치하야 향응할
새 후작이 그의 안경을 실하얏슨즉 경대해야 할 외빈에게 매우 무색하
난고로 비서과장 조성협씨가 그 향응장소에 거행하던 하인들을 무수히
연행하엿다 하니 우리난 차사건이 불연한 줄로 지하난 것이 그시 거행
하던 하인이 모두를 도둑으로 지목할 수도 업고 또한 하인이 거행치 안
코 관원만 잇서데면 그 관원을 다 면관하엿슬난지.'
항간에는 나라를 훔쳐간 놈의 안경 하나 훔친 것이 비교나 되는 일
이냐고 빈축의 여론이 비등하기도 했다. 공기가 험해지자 서울에 사는
일본인들에 외출금지령까지 내렸었다. 사건이 일어난지 열흘 후에 외부
의 한 종으로부터 욕심이 나 집어넣었다는 자백을 받았다고 발표하고
그 범인에게 100대의 태를 치고 안면도에 유배시켰다 했다. 물론 조작
된 시국수습용 발표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후에 당시 궁에서 약방
기생을 했던 설도 할머니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궁녀들 간에 친일기와
배일기가 대립돼 있었는데 그 잔치에 차출된 한 배일기의 소행이었다고
했다. 나라 먹어드는데 힘없는 한 여인이 할 수 있는 작은, 하지만 보
이지 않게 큰 저항으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안경사건이 아닐 수 없
다.
소급해 오르면 안경저항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다. 1891년 새로 부임
해온 일본 오이시 공사가 고종을 알현하는데 무엄하게도 안경을 쓴 채
대전에 들려 했다. 윗사람 앞에 안경을 쓰지 못하는 것은 법도였기에
당시 궁정통역관이요 후에 한말의 마타하리라는 배정자의 남편이 되는
현영운으로 하여금 안경을 벗고 대전에 들 것을 종용했지만 막무가내였
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조정에서는 일본정부에다 나라를 얕보고 저지른
임금에 대한 불경으로 공식 항의를 하고 안경을 벗기지 못했던 현영운
만을 유배시켰었다. 안경과 지체에 대한 인식은 삼엄하기 그지없었다.
영국의 할머니 탐험가 이사벨라 버드 여사가 한국에 와 고종과 당시 왕
세자인 순종을 뵙고 사진을 찍고 있는데 '세자는 건강에 결함이 있어
보이며 강도의 근시안으로 몸을 잘 못가눌 지경인데도 예법상 상감 앞
에서 안경을 써서 안된다 하니 보기에 딱하기 이를 데 없었다' 했다.헌
종때 일이다. 임금의 외숙이 안질이 나 안경을 쓰고 궐안을 오가는 것
을 임금이 알고 둘레에 있는 근신들에게 뇌까렸다. '외숙의 목이라고
칼이 들지 않을꼬.' 이 말을 전해들은 외숙은 침식을 잊고 고민하다가
끝내 자결하고 말았던 것이다. 임금앞에서만 안경을 끼어서는 안되는
것이 아니라 임금이 계신 동일공간에서도 불손이 되는 안경이었다.
조정이 청나라의 실권자 이홍장에게 청하여 나라를 개혁할 서양인
하나를 천거받은 것이 독일인 묄렌도르프다. 안경 없이는 걷지도 못하
는 지독한 근시안이었다. 한국을 떠나기 위해 작별인사차 찾아가자 이
홍장이 물었다. 조선임금 앞에 가서 안경을 벗고 무릎꿇어 큰절을 할
수 있겠는가고--. 그가 임금을 처음 뵈올 때 그에게 주어진 협판(차관)
벼슬의 관복을 맞추어 입고 안경을 벗은 채 주춤거리며 어전에 나아가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는 고두배를 올렸다. 그리고 며칠 전부터 라틴어
활자로 발음을 적어 외워두었던 다음과 같은 인사말을 더듬거리며 외웠
다.
'신이 귀국에 와 불러보시니 감개하여 갈력진심 하오겠사오니 군주
께서도 강신을 신임하오시기 바랍니다.'
이에 호감을 가진 고종은 안경을 쓰라 하명하고 내시더러 부축하라
시키고 있다. 잊을 수 없는 안경사건으로 정계가 시끌벅적한 적이 또
한번 있었다. 미국 망명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환국한 서재필 박사는 러
시아 공사관에 파천해 있는 고종황제를 찾아가 뵈었다. 서재필 자서전
에 그 당시 상황이 이렇게 적혀 있다. 황제는 서재필을 보더니 대뜸
'어떻게 해야 좋아?' 하시기에 서슴지 않고 '대궐로 돌아가십시오. 한
국은 폐하의 땅이요 한국인민도 폐하의 인민입니다. 폐하께서 대궐을
버린다는 것은 그 땅과 그 인민을 버리는 것입니다. 한 나라 임금으로
서 대궐에 계시지 않고 남의 나라 공사관에 계시다면 국체가 손상될 뿐
아니라 남의 나라들의 비웃음거리가 됩니다' 했다.
이때 황제는 '글쎄, 그렇지만 무서워 어디 갈 수 있어야지' 했다 한
다. 이때 곁에 서 있던 친로파의 거두요 법부대신이던 이범진이 황제에
게 말했다. '저놈은 역적이올시다. 이처럼 위험할 때 폐하께서 대궐로
돌아가시라는 말을 어떻게 할수 있습니까' 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친
로파는 서재필을 매장코자 모략을 해댔다. 황제를 배알할 때 서재필이
안경을 벗지 않고 배알했음이 역신의 제1조요, 미국 시민권을 가진 것
을 기화로 황제폐하께 스스로를 외신이라 일컬었다는 것이 역신의 제2
조라 했다.
서재필은 이 정치문제를 야기시킨 안경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으며 그의 망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유품전시회가 독립기념관
에서 있었는데 그때 바로 그 문제의 안경이 전시되어 안경에 얽힌 한국
의 풍운을 새삼스럽게 했다. 10여년전 임진왜란 직전에 일본에 통신사
로 갔던 선조때 학자 김성일의 후손집에서 김성일이 쓴것으로 전해진
안경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한국에서 발견된 최초의 안경
이 될 것이다. 왜란 전후의 사정을 적은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보면
임진왜란의 강화를 위해 조선에 온 명나라 장수 심유경과 왜승 현소가
둘다 늙었는데 작은 글씨를 볼 때마다 안경을 끼고 읽는 것을 신기한
일로 적고 있다. 이것이 안경에 대한 최초의 기록임을 미루어 볼 때 김
성일이 안경을 구입할 수 있었음직 하다. 그후 제주도 정의현감으로 있
던 이종덕이 풍랑에 쓸려 일본땅 나가사키까지 표류, 그 곳에서 서양사
람이 사는 아란타관을 구경했는데 안경끼고 있는 것이'마치 게(해)눈깔
이나 벌의 눈두덩만 같았다'고 적고 있다. 이 게눈깔을 쓴 문헌상 최초
의 한국인은 숙종때 명상으로 장희빈 사건으로 여러 차례 유배당했던
남구만이고-.
'정조실록' 23년(1799) 기록에 보면 임금님의 시력이 나빠져 책을 읽
을 때마다 안경을 끼었다하고 우리나라에 안경이 들어온 것은 그로부터
200년이 되었다 했으니 한국 안경의 문헌상 시초는 1600년 전후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순조 연간인 1820년께에는 안경가게가 있어 30여가지
의 각기 다른 안경을 만들어 팔았던 것이다.
중국문헌'아유만록'에 보면 1300년 전후하여 명나라 사람들이 서역 상
인들로부터 좋은 말 한필값을 주고 안경을 사들였다 하고 그 흘러든 뿌
리를 서양에다 찾고 있는데 서양에서는 동양에다 안경의 뿌리를 찾고
있다. 1250년에 몽골지방을 여행했던 프란체스코 수도사 윌리튀브크가
몽골 사람들이 안경을 끼고 있는 것을 보고 와서 동료 수도사인 베이컨
에게 말했고 이 베이컨이 1268년에 안경을 만든 것이 유럽에 있어 안경
의 기원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몽골은 고려와 인적-물적 교
류가 왕성하던 때인지라 이미 안경이 그때 들어와 있었을지도 모를 일
이다. 다만 안경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아 문헌상 나타나는 것이 늦어
졌을 수도 있는 것이다. 교황 레오10세가 라파엘로에게 자신의 초상화
를 그리게 했을 때 눈이 나쁘지도 않았으면서 일부러 안경을 끼었다 하
리만큼 서양에서 안경은 위엄의 상징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어른이나 상
전 앞에서 끼어서는 윤상을 파괴하는 불손의 상징으로 기피해왔던 것이
다.더욱이 조선조에 들어 신체발부는 수지부모한 것으로 훼손해서도 또
덧붙여서도 안된다는 삼엄한 유교덕목에 사로잡히면서 안경은 반도덕적
요물로 취급받아온 것이다. 이렇게 윗사람 앞에서 쓰지 못했던 안경인
지라 아랫사람 앞에서는 신분과시용으로 즐겨 썼다. 임오군란후 수신사
로 일본에 갔던 김기수는 눈도 나쁘지 않았으면서 왜인들을 내려보는
효과를 위해 안경을 끼고 행진했다. 국내에서도 고관들은 말이나 가마
타고 행차할 때 안경을 곧잘 썼는데 신분 과시용이었으며, 안경을 쓰지
않고 들고 다니는 것이 유한계급인 한량의 멋 가운데 하나였던 시절도
있었다. 기생 가운데 궁중출신으로 격이 높음을 과시할 필요가 있던 약
방기생도 안경을 끼거나 손에 들고 다니는 것으로 그 격을 과시했다.일
제하에 소작인을 착취하는 지주의 대명사가 '금테안경'인 것도 눈이 나
쁜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안경의 신분과시 사례였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