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金薰)은 5일 수상 소감을 전하며 ‘다시 임화(林和)를 추억함 ’이란 제목을 부탁했다.팩스 전송에 실패한 그는 연필로 쓴 원고를 직접 들고 왔다. <br><a href=mailto:yhhan@chosun.com>/한영희기자 <

## 모든것 버리고 '문학 가출'…"고립을 두려워하지 않겠다" ##

저는 초로의 나이에 겨우 혼자서 쓰기 공부를 시작한 백면의 서생일
뿐입니다. 이런 은성한 상을 받게 되는 일이 팔자에 없어도 좋았고, 또
상을 받게 되었다고 해서 돌연 사유의 전환이나 확장이 있을 리 없으니,
이런 자리에서 무슨 말을 해야 덜 민망할 것인지 난감한 일입니다. 다만,
조금은 더 써야 할 것들이 남아 있으며, 지금 그 남은 것들을 겨우겨우
쓰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 이 난감함을 위로할 뿐입니다. 생사의 급박함을
스스로 알아서 사람 모이는 대처에 나 다니지 않고 혼자서 처박혀서 한글
한글 쓰도록 하겠습니다. 무리를 아늑해하지 않으며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동인의 이름으로 열리는 이 자리에서 저는 엉뚱하게도 우리들의 식민지
조국의 선배 임화(1908~1953)의 시인된 운명에 관하여 생각하고
있읍니다. '칼의 노래', 이 희망없는 소설을 쓰며 새운 지난 겨울 밤에
제가 만나본 적도 없는 임화의 혼백은 수시로 제 마음 속을
들락거렸읍니다. 저에게 찾아와 술 한 잔을 달라던 이 젊은 패륜의
혼백은 아직도 땅 위로 편입되지 못하고 또 그 땅을 떠나지도 못한,
거렁뱅이 중음신의 넋이었읍니다.

'오호 적이여, 너는 나의 용기이다'라는 묘비명을 미리 내걸어 놓고
출발한 그의 청춘이 시와 현실 사이의 간극을 긍정하기란 아마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 불가능으로 그는 영원한 미성년이고
미완성일테지만, 그의 미완성은 안타까울지언정 가엾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는 그 참혹한 간극 앞에서 무너져 내리면서 시대라는 이름의 거대한
적을 향하여 좌충우돌하다가 마침내 시대에 의하여 살해되는 짧은 생애의
비극적 장관을 이루었습니다. 저는 지금 그의 친일이나 반일, 배반과
타협, 그의 미숙한 다다이즘이나 볼셰비키즘, 그리고 1953년 여름에 '미
제국주의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자신의 '사회주의 조국' 평양에서
처형 당하기까지 그의 생애에 걸린 수많은 악성 혐의들의 정당성 여부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다만 그의 청춘에 관하여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역사와 전통 속에
축적된 힘으로는 근대를 향해 전환할 수 없다는 운명이 대낮처럼
드러났을 때 그는 식민지 당대를 향하여 그 악명높은 '이식 문화론'을
외쳤습니다. 저에게는 그의 '이식 문화론'을 저주하는 일은 쉽고, 이
젊은 패륜아의 절망의 바닥을 헤아리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는 민족의
이름으로 단죄되었고 계급의 이름으로 처형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무너지면서 그 시대를 통과해나간 그의 파탄과 죽음은
언어와 현실의 간극을 긍정할 수 없었던 한 청춘의 비극으로 보였습니다.
그는 정치범으로서 처형되었지만, 시인으로서 죽었을 것입니다.

삶은 견딜 수 없이 절망적이고 무의미하다는 현실의 운명과, 이 무의미한
삶을 무의미한 채로 방치할 수는 없는 생명의 운명이 원고지 위에서 마주
부딪치고 있습니다. 말(언)은 현실이 아니라는 절망의 힘으로 다시 그
절망과 싸워나가야 하는 것이 아마도 말의 운명인지요. 그래서 삶은,
말을 배반한 삶으로부터 가출하는 수많은 부랑아들을 길러내는 것인지요.

제가 겨우 말한, 저 젊어서 죽은 패륜아의 생애는 이 모순된 운명들
사이를 헤치고 나오는 일에 아무런 전략적 방편도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찡겨있는 삶과 말의 꼴을 확연히 보여주기는 할 것입니다.

그의 저주 받은 혼백은 오랫동안 제 마음 속을 들락거릴듯 합니다.
인간의 일들을 인간의 바깥 쪽으로 끌고 가면서 뭐라고 중얼거리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이 저주 받은 안쪽을 들여다 보고 있겠습니다. 내
마음에 찾아오는 저 패륜의 혼백을 경건히 맞겠읍니다. 감사합니다.

(김훈)

※ 동인문학상 시상식이 11월7일 오후4시 조선일보사 대강당에서 열립니다. 문의 : (02)724-5376, (02)724-53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