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수가 살던 초가.병조참판을 지낸 권력 실세였으나 만년에 고향에서 검소한 생활을 했다.<a href=mailto:kyg21@chosun.com>/김영근기자 <

공동전답 만들어 재산축적-분배…함께 잘사는 사회 실현 ##

조선시대 호남지역을 여행할 수 있는 큰 길은 두 갈래였다. 하나는 전남
강진에서 나주, 김제를 거쳐 전북의 삼례로 올라오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여수.순천에서 시작하여 남원을 거쳐 삼례로 오는 길이었다.
전자는 전라우도를 관통하는 서편제의 길이었고, 후자는 전라좌도를
관통하는 동편제의 길이었다. 서편제의 길에서 가장 인심이 후했던 집
가운데 하나가 김제군 금구면 서도리(西道里)의 인동 장씨들 집이었다고
한다면, 동편제의 길에서 소문났던 집은 남원 호음실(虎音室)의 죽산
박씨 집이었다. 여관과 호텔이 없었던 조선시대에 호음실의 박씨 집과
서도리의 장씨집은 여행객들이 부담 없이 여장을 풀고 쉬어 갈 수
있을만한 만석꾼 부자집들 이었다.

서도리의 장씨들이 부를 축적하기 시작한 시기는 통정대부를 지냈던
행재(杏齋) 장석보(張錫輔·1783~1844)의 네 아들 때부터이다. 네 아들이
재산을 모은 방법이 독특했다. 매년 농사를 지을 때 로테이션으로 한
집씩 집중하는 방식을 택했다. 예를 들어 올해는 큰 아들집의 농사를
나머지 세 아들이 집중 지원하였다면, 내년에는 둘째 아들집의 농사에
나머지 세 아들이 집중하는 식이었다. 이런 식으로 노동력과 자원을
효율적으로 집중한 결과, 자본 축적에 가속도가 붙어 재산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이는 형제간의 철저한 신뢰가 없으면 불가능한 방법이다.
아무리 형제간이라고 해도 신뢰가 없으면 자기 편리한 대로 약속을
어기는 법인데, 이 4형제들은 로테이션 약속을 철저하게 지켰던 것이다.
그 신뢰의 밑바탕에는 어머니인 남양 홍씨의 가르침이 크게 작용했다.
남양 홍씨가 네 며느리들에게 신뢰를 지키면서 살도록 당부하는
문헌(1840년 작성)이 지금까지 가보로 내려오는데서 그 가풍을 짐작할 수
있다. 장씨들은 우애와 신뢰를 중시하는 집안의 가풍이 이 할머니로부터
비롯됐다고 생각하고 지금도 제사 때가 되면 특별하게 예를 갖춘다.

4형제는 다시 8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 8명의 자식들은 각자의 재산을
조금씩 모아서 '의장'(義庄)이라는 제도를 만든다. 의장이란 문중의
공동 전답을 일컫는다. '의장' 제도는 중국 북송의 명재상이었던
범중암(范仲淹)이 처음 창설한 제도로 제전(祭田)과는 그 용도가 달랐다.
제전이 문중의 제사를 지내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목적의
공동재산이었다면, 의장은 제사 외에도 문중의 가난한 사람을 경제적으로
도와주기 위한 공동재산이었다. 부의 재분배를 위한 장치였다고 보면
된다.

「장씨의장서(張氏義庄序)」라는 문건을 보면 장씨들의 의장은 처음
시작할 때는 쌀 40석에 불과하였지만 시간이 흘러 후손으로 내려오면서
그 규모가 200석으로 늘어났고, 나중에는 1,000석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돈이라는 것이 처음 모을 때가 어렵지 어느 선을 지나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마련이다. 장씨들은 의장이 수백석 규모로
축적이 되자 '부의 재분배' 작업에 들어갔다. 그 방법은 매년 문중
제사를 담당하는 역할을 하는 유사(有司)를 한 명씩 뽑아 그 유사에게 쌀
3-4백 석의 재산을 기증하는 방법이었다. 유사를 매년 새로 뽑았으니,
해마다 300-400석의 부자가 한 명씩 탄생한 셈이다. 그래서 나온 말이
'제사 한번 지내고 나면 부자 나온다'였다. 문중의 유사를 정할 때는
항렬이 아닌 나이 순서였다고 전해진다. 나이 많은 사람을 먼저 유사로
정했던 것이다. 드디어 1900년을 전후해서 서도리의 장씨들은 모두
부자가 됐다. 비록 문중이라는 한계는 지니고 있었지만, 의장 제도는
'부의 재분배'를 통해서 장씨들 모두가 잘살게 되는 이상적인
장치였다.

그 부는 행재공의 후손들이 거주하였던 서도리 아랫동네에 30여 가구의
기와집으로 나타났다. 대지가 각각 500평에서 1000여평의 규모에, 건물은
접집(건물 앞뒤로 마루가 있는 집)의 형태로 된 30칸에서 60칸 크기의
저택들이 밀집된 상태였다. 30여가구의 각각 재산을 보면 적게는
3~400석에서 많게는 1만석을 가지고 있었다. 장씨들 30여 가구의 재산을
모두 합하면 약 3만석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정도면 그당시 서도리는
호남 최고의 부자동네가 아니었나 싶다. 그러다보니 전라우도를 여행하는
과객들이라면 빠지지 않고 묵어가는 명소로 소문이 퍼졌다. 서도리의
위치도 정읍에서 삼례로 올라가는 호남대로의 바로 옆에 붙어 있어서
교통도 편리한 지점이었다. 거의 사흘마다 소 한 마리씩 잡아서
과객접대에 힘썼다고 한다. 심지어는 과객들 사이에서 '노자돈 떨어지면
서도 장씨 집에 간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동네의 구조도 특이했다. 30여 가구가 각각 독립된
가옥이면서도 담장 중간에 중문을 설치하여서 30여 가구가 서로
연결되었다. 한 집에 들어가면 중문을 통해서 다른 집으로 쉽게 건너갈
수 있는 구조였던 것이다. 부분과 전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구조이기도 하였다. 만약 과객이 한 집에 몰리는 상황이 발생하면 쉽사리
다른 집으로 분산 배치가 가능하였다. 이처럼 효율적이면서도 개방적인
동네 구조를 형성하기까지에는 홍씨 할머니 이래로 이 집안에 내려오는
'공동체 정신'과 '의장'이라는 경제적 분배 장치가 크게
작용하였음은 물론이다.

오가는 과객들이 부담 없이 머물던 장석보 종가.

1894년의 갑오 동학농민혁명때에 장씨 들이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이유도 평상시의 적선도 적선이었지만, '종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
'없는 사람 천대 말라'는 장씨들의 처신 때문이었다는 게 중론이다.
서도리는 동학의 최초 집회지인 김제의 원평읍과 불과 십리 정도밖에
안되는 거리이다. 동학농민군의 집강소는 금구에 있었다. 태풍의
한가운데 있었음에도 온전했음을 알 수 있다. 6.25때도 마찬가지이다.
모악산에 아지트를 두고 있던 빨치산들이 금구읍내의 면사무소,
농협조합, 우체국을 모두 불지르면서도 불과 1㎞ 옆에 위치하고 있었던
서도리의 장씨 집들은 손대지 않았다고 한다.

일제 치하로 들어가자 장씨들의 재산은 문중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사회로 환원되기 시작하였다. 행재공의 종손이면서 만석꾼이었던
장현식(張鉉植·1896~납북)은 중앙고보를 설립할 때 총재정의 50%를
담당했다. 그래서 중앙고보의 이사장을 지냈다. 중앙고보의 농장이 전북
신태인에 있었는데, 1000석 규모의 이 농장도 장현식이 기증한
재산이었다고 전해진다.1919년 비밀결사인 대동단이 창단되자 그
운영자금을 대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1942년 발생한 '조선어학회사건'에도 참여한다. 참여방식은
조선어학회의 활동자금을 대는 일이었다. 그는 1000석의 돈을 지원한
대가로 함흥교도소에서 2년간 복역했다. 이런 사회환원과 해방 이후
토지개혁으로 인해서 장씨 집안의 재산은 사라졌지만, 전라우도의 식자층
사이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서도리 장씨들의 의장제도와 과객들에게 소
잡아 주던 인심이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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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씨집안 유일한 초가
대원군때 병조참판 지낸 장태수가 거처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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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기와집을 지니고 살았던 서도리 아랫동네에서 유일하게 소박한

초가집이 한 채 남아 있다. 일유재(一▩齋) 장태수(張泰秀:1841-1910)가

벼슬에서 물러나 말년에 살았던 거처이다. 대원군의 신임을 받았던

당시의 권력 실세로서 병조참판을 지냈지만, 고향에 내려와서는 검소하게

살았다. 그는 실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랫사람과 종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런가하면 벼슬살이 도중에도 고향에 내려오면

종가집의 사랑채가 아닌 문간 행랑채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청상과부로

살고 있던 종부를 지키고 공경한다는 의미에서 일부러 하인들이 자는

행랑채에서 잤다. 매사에 상대를 배려하고 겸허했던 그의 처신은

장씨들이 자칫 졸부로 전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였고,

동학혁명 때에도 농민군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했다. ‘한번 웃는다’는

뜻의 해학적인 호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해학적으로 살지 않았다.

경술국치를 당해서 망국의 책임을 느끼고 27일간의 단식 끝에

자결하였다. ‘부귀는 얻기 쉬우나 명절(名節)은 보전하기 어렵다’는 게

그의 평소 신념이기도 하였다.

( 趙龍憲·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