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혁명적 전통'을 강조하는 중국 헌법을 읽다보면 눈길이 멈추는
구절이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각 민족은 모두 평등하다. 국가는 각
소수 민족의 합법적 권리 및 이익을 보장하며 각 민족의 평등, 단결,
상호 원조의 관계를 유지 발전시킨다. 어떤 민족에 대해서도 차별 및
억압을 금지하며 민족 전체의 단결을 파괴하거나 분열을 선동하는 행위를
금지한다."

'선연한 울림'을 즐겨 찾는 문학평론가 김윤식 교수는 이 문구를 일러
태고에서 이어지는 '현실성'과 '역사성'을 보장하는 조항이라고
했다. 그 현실성과 역사성의 본질은 중화(中華)사상이다. '민족전체'란
국가를 의미하고, 국가의 핵심은 중화의 신성불가침이다. 헌법이
소수민족의 권리를 보장한 것은 현대판 오랑캐의 놀이터를 장성(長城)
안에 마련해 준 것뿐이다.

이렇듯 중국 헌법 4조는 소수자의 인권 보장이 아니라 다수자의 노골적인
협박일 수 있다. 망명중인 중국 작가 가오싱젠(高行建)의 2000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영혼의 산」(靈山·1990)은 중화의 뿌리가
소수민족일지도 모른다는 발상 때문에라도 불온의 낙인이 찍히기
충분하다. "당신은 영혼의 산으로 떠나는 길을 찾고 있고, 나는
양쯔강을 따라 거닐며 진리를 찾고 있다." 영산 찾기, 인류의 '시원을
찾는 상상적 여행'으로 불리는 주인공의 여행은 티벳 고원, 스촨분지 등
변방지역에서 이루어진다. 강(羌)족의 산가(山歌) 민요, 무속의식 등
정통 중국사회가 경멸하던 변방문화가 중화의 무대에 함께 판을 벌인다.

일찌기 일본 작가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의 '돈황'에서 느끼던 묘한
이국성 그리움을 되살릴 수 있다. 그러나 '영혼의 산'은 작품과 작가가
상징하는 반체제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중국적 전통에 충실한
작품이다. 그것은 통합적 세계관의 표출이다. 서정, 서사의 구분 없이
감성과 이성을 함께 담는 유연함, 천지인(天地人), 유불도(儒彿道),
시서화(詩書畵)를 통합하는 커다란 세계관, 고대 문명 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황하문명의 빛나는 특성이 이 작품에도 선연하게 배어있다.
전문화의 이름으로 미세한 분화만을 거듭한 나머지, 파편 쪽으로 전락한
이 땅의 학문과 예술을 한 입에 삼켜버릴 듯한 위압감마저 든다.

가오싱젠의 후속작품 「나 혼자만의 성경」(一個人的 聖經·1999)은
천안문 사태 이후 법과 인권의 문제를 은근하게 부각시키는 작품이다.
청년시절 일용한 양식이었던 절망과 분노의 기억으로 쪼그라든 일상의
탈출구를 찾는 이 땅의 '왕년의 민주투사'나 '맑스 걸'들에게
그리움의 동감을 일으키기 충분하다.

1999년 중국헌법에는 '이법치국('以法治國')이라는 문구가
추가되었다. 법으로 다스리는 나라인지, 아니면 법이 다스리는 나라인지
한참이나 지켜보아야 할 일이다. 아직은 법은 장식물에 불과하고 법 위에
인민의 뜻을 헤아리는 사람이 우뚝 서 있다. 이러한 인치(人治 )전통은
강력한 중앙정부를 도모해온 역사의 산물이기도 하다. 중화(中華)란
천자가 사는 곳, 인치란 황제가 하늘로부터 위임받은 천명이고, 그
하늘의 실체는 맹자의 말대로 백성을 의미했다. 당(唐)과 명(明)의
예에서 보듯이 강력한 중앙정부 아래 이 나라는 번성을 누렸던 것이다.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거대한 이 나라는 청조 말 유입된 서구의 민주주의
사상이 초래한 무질서의 대가를 크게 치렀다. 공산당의 부상으로 비로소
균형 있는 역사의 방향타가 바로 잡혔다고 절대다수의 인민은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정치적 불안이다. 그래서
무질서보다 차라리 불법을 선호한다. 그 중화의 땅, 한 구석에 잠시
한류(韓流)의 파고가 일다말고 가라앉고 있다.

우리의 '선진' 문화가 대륙을 정복했노라고 흥분하던 문화부장관의
방담이 민망스럽다. 예로부터 가무를 즐기던 '동쪽 오랑캐'의 재주를
대견스러워 하는 천자의 후예들의 오만스런 여유였을 뿐이다. 축구경기나
황사가 문제가 아니다. 엄청난 역사의 무게가 실린 통합적 지식, 그 위에
중국 헌법 4조가 한반도를 내려보고 있다. 중국을 바로 보아야 한다.

( 안경환·서울법대 교수·한국헌법학회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