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데올로기와 흑백논리가 상상력을 죽이고 있다" ##
이어령(67)과 김윤식(65)―. 비평가이자 문학사가로서 20세기 후반
한국 문학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두 석학이 9월 초 나란히 대학 강단을
떠난다. 이 교수는 이화여대의 석좌교수직마저 버리는 것이고, 김교수는
서울대 명예교수로 신분이 바뀐다. 이들은 각각 9월 7일과 11일,
몸담았던 학교에서 학문과 예술과 인생을 정리하는 고별강연을 갖는다.
거장의 퇴장은 시대의 종언이다. 이들의 특별 대담이 27일 저녁 서울
광화문에서 5시간 동안 진행됐다. ( 편집자 )
▲이어령=오늘 아침 곽종원씨(문학평론가)가 세상을 떴다는 얘기를 들었다.
57년 내가 현대평론가협회를 결성했었는데, 그때 문우들의 반 이상이
고인이 돼 있다. 나는 자서전이나 회고록은 절대 쓰지 않으려 했다.
미래를 생각하기도 바쁘고, 또 되돌아 보면 왠지 소금기둥이 되고 말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회고담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김윤식=나는 윤삼월에 태어났다. 그 탓에 내 생일은 20년에 한번씩 오고,
'저 놈은 공달에 태어난 놈'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나에게
해당되는 사주팔자도 토정비결도 없었다. 그래서 멋대로 살아온 것일까.
시 소설을 쓰고 싶었으나 대학에 들어와 보니 글쓰는 곳이 아니었다.
그래도 학문 비슷한 것을 찾아보니 비평이었다. 이어령 선생은 당시
신문연재로 우상파괴적 평문을 많이 쓰셨다. 그 글들은 백철 임화 조연현
등과 전혀 달랐다. 이 선생 글은 산문시 같았다. 짤막한 촌철살인.
▲이어령=우리 둘은 문학사적으로 차이가 있다. 김 교수는 외곬으로
동서고금에 유례없을 학술서 100 여 권을 남겼다. 세계적인 일이다. 내가
갔던 길은 조금 달랐다. 나는 전쟁 끝나고 벌판에 던져진 화전민이었다.
앞선 발자국도 없었다. 선언서 대자보 같은 문학을 했던 것이고, 호흡이
짧은 천식환자 같았다. 내가 몽골 병사처럼 가시밭길을 불사르고
개척했다면, 김 교수는 그 이후 씨 뿌리는 정착 세대로서 중요 역할을
했다.
▲김윤식=내가 학문적 터를 잡는 데 영향을 준 것은 이 선생이 쓰신
'흙속에 저 바람속에'(1963)다. 나는 흥분됐다. 나 뿐 아니라 여러
사람이 모방하려 했으나 잘 안됐다.
▲이어령=당시는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넘어가는 독특한 시점이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넘어가는 경계선에 서
있다. 거대한 세계 문명이 교체하는 두 개의 문지방을 한 몸으로
경험하는 지식인이 누가 있겠는가.
▲김윤식=내 학위가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였다. 이 놈을 해야겠는데,
도대체 근대란 무어냐, 그래야 근대문학을 할 것 아니냐, 는 생각을
했다. 당시 내 나름으로는 근대란 정치면에서 국민국가의 형성,
산업면에서 자본제 생산양식의 발전이라고 정리했다. 문학도 그것과
관계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나라 망하고, 반제 투쟁해야 했고,
반봉건 투쟁도 해야 했다. 특수성과 보편성이 동시에 상극처럼 엉겼고,
이런 속에서 근대문학이 작동했다.
▲이어령=우리 둘이 다른 점은, 나는 그것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자본'은 '소유'고 '소유'는 배타적 권리인데, 문화란 '체험의
공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문학의 언어는
시장경제원리에 영향을 받기는 하겠지만, 시장이 아닌 다른 자장에
들어 있는 감동과 매력의 원리가 움직이고 있다.
▲김윤식=김지하 시인이 감옥에 6년 동안 버텼는데, 창턱에 앉은 민들레
씨앗이 먼지 위에 싹을 틔우는 것을 보고 견뎠다고 했다. 민들레 씨앗이
문자 상상력으로 남았고, 다시 식물학적 상상력으로 발전한 것이다.
김춘수는 무의미의 시로 난해했으나, 그의 시론을 꼼꼼히 읽어보니
버섯의 '포자'라는 개념이 있었다. 문학은 포자로 번식하는 길 밖에
없는 게 아닌가, 꽃은 필 수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어령=문학 텍스트를 의미의 무중력장으로 보느냐, 의미가 켜켜이 쌓인
것으로 보느냐의 갈림이 있다. 내가 기호학을 한 것은, 민들레 씨 자체가
아니라, 씨가 떨어져 살려고 하는 의지로 그 사유체계를 보았기
때문이다. 김춘수가 문학 쓰기를 의미를 실어 나르는 수레 자체로 본 것,
이오네스코가 어학교본으로 연극 대본을 삼듯 탈의미의 부조리에 의탁한
것 등에는 이데올로기도 의미도 없었다. '예술의 적은 설명이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무엇이든 100%는 없다. 김춘수에게도 의미는
끼어든다는 뜻이다. 현시점에서 어느 것이 유리한가. 나는 '이것 아니면
저것'(either or)이 아니라, '양쪽 모두'(both all)가 21세기
화두라고 본다.
▲김윤식=우리가 몸은 하나인데 지금 두 세기를 살고 있다. 한 몸으로 두
세기를 사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어령=한 시대에 충실해야 두 세기를 살 수 있다. 김 교수와 나는
철저한 20세기인이다. 그래야 효용성도 있다.
▲김윤식=두 세기를 한꺼번에 살려고 하면 타원형이 돼 버릴 것이다.
▲이어령=타원은 굴러갈 수 없다.
▲김윤식=‘중심은 하나’다 생각해야지.
▲이어령=소크라테스를 죽인 것은 배심원도 로마시민도 아니고, 시대다.
기울대로 기울어서 그 노인이 큰 시대의 흐름에 깔려 죽은 것이다. 그가
말하기를 '햄록(hemlock·독당근)을 마시고 무슨 말을 하느냐'고 했다.
이 독약은 마시고 나서 계속 얘기를 하면, 얘기를 하는 만큼 죽는 시간이
연장되는 독약이다. 내가 은퇴식에서 하는 기념강연 자체도 내 시대를
연장하는, 몇 분 더 살아 남는, 그래서 햄록의 약효를 더디게 하려는
것이다. 지성인은 고통스러운 것을 빨리 지나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한발자국씩 다가오는 죽음과 생생하게 대화를 하는 것이다. 브루터스, 너
마저도! 처럼, 시장화, 권력화하는 세상에 문화, 너 마저도! 인 것이다.
▲김윤식=나도 그 독약을 구해야겠다. 그러나 한 사발로는 안되고 다섯
사발은 마셔야겠다. 나도 기념강연을 위해 원 100장 정도 써 놓았다.
비평이란 사실은 내 자신을 어찌 할지 모르니 작품을 통해 해답을
얻으려는 것이다. 작가 자신도 모르는 해답이 있을 것 아닌가. 그런데
학문이고 비평이고 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네 것은 무엇이냐, 가
만년의 괴로움이었다. 그럼 왜 썼느냐. 읽고 나서 쓰는 행위가 없으면
읽은 것이 확인이 안 됐다.
▲이어령=김 교수는 작품에서 해답을 구한다고 했는데, 나는
에고이스트여서 그런지 해답이 아니라 질문을 찾는다. 나는 내가 모르는
것, 상대방이 묻는 것, 수수께끼, 숨바꼭질 등을 찾는다. 해답이 있는
것은 못 읽는다. 나는 리얼리즘 작가를 비평할 수 없다. 붙일 말이 없기
때문이다. 나라의 쇠퇴기엔 상상력도 죽는다. 독창성, 상상력, 꿈 등을
이야기 하면서도 이데올로기와 흑백논리로 뒤덮여 지금처럼 자유로운
상상력을 죽인 적은 없었다. 이제 우리가 말하는 '상상력 되찾기
운동'이 후배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다. 김윤식=사르트르가 비평가는
공동묘지의 묘지기라고 했다. 서재는 공동묘지다. 책 속의 저자들은 죽은
사람이다. 나는 그곳에서 평생을 살아왔다. 비평가 역할은 공동묘지의
죽은 사람에게 몸을 빌려줘서 말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평생을
보내 버린 것이다. 이게 무엇인가.
▲이어령=내가 떠나는 것은 정년 때문이 아니라 내 역할이 끝났기
때문이다. 비평적 생명력은 50년대 끝났다. 돌격대와 나발수의 역할이
끝난 것이다. 나는 한 우물은 안 판다. 파다가 물이 나옴직하면 다른
우물을 팠다. 사방에 물 파러 돌아다닌다. 우리의 꿈은, 뒤에 오는
사람들이 우리를 딛고 우리 위에서 해야지, 이전으로 돌아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어녕 교수 약력
▲1934년 충남 아산 출생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졸
▲50년대 평론활동 이후 '그가 안 해본 것이 무엇일까' 싶을 만큼 다양한
경력. 신문사 논설위원 특파원, 이화여대 교수, 동경대 객원교수, 초대
문화부장관, 올림픽기념사업추진위원, 서울시 정책자문위원,
새천년준비위원장, 2002년 월드컵 축구 정책자문위원…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등 70여권에 이르는 저술과 '우리시대
아이디어 맨'이란 별칭. 현 중앙일보 고문
◆김윤식 교수 약력
▲1936년 경남 진영 출생
▲서울대 국어교육과 졸
▲군 경력까지 포함, 서울대 국문과에 "44년 봉직". 아마도 "기록"일
것으로 본인 추정. 한국의 연금관련 규정도 '40년'까지만 있다고.
▲'한국 근대문예비평사연구' 등 저서 100권 돌파. 이 역시 "세계
기록"일 것으로 추정. 그동안 썼던 저서의 서문들만 모아 2001년
'김윤식 서문집'이란 단행본으로 출간.
▲현 서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