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KBS 2TV 드라마 '장희빈'의 제작현장인 경복궁. 추위로 덜덜
떨면서 담요를 뒤집어 쓴 김혜수가 금세 장옥정의 얼굴이 됐다. 눈을
치켜뜨고 목소리를 내지르며 나인을 닥달한다. 이날 촬영에서 장옥정은
정2품에 해당하는 '소의(昭儀)' 첩지를 받았다. 무려 네계단을
뛰어오르는 파격 승진인 셈이다.
그런데 드라마 속의 화려한 출세와 달리, 요즘 김혜수의 마음은 편치
않다. 지난해 11월 방영 초만 해도 20%를 웃돌던 '장희빈' 시청률이
10% 아래로 주저앉았기 때문. 게다가 시청자 게시판에는 "요부가 아니라
아기돼지 같다" "장희빈 얼굴이 '달덩이'냐" "숙종이 왜소해
보인다" 등 캐스팅이 잘못됐다는 의견이 하루 100여건씩 오르고 있다.
김혜수는 "데뷔 이래 가장 혹독한 비판을 받고 있다"고 했다.
'장희빈'은 그에게는 첫 궁중사극. 선뜻 출연을 결심한 것은 그녀에게
모험이었다. 잦은 야외촬영으로 몸살에 걸려 한달 반 동안 몸져 눕기도
했고, 서슬 퍼런 겨울 추위 속에 목욕신을 촬영하는 등 고생도 많았다.
김혜수는 "매주 시청자 게시판을 볼 때마다 '오늘은 무슨 야단을
맞을까' 가슴 졸인다"고 했다.
"제가 전형적인 장희빈 이미지와 거리가 있다는 건 알아요.
'요부'로만 규정돼 온 장희빈을 새로운 여성상으로 조명한다는 데 끌려
출연했고요. 하지만 제 이미지가 드라마 전체에 영향을 주리라고는
생각치도 못했어요."
그래도 그는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과거의 '악녀'를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한 책들도 들춰보고 KBS TV '역사스페셜'도 보면서 자료를
수집한다. 시청자 게시판도 꼼꼼하게 살펴본다. 김혜수는 "시청자들의
객관적인 비판은 받아들이되, 비판을 넘어서 제대로 연기를 해
보이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이영국 PD는 "장희빈이 드라마 속에서
'끗발'을 날리게 되면서 김혜수 연기의 진가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조기종영은 없다"고 말하는 제작진의 분위기가 자못
비장했다.
이제 드라마는 당쟁 속에서도 왕권을 유지하면서 상평통보를 주조하는 등
사회제도를 정비한 숙종의 정치사적 업적을 집중 부각시킨다. 궁중의
암투 속에서 장옥정은 회임을 하고, 최고 권좌를 향해 승승장구
나아간다. 총 100부작 중 30편을 갓 넘긴 지금, 김혜수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드라마가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연기자의 진가가 나온다잖아요.
작가와 제작진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연기자가 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