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시 수성구 수성1가 신세계타운의 대구시장 관사로 들어가는 경비실
근무자는 나이 지긋한 중년이었다. 그는 『내가 이 아파트의 다른 경비실
근무자보다 10배는 바쁠 것』이라고 말했다. 아마 시장 관사때문에
신경이 더 쓰였기 때문이리라.
시장 관사로 들어가니 여느 아파트와 크게 다름없으나 깔끔함이
돋보였다. 그러나 일상생활에 사용되는 집기 등이 많이 갖춰지지 않아
다소 썰렁했다. 아직 서울에 있는 살림도구를 옮기지 못해 그런 것이라고
조해녕(曺海寧·59) 대구시장의 부인 김옥희(金玉姬·59)씨가 설명했다.
조 시장은 다음날의 조회에 쓸 자료를 챙기기 위해 컴퓨터를 사용하는
중이었다.
조 시장은 흰색의 생활한복을, 김씨는 짙은 황토색 저고리와 치마로 된
한복을 각각 입고 있었다. 집에서는 즐겨 입는 차림이라고 했다.
두 사람은 경산와촌초등학교 동기동창인데다 부친들이 가장 절친한 친구
사실.『우리들이 뱃속에 있을 때 두분 어른들이「우리 서로 사돈하자」고
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런 소문이 초등학교 친구들 사이까지 퍼졌지요.
대학졸업때가 되자 저 사람이 저에게 프로포즈했고, 몇번 만나면서 「저
사람이 평생을 같이 할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결혼에 골인하게
됐습니다.』
김씨의 말에 조 시장이 다소 멋쩍어 하는 표정으로 『대학 졸업때 문득
저 사람 생각이 나서 데이트 신청을 했지요. 그 전에도 「내
사람」이라는 생각은 은연중에 했습니다.』
부인 김씨는 옛 효성여자대학교(현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 약대 출신
약사. 결혼전 당시 경북도 위생시험소에서 4년여를 약품함량검사 등을
담당하는 업무를 하다 결혼과 함께 그만뒀다. 그리고 40살이 넘어 서울
강남구 보건소에서 잠시 약사생활을 한적도 있었다. 얼마전 서울에서
인생의 후반을 봉사활동으로 보내겠다는 뜻에서 약사 신고서를 내고
약국개업을 준비하다 남편의 시장당선으로 뜻을 접어야 했다.
조 시장 부부 사이에는 딸 기정(32)씨와 아들 석준(30)씨를 뒀다.
기정씨는 지난해 결혼했고, 석준씨는 현재 미국 로체스터 대학교에서
부인과 함께 박사학위를 밟고 있다. 전액 장학금은 물론 생활비까지
지급받는 좋은 조건이라는 설명이다.
먼저 부인 김씨에게 질문을 했다.
-조 시장이 내무 관료생활을 오래 했고 내무부장관 등을 역임했다. 다시
대구로 온다는 생각은 해봤는가.
『그런 생각은 전혀 할 수 없었다. 그동안 남편이 공직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여러 지방으로 돌아다니던 때도 있었고, 장관 생활을 마지막으로
공직생활은 끝났다. 그래서 대구에 다시 내려갈 생각은 못했는데 이렇게
다시 고향이자 자란 곳인 대구로 내려올 줄이야….』
-대구는 섬유패션의 고장인만큼 패션감각을 무시하고 살아갈 수 없다.
특히 대구시장은 더욱 그럴 것이다. 남편의 패션에 점수를 준다면.
『그런 쪽으로는 무신경한 편이지만 옷을 입는 감각은 세련됐다고 본다.
옷이나 패션소품들도 별로 없다. 저 역시 패션쪽으로는 신경을 안쓰는
사람이라 그런지 제대로 챙겨주지 못해 미안한 생각이 많이 든다.』
-어떤 음식을 잘 먹나
『아무거나 잘 먹어 다행이다. 특히 된장찌개와 김치를 좋아한다.』
(조 시장은 여기에 흔쾌히 동의했다.)
이번에는 질문을 조 시장에게로 돌렸다.
-고교와 대학시절에는 특히 수영을 즐겨했고, 선수로까지 나갔다는데…
『수영을 어릴 때부터 즐겨했다. 수영 선수로까지 활동했다. 대학
들어가서는 록클라이밍을 광적으로 즐겨했다. 그러다 6·3한일국교정상화
반대시위의 주모자로 쫓겨 다니는 등 심신이 지쳐 있었는데다 결혼을
하면서 더 이상 하지 못했다.』
-경북고 재학시절에는 4·19의 도화선이 된 2·28의거, 서울대 재학때는
6·3시위의 주모자로 각각 찍혀 수배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고 들었다.
『고교때는 6인 수배자중의 한사람으로, 대학때는 연설문도 쓰고
학생회장 신분으로 당시 이효상 국회의장과 면담을 하는 바람에 쫓겨
다녔다. 한마디로 고난의 역정이었다. 그런 것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하는
원동력이었지 않았나 한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특히 문화시장이 되겠다고 강조했다. 혹시 말만으로
그치는 립서비스가 될 가능성은 없는가.
『문화를 이야기 하자면 당사자가 문화쪽으로 마인드를 가지고 그런
생활을 해야 한다. 서울에서 공직생활을 할때는 음악회와 전지회는
열심히 쫓아 다녔다. 특히 점심시간을 이용해 세종문화회관에서 하는
전시회는 거의 빼놓지 않았다. 아내가 바리톤 최현수씨를 좋아 하기
때문에 음악회도 부지런히 갔다.』
-그렇다면 문화와 관련해 앞으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20세기가 산업화와 개발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정보화의 시대다. 대구의
경우 가장 시급한 것이 대구의 원류를 찾는 일이라고 본다. 서울대
조동일 교수는 우리 민족혼을 크게 진작시킨 3명의 인물이 있었다.
원효대사, 일연선사, 수운 최제우 선생 등이 그들인데 600년 간격으로
세상에 나타났다. 그런데 이들이 경산과 경주 등 대구 인근의
사람들이다. 요즘 대구가 정신사적으로 폐쇄주의, 반목과 갈등이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대구의 원류를 찾아 재조명하고 이를 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앞으로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마련해 보겠다.』
-지금까지 문화와 관련된 부분에 대한 투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도로나 교량을 건설하는 예산의 10분의 1만 있어도 문화예술인들이
원하는 사업을 해결할 수 있었다.
『미국이 현재와 같은 재도약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문화인프라에 대한
과감한 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10여년동안 400여개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건립했고, 결국 그것이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앞으로 50년간은
미국의 주도가 계속될 것이다. 우리도 방향이 옳으면 그렇게 나가야
한다.
그동안 발전과 팽창에 주력하다 보니 세련됨에서 조금 소홀했다. 앞으로
나무를 많이 심더라도 미적감각을 고려해 하겠다. 또 대형 빌딩 등을
건설할 때도 사전에 미관심사를 해서 도시의 미적감각을 높이겠다.』
-대구의 발전 방향은.
『대도시가 무한히 팽창한다는 오해는 불식돼야 한다. 그 결과가
수도권집중으로 나타난게 아닌가. 대도시의 팽창은 자제하고 위성도시의
SOC(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를 강화해야 한다. 대구에서 김해와 포항
등 바다로 통하는 두 고속도로는 국책사업으로 조기완공하고 지하철은
장기적으로 3·4호선이 건설돼야 한다. 그리고 대구는 영남권의
중추도시로서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위천국가산업단지의 조성표류 등으로 대구가 발전하는데 장애가 되고
있다.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위천공단 문제는 결국 상류와 하류간 주민들의 물에 대한 인식의
문제다. 이와 관련 지난 93년부터 위기의식을 느껴 한강과 낙동강을
도수로로 연결해 낙동강의 물부족사태를 해결하자는 방안을 제시한바
있다. 현재 예산상의 문제와 시행가능성 등 때문에 표류하고 있지만 정부
차원에서 이를 과감하게 수용할 필요가 있다. 수량과 수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획기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시행해야 한다.』
-지방자치도 상당히 정착단계에 와 있다. 시장은 물론이고 공무원들의
마인드도 획기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지방자치가 시행된지 7년이 넘었다. 공무원들의 경우 사고가 많이 변한
것은 사실이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아직도 중앙집권때의 사고방식을
유지하는 부분이 많다. 어떤 정책이 시행됐을 경우 중앙에서 지침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만 하지 말고 지방에서 과감하게 이를
시행하고 문제가 있다면 시정을 건의해야 한다. 이제부터 정책관료가
돼야 한다. 또 민선시장이 행정에 일일이 간섭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본다. 위임할 것은 위임하겠다.』
마지막으로 시장 부부에게 물었다. 애창곡이 뭐냐고.
조 시장은 「과수원길」과 「갈대의 순정」, 부인 김씨는 잠시
망설였으나 조 시장이 주현미의 「신사동 그사람」이라고 대신 말해줬다.
노래실력을 물으니 조 시장은 자신이 없었고, 김씨는 「보통」이라고
했는데 조 시장이「상당한 실력」이라고 정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