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버스에서 발을 구르면서 부르는 어머니들, 아주머니들 노래를 통해서
'낭만'을 떠올릴 수 있을까. 그건 차라리 아우성이라 해야 할 듯하다.
우리 어머니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셔서 천만 다행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겨울철이면 동네 아주머니와 처녀들이
밤마다 우리집 큰 방에 모였다. 큰 이불 아래로 모두들 다리를 넣고 앉아
고구마를 먹으면서 돌아가며 노래를 불렀다. 어머니는 차례가 오면
어김없이 "운다고 옛 사랑이 오리오만은…"으로 시작되는 '애수의
소야곡'이나 "연분홍 치마가…"로 시작되는 '봄날은 간다'를
불렀다. 늘 이 두 노래만을 번갈아 부르셨다. 워낙 활달하신 분이긴
했지만, 그 당시 젊은 아낙이 어떻게 '용감하게도' 그런 노래를 부를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린시절 어머니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혹시 어머니가 처녀 시절에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이런 노래를 부르시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어머니는 얼마나 낭만적인 청춘을 보내신 걸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했다. 하지만 낫 놓고 기억자도 못쓰는 아버지와 중매로
결혼하신 어머니로선 그냥 그 노래의 가사를 무작정 좋아하셨던 것 같다.

어머니는 해남 윤씨 뼈대 있는 가문에서 자라 안동 권씨 집안으로
열일곱살에 시집 오셨다. 일제, 광복, 6·25, 4·19, 등 격변을 겪으며
한 집안의 기둥으로 희생만 하신, 전형적인 우리시대의 어머니이시다.
박정희 정권 때에는 4남 1녀의 학비를 대느라고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양주를 가져다가 남대문에서 몰래 장사하신 적도 있다.

양주가 한 박스면 열 두병인데
그걸 몸 속에 감춰 당시 코로나 택시를 타면 몸의 무게 때문에 차가
한쪽으로 기울 정도 였다고 한다. 그러면 운전사가 몸에 양주를 숨긴
것을 눈치채고 "파출소로 모실까요? 세관으로 모실까요?"하면서 약을
올렸다고 한다. "그 때마다 어찌나 간을 태웠던지…" 하시던 말씀은
언제나 머릿속에 생생하다.

그렇게 살아오신 어머니가 올해 여든 넷이 되셨다. 말씀하시는 것도,
몸을 움직이시는 것도 예전과 너무도 다르다. 아들중 누구하나 선뜻
모시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어 그냥 장남인 내 집에서 사시며 하루
하루를 견뎌 내신다. 나라도 잘나서 호강 시켜드리면 좋으련만 그러지
못해 마음이 아프다. 어머니 복이 어찌 이뿐이실까?

이제는 힘이 없으신지 "운다고 옛사랑이…"나 "연분홍 치마가…"를
부르시는 것을 좀처럼 듣지 못했다. 청춘도 고생도 세월이 다 먹어버렸나
보다. 어머니, 서운한 생각, 섭섭한 생각, 다 버리시고 세상 끝나는
날까지 건강하게 사십시오. (권성덕·연극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