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카드가 대학사회로 깊숙이 파고들면서 빚더미에 휘청거리는 대학생들이 속출하고 있다. 손쉽게 만든 신용카드로 과소비를 즐기다 한순간에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힐 위기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서울 S대 오모(20)씨는 지난 1월부터 2월 말까지 두 달간 인터넷 성인방송 IJ(인터넷 자키)로 일했다. 반라(半裸) 상태로 네티즌들과 대화를 나누고 춤도 추는 ‘사이버 에로배우’라는 민망한 일이었지만, 500여만원의 신용카드 빚을 갚기 위해 딱 두 달만 이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발단은 작년 8월 가두 판매원의 권유로 만든 S카드였다. 오씨는 “남자친구와 함께 옷 사고 유흥비를 쓰다보니 석 달 만에 500여만원을 빚졌다”고 했다. 경기도 안양에서 피아노학원을 운영하는 홀어머니에게 손을 내밀 수 없어 ‘월 250만원 소득, 카드빚 해결사’라는 인터넷 성인방송 광고를 보고 IJ를 시작했다. 성인방송 매니저 김모(31)씨는 “여대생들이 카드 빚에 시달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광고를 냈는데, 하루 10여명의 여대생들이 문의해온다”고 말했다.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온 명문 K대 경영학과 김모(21)씨는 어머니 명의로 만든 신용카드를 술집 등에서 함부로 써 160만원의 카드빚을 졌다.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집안에 손을 내밀기도 힘든 김씨는 작년 여름부터 6개월 동안 ‘호스트바’의 남자 접대부 생활을 택했다.
대부분 부모들이 연체료를 갚아주긴 하지만 일부 학생들은 카드빚 때문에 가출하거나 유흥업소·공사판 등으로 내몰리기도 한다. 지난 1월에는 경남 마산에서 C전문대 강모(여·25)씨가 1500만원의 카드빚에 몰려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카드사들은 수입 증명이나 부모 동의조차 없이 대학생들에게 카드를 발급해주고 연체가 생기면 부모들에게 대납을 독촉한다. 학부모 이모(50·경북 경주시)씨는 작년 7월 딸 김모(19)씨의 밀린 카드 대금 347만원을 갚으라는 한 카드사의 독촉을 받았다. 이씨는 “내 동의도 없이 딸에게 카드를 발급해주고 대신 갚으라는 법이 어디 있느냐”며 소비자보호원에 민원을 내 취소 합의를 받았다. 하지만 딸은 지난해 8월 가출한 뒤 지금껏 소식조차 없다. 이씨는 “이럴 줄 알았으면 대신 갚아주는 건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지난 4일 조선일보가 여론조사 전문기관 엠비존에 의뢰해 전국의 대학생 500명을 상대로 한 조사 결과, 대학생의 61%(305명)가 신용카드를 가지고 있으며 이 중 연체경험이 있는 학생이 29.5%에 달했다. 3개 이상의 카드를 가진 학생도 4명에 1명꼴(25.6%)이었다. 이는 대학생 카드 소지자가 40.8%에 이르고, 이 중 연체경험이 있는 학생이 20.8%에 달한다는 작년 5월 서울 YMCA의 조사 결과보다도 크게 늘어난 수치이다.
또 '카드 소지 후 소비가 늘었다'고 답한 학생은 전체의 91%('많이 늘었다' 35.8%, '약간 늘었다' 55.2%)였으며, '줄었다'고 답한 경우는 9%에 불과했다.
연체대금을 갚는 방법은 '본인이 직접 아르바이트를 한다'(53.6%)가 다수였으며, 다른 신용카드로 돌려 막거나(22.4%), 부모가 대신 갚아준다(17.5%), '사채(私債)를 이용한다'(3.8%) 등이 뒤를 이었다.
대학사회가 카드빚에 허덕이는 것은 소득 없는 대학생들에게 카드가 남발되기 때문이다. 카드사들은 비난 여론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고객’인 대학생 고객을 입도선매(立稻先賣)하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다. A카드사 관계자는 “자체 분석 결과, 대학생 회원은 졸업 후 사회에 진출해서도 80% 가량이 처음 발급받은 카드를 ‘메인 카드’로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90년대 후반 의대출신 인턴·레지던트나 졸업을 앞둔 4학년생부터 시작된 카드 유치전이 전(全) 학년으로 확대된 것이다.
카드사들은 “아르바이트 등 고정수입이 있고, 4학년은 곧 취업을 하기 때문에 대학생들도 소득이 있는 것으로 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르바이트 수입이 갑자기 끊기면 이미 씀씀이가 커진 학생들은 자기 절제력을 잃기 쉽다. 대학생 현숙희(24)씨는 “카드를 써본 학생들은 자신도 모르게 과소비의 유혹에 빠져들게 된다”고 말했다. 손쉬운 카드 발급 과소비 아르바이트(수입) 중단 여전한 과소비 카드 대금 연체의 수순을 밟게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부모들이 군생활 중인 사병이나 10대 청소년에게 카드를 지급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공군 헌병대의 한 소대장은 “내무반 사병 10명 중 평균 2∼3명이 신용카드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고교생 이모(17)양은 “한 반에 5명 정도는 부모들이 준 카드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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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되세요.’ ‘세상을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카드.’ ‘능력있는 남자.’
신문·방송 등을 장식하는 각종 신용카드 광고도 젊은이들의 무분별한 카드 사용을 부추긴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黃相旻·40) 교수는 “광고 속에서 신용카드는 소비자를 왕자와 공주로 만드는 ‘도깨비 방망이’로 묘사된다”며 “스타와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젊은이들의 소비심리를 자극할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박찬호·이영애·배용준·정우성·고소영·김정은 등 수퍼스타들이 총동원된 카드 광고는 젊은이들의 소비 욕구를 자극하는 감각적인 영상을 내보내고 있다. 능력있는 선남선녀(善男善女)가 신용카드로 헬스나 여행을 즐기고 카페에서 멋진 연주를 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선물을 사는 ‘보보스(보헤미안과 부르주아의 합성어)’도 항상 결제수단은 신용카드이다. 대학생 백명규(24)씨는 “광고를 보면 카드 없는 대학생이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 되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광고물량도 이동통신에 이어 업계 두 번째이다. 광고업계는 올해 신용카드 광고규모를 지난해 800억원보다 250% 증가한 2000억원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동통신사 광고비 3700억원에 이은 2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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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에서는 대학생이 자기 명의의 신용카드를 가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미국에서는 소득이 없는 미성년자(18세 미만)는 ‘가족 카드’만 발급받을 수 있다. 이 때도 부모와 협의해 사용한도를 엄격히 제한한다. 소득이 있는 대학생도 통장 잔액 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직불카드’를 이용하게 해 신용카드를 마구 긁어 ‘빚의 늪’에 빠지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고 있다.
미국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이런 엄격한 규칙을 적용했던 것은 아니다. 지난 60년대, 미국 역시 카드사들의 회원 유치 경쟁과 그에 따른 부작용을 겪었다. 무분별한 카드발급에 따른 신용불량자 문제가 비화되자, 미국 정부는 신용카드 소비자보호법규에 ‘50달러 룰(rule)’을 만들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즉, 무자격자에 대한 카드발급, 카드 분실·도난에 따른 제3자의 신용카드 무단 사용 등의 문제가 생겼을 때, 회원 본인은 최고 50달러만 책임지고, 나머지는 카드사가 부담하도록 한 것이다. 이후 대학생·미성년 회원을 둘러싼 모집 경쟁은 자연스레 가라앉았다.
일본에서는 직업이 없는 사람이나 가정주부, 미성년자에 대해서는 신용카드 발급시 반드시 세대주나 친권자(부모)의 동의를 얻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또 소득이 없는 사람의 경우 신용카드 발급을 엄격히 규제하고, 카드 신청자의 개인 신용정보도 철저히 확인하기 때문에 대학생이 신용카드를 발급받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독일의 경우도 신용카드를 발급받으려면 먼저 은행에 계좌가 있어야 하고, 이 계좌를 통해 정기적인 수입이 있다는 증거를 보여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