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 스테이션, 닌텐도 64…. 어지러이 널린 게임기와 대형 TV.
벽에는 그가 그린 라그나로크 캐릭터 포스터들이 붙어있고, 책상위엔
컬러링 작업용 원화들이 수북이 쌓여있다.
신세대 작가 이명진(25)의 홍대앞 화실을 찾았다. 그는 패션업체
신제품 의류브랜드를 자기 만화주인공 캐릭터에 그려 넣고 있었다.
눈밝은 기획자가 새 의류 캐털로그를 준비하면서 그의 만화가 보여준
패션감각을 택한 탓이다.
이명진은 '고교생 작가' 출신이라는 드문 꼬리표를 달고 있다.
고3이던 92년 도서출판 대원 신인공모전에서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이라는 작품으로 금상을 받았다. 문하생 생활을 거치지
않고 독학으로 이뤄낸 데뷔였다. "집안 형편 탓에 미대 진학을
포기했었지요. 인문계 학교를 다니다 그림을 배우려고 공업계 고등학교
디자인과로 전학을 했습니다."
'어쩐지…'는 신인공모전과 상관없이 처음부터 연재를 계획했던
장편이었다. 원고 꾸러미를 들고 처음 찾아갔던 출판사는 오히려
공모전 참가를 권유했다. 9권으로 완결된 '어쩐지…'는 한국만화
최초로 판매부수 100만부를 기록하는 빅 히트를 날렸다. 이후 숱한
작가 지망생들이 이명진을 선망 '아이콘'으로 설정하고 습작을
계속했다. 한국만화 주류의 세대교체를 알리는 신호였다.
98년 군에서 제대한 뒤 그는 판타지 '라그나로크'를 연재하고 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시작해 사고 폭이 깊지 못했다"고 겸손해하는
전작'어쩐지…'보다는 "인간 정체성과 선악기준에 대한 고민처럼 좀 더
진지한 주제를 다루려 한다"고 밝혔다.
입술을 덮을만큼 긴 생머리, 스스로 디자인해 만들었다는 목걸이에,
여자라고 해도 믿을 귀여운 얼굴. 여러모로 철없어 보이는 신세대였지만
만화에 대한 주장은 또렷하고 옹골차다.
"영화는 엄청난 자본과 수많은 인력을 투자해 90분 안팎에 응축해내는
종합예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만화는 그것을 최소한 인력으로
풀어내지요. 만화가는 시나리오, 각색, 연출까지 책임지는 총체적 지휘자
역할을 합니다."
그는 개인 상상력을 풀어내는 데 이처럼 자유로운 장르도 없다고
믿는다. "단순히 하위문화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건 편견일 뿐"이라고
단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