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에서 무슨 코미디를 한다고…."
69년 8월 MBC TV 개국과 함께 '웃으면 복이와요'가 첫선을 보였을
때만 해도, 고개를 젓는 이들이 많았다. 변변한 작가도 없이 무슨
방송을 하느냐며 비웃기 일쑤였다. 95년 작고한 김경태 PD(95년)와
나를 포함한 몇몇 코미디언들은 속으로만 이를 악물고 있었다.
'웃으면 복이 와요' 시절의 구봉서(제일 오른쪽)
뚜껑을 열어보니 달랐다. 주당들도 '웃으면 복이와요'가 방송되는
목요일 밤이면 만사 제쳐두고 일찍 귀가할 정도였다. 청소년들만
상대하는 요즘 코미디와 달리 '웃으면 복이와요'는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두 시청자였다. 당시만 해도 볼 거리가 많지 않았던
까닭인지 녹화장까지 관객들이 몰렸다.
초창기 대본은 악극단 시절부터 대본을 자주 썼던 내가 많이 맡았다.
그런데 제법 관객들의 공감을 자아내는 내용이 많았던 모양이다. '위대한
유산' 같은 콩트는 빅히트했다. 거지 왕초가 임종을 맞아 부하들을
모아놓고 유산을 나눠주는 내용이었다. "김부잣집 제삿날은 9월
스무날이야. 이부잣집 장손자 돌날은 3월 열이레고…"하는 식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코미디 내용을 두고 제약이 많았다. 코미디에 의사를
등장시키면 의사협회에서 항의를 하고, 도자기를 깨면 골동상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식이었다. "도둑과 거지 말고는 소재로 삼을 게 없다"는 푸념이
절로 나왔다. 그런데 거지를 등장시키는 것까지 제동을 거는 당국자가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거지가 없는데 왜 코미디에 나오냐"는 것이다.
화가 나서 "당신은 거리에서 거지를 본 적 없냐"고 대들었다.
'웃으면 복이와요'는 70년대 코미디 간판 프로그램이었다. '살살이'
서영춘, '비실이' 배삼룡과 이기동 송해 이순주 권귀옥 등 당대 내로라하는
코미디언들은 모두 나왔다. 배삼룡은 대본을 잘 외지 않아, 대사가 막히면
얼렁뚱땅 넘어가 웃음을 낳았다. '웃으면 복이와요' 덕분에 다른 방송사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많이 받았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주선으로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과 한국화약 김종희 회장 등 몇몇 재벌회장들이 나를 위한 후원회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요즘 '팬클럽'의 원조인 셈이다. 위기도 몇차례 겪었다.
김성진 문공부장관 때 저질 시비가 일어 하마트면 프로그램이 없어질 위기에
처했다. 당시 코미디언 몇몇이 장관을 만나 항의했다. "자동차 사고가 많이
난다고 자동차를 없앨 겁니까? 코미디에 다소 문제가 있다면 고쳐나가야지
프로그램을 없앤다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까지 호소한
끝에 프로그램은 겨우 명맥을 유지할 수있었다. 박 대통령도 '웃으면
복이와요' 팬이었던 것같다. 몇차례 저녁 식사에 불려가 자리를 함께
하곤 했다.
'웃으면 복이와요'는 85년 4월 16년만에 막을 내렸다. 난 786회 모두
'개근'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영화촬영 때 절벽에서 떨어져 얻은 다리
부상이 도졌을 때도, 목발을 짚고서라도 녹화장에 나갔다. 내가 맡은
일이 천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웃으면 복이와요'는 92년 다시
방송을 시작했으나 만 2년을 못채우고 끝났다. 요즘 들어 코미디는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간다. 코미디 작가와 코미디언을 제대로 키우고 훈련시키지
않은 게 큰 이유다. 코미디를 천시하고, 웃음을 가볍게 여기는 사회풍조도
한몫한 것같다. 일제시대와 해방을 거치면서 나한테까지 전해 온 한국
코미디의 전통은 세기말을 맞으며 나도 어리둥절할 정도로 급속히
변모해가고 있다. (원로 코미디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