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현(19)을 만나면 '롯데월드'에 갈 생각이었다. 가는 길에 은행에
들러 돈도 꽤 찾았다. 결국 그 돈은 고스란히 굳었다. 전지현은 "롯데월드
갈래요?" 하는 말에 그야말로 대경실색, 말을 잊고 한참 쳐다봤다. 싫으면
싫다고 할 것이지 놀라긴.
바야흐로 청담동 일대는 가정집을 다른 용도로 개조하는
'리노베이션'이 한창이었다. 전지현을 만나러 간 미용실도 그럴싸한 단독
주택을 개조한 곳이었다. 옛 거실이었을 공간엔 남녀들이 머리에 열을
쪼이며 앉아있었다.
흰 니트에 회색 바지, 올 굵은 회색 재킷을 입은 전지현이 나타났다.
핼쓱해 보일 만큼 마른 편이어서 의외였다. 입술에 색 없이 반짝이는
루즈를 발랐을 뿐, 거의 화장기가 없다.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 끝 손톱들은
단정하게 잘랐고, 매니큐어도 바르지 않았다. 오른손 검지 마디가 곪아
있었다.
"장혁 오빠랑 찍은 뮤직비디오 있잖아요. 칼 휘두르는 거요. 그거
찍다가 다쳤어요." 뮤직비디오를 못 봤다고 했더니, "아니, 그 화제의
뮤직비디오를 모르세요, 얼마나 화젠데" 하고 되물었다.
사진을 찍으러 나서면서 보니, 벽에 걸린 모니터에서 웬 무술영화가
돌아가고 있었다. 전지현이 뛰어들듯 오더니 말했다. "저기 저기, 제가
찍은 뮤직비디오예요. 멋있죠?" 했다. 그러고 보니 화면 속 여자배우는
임청하가 아니라 전지현이었다. 뜰에는 탤런트 이승연이 데려온 강아지
둘이 천방지축 뛰어다녔고, 그룹 지오디 멤버 몇 명이 유리창을 보며
옷매무새를 만지고 있었다.
근처 카페 2층으로 자리를 옮겼다. 창 밖엔 새로 초록물 들인 나무들이
서로 봐달라고 아양떠는 것 같았다. 그에 비하면 깔끔하게 정돈된 카페
안은 차라리 촌스러웠다. 카페 안엔 스팅의 노래 '컴 다운 인 타임'이
흘렀다.
찬찬히 뜯어보니 눈 코 입이 특별히 튄다는 느낌없이, '평범'에
가깝다. "그래서 절 좋아하시나봐요. 질투할 만큼 예쁘지 않으니까.
그래서 제 또래 여자팬들이 많은 것 같애요."
'롯데월드'에 왜 그리 놀랐느냐고 물었다. "아주 싫어하거든요.
서있는 것도 힘들고, 돌아다니는 걸 원래 싫어해요. 얼마 전에 아빠랑
산에 갔었는데,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흠, 말 된다. '자이로드롭'
한번 타려고 구불구불 줄서는 게 취미인 사람도 있으니, 그 반대인 사람도
당연히 있겠지 싶었다.
내처, "좀 게으른 성격인가봐요" 하고 물었다. 펄쩍 뛴다.
"아니에요. 저 얼마나 깔끔한데요. 거의 결벽이랄 만큼요." 그래서
간이 테스트를 해봤다. "집에 손톱깎이가 어디있는지 알아요?" 했더니
제깍, "책상 왼쪽 조그만 3단 서랍장 맨 윗서랍이요" 했다.
진선여고 1학년이던 97년 4월 잡지 '에꼴' 표지 모델로 처음 얼굴을
공개했다. 당시 모델일 하던 '아는 언니'가 소개했는데, 정작 그
'언니'는 지금 뭐 하는 지 모른단다. 고2 때 SBS '내마음을 뺏어봐'로
TV에 등장하고, 99년 초엔 영화 '화이트 발렌타인'에서 박신양
상대역으로 나왔다. 정작 '대박' 터진 건 삼성 '윙고'와 '마이젯'
CF였다. 다들 "쟤 누구야?" 할 만큼 춤이 섹시했다. 그 덕에 팬들
나이층도 30대 이상으로 넓어졌다. 요즘은 올 가을 개봉할 영화
'시월애'를 찍고 있다.
"그 CF, 컴퓨터그래픽으로 몸매를 만졌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하고
물었다. "우이 씨, TV에서 차태현이 '컴퓨터로 만진 것 같은데' 해서
그래요." 그러더니 "사실은 (가슴과 엉덩이에)뭘 좀 넣었어요" 했다.
동국대 연극영상학부 1학년. 14학점을 듣는데, 매주 월·수·목요일에만
수업이 있다고 했다. 전공 필수로 '기초연기' '연극개론'을 듣는다.
"CF 이미지가 강하긴 했지만, 좋은 배우, 자존심 강한 연기자가 될
거예요" 했다.
인터뷰 하던 날 수업시간에 한 여학생한테서 장미꽃 한송이를
선물받았다고 했다. 무슨 수업이었냐고 하니까, "국어작문과 이론의
실체요" 했다. 아무래도 '국어작문의 이론과 실제'인 것 같아
캐물으니, "아이, 그냥 '국어시간'이라고 해주세요" 했다.
원래 성은 왕씨다. 어떤 PD가 "'왕지현'은 이미지가 강하니 성을
바꾸자"고 했단다. 옛 이성계가 고려 왕족인 왕씨를 멸할 때 왕씨들이
옥이나 전씨로 성을 바꾼 것에서 따왔다.
전지현은 내내 두 팔로 제스추어를 쓰면서 말했다. 들을 땐 왼손을
턱에 괴고 오른 손가락들로 테이블을 도로록도로록 두들겼다. 흰소리
한마디 했더니 "푸하하" 하면서 테이블에 쓰러져 웃었다.
일어서니 저녁 8시가 넘었다. "저녁을 사겠다"고 했더니, 매니저가
"촬영 때문에 인천 쪽으로 가야된다"면서 극구 사양했다. 큰 길까지
차를 얻어타고 갤러리아 백화점 앞에서 헤어졌다. 뒤이어 잡은 택시가
공교롭게 전지현을 태운 미니밴을 따라갔는데, 미니밴은 광림교회 옆
먹자골목 앞에서 왼쪽 깜박이를 켜더니, 어지러운 네온사인 속으로
스며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