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진’ ‘그것만이 내 세상’이 담긴 록밴드 들국화의 제1집은 한국록음악 40년사상 명반 1위로 꼽힌다. 들국화의 리드싱어 전인권 등이 ‘행진’에서 “나의 과거는 어두웠지만”이라고 노래할 때 많은 이들은 정치적으로 어두웠던 1980년대를 떠올렸고, “나의 미래는 항상 밝을 수는 없겠지”라고 노래할 때 불투명한 미래를 고민하던 청년들은 단번에 이들의 음악에 매료됐다. 들국화의 첫 음반은 강력하고 중후한 록 음악을 즐기는 매니아들과, 서정적이고 섬세한 가요 팬들을 동시에 만족시켰고 당시로서는 드문 8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가수 전인권(50)씨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니 "삼청각 전통 찻집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는 삼청동 단독주택에 딸·아들과 함께 살고 있고, 거의 매일 북악산에 오른다고 했다. 감사원쪽에서 성균관대로 올라가 성곽을 타고 산을 다니며 체력을 다진단다.
부풀어오른 파마 머리와 검은색 정장, 검은색 선글라스 차림으로 나온 그는 '전인권'다웠다.
―1982년 들국화를 결성해 1집으로 젊은 이들의 가슴을 뒤집어놓았었는데.
“당시는 시대적으로 보아 군부통치와, 이에 운동권이 맞서면서 사회가 암울하고 모든 것이 불투명한 시대였지요. 또 한국이라는 나라는 ‘우물 안의 개구리’였던 시절이었지요. 우리말로 팝송을 듣는 듯한 코드와 가사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우리의 음악은 마치 청량음료나 폭포 같았을 겁니다. 음악이 아니라 일종의 현장이나 사건과 같은 것이었지요.”
―록음악은 어떻게 시작했는지.
“원래부터 록이었어요. 18세때 처음 대마초를 배우고 닐 영의 ‘하트 오브 골드(Heart of Gold)’를 부르는 데 그렇게 잘 불러지더라고요. 들국화의 다른 멤버들과는 많이 차이가 났어요. 이 친구들은 사회 구성원이 되고 싶어했고, 나를 감당하기 어려워했지요. 나는 자기 것 남의 것 없이 산에 다 함께 살면서 산에서 벌어지는 환상을 음악에 담는, 그런 걸 바랬어요.” 그는 당시의 자신을 “테크닉도 없는 놈이 음악적으로 깊이 들어가있었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1987년 5월 해체된 들국화의 영예는 짧기만 했다. “80만장 가까이 팔렸지만 우린 너무 지쳤고 돈도 없었어요. 제작사가 가수 키우고 벌어먹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지요. 장삿꾼들이란 건 뻔하잖아요.” 그래서인지 록 음악을 하는 후배들을 보면 “늘 애틋하다”고 했다. “너무도 작은 길을 애써서 가는 걸 보면 멋있게 보여요. 그런 길을 뚫고 계속 가려는 모습을 보면 애틋하고 ‘동지’라는 생각이 들지요.”
전인권은 14년만에 독집 앨범 '다시 이제부터'를 지난 4월에 출시했다. 그는 김민기가 과거 내놨던 노래 '봉우리'를 첫 곡으로 골랐다.
"3년전 (김)민기 형님이 '이 노래 한번 해보라'고 했어요. 듣는 순간 '아 이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최고는 없고 우리가 인간답게 땀흘리며 부지런하게 사는 게 '봉우리'라는 메시지가 좋았지요."
김민기씨는 지난 1999년 전인권씨가 필로폰을 투약한 혐의로 구속기소됐을 때 “전인권 같은 실수투성이 후배를 도와 세상에 무언가 밀린 빚을 갚고 싶다”는 탄원서를 쓰기도 했다. 전씨는 그런 김씨를 두고 ‘최고의 존재’라고 말했다. “민기형처럼 부지런하게 사는 사람이 없어요. 지금도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매일 연습시키고. 다른 사람들은 ‘인간 결벽증’이라고 말하지만 저는 그분의 나약하고 여린 부분, 가장 인간적이고 진실된 부분을 알고 있어요. 그런 그의 모습이 노래 ‘봉우리’에 그대로 담겨있어요.”
이번 음반에는 과거 ‘행진’ ‘그것만이 내세상’ 등 그만의 ‘전매특허’인 야성적 포효는 많이 줄었다. 대신 ‘코스모스’ ‘다시 이제부터’ 등 감성적인 느낌이 많이 부각됐다. 20년의 결혼생활을 작년에 끝내며 이혼의 슬픔이 밑거름이 됐다고 한다. “아내에게 하고 싶었지만 못한 이야기를 ‘떨어지는 꽃잎’ 같은 노랫말로 솔직하게 하고 싶었어요. 나이를 먹으면서 나이에 맞는 사랑을 하는 건 모르겠지만, 이상을 원한다면 서로 불편하고 두려울 때도 있지요.”
그는 “가능한한 이혼을 권하고 싶지 않다”고도 했다. “저는 자유로운 사람인데 그건 또 외롭다는 거지요. 딴 사람이 간 길이 아니라 안 갔던 길을 가니까, 무시무시한 외로움에 시달리고 때론 공포스럽기까지 하잖아요. 그동안 가정이 있어서 나를 버티게 해줬는데 가정이 파괴됐을 땐 참 힘들었어요.”
잇따른 대마초 파동과 이혼 등 그동안 그는 ‘음악 외적’인 이유로 세인들의 화제에 자주 올랐다. 혹시 그 세월을 후회하고 있진 않을까. “아니요. 뭐든지 열심히 했고 무지 바빴어요. 대마초도 열심히 피면서 음악 공부도 열심히 했고, 벌도 열심히 받았고, 다시 또 일하려고 하면 잡아야하고 했어요.”
오는 24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그는 올해 2번째 단독 콘서트를 갖는다. 이번 공연이 2805회라고 하니 그의 음악 생활 30년으로 나눠도 대략 매년 90여차례 공연한 셈이다. “1992년에 공연카페인 ‘전인권 클럽’을 오픈해서 1997년까지 운영했는데 그때는 하루에 6차례 공연하기도 했어요. 아주 작은 곳이었지만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멤버들과 같은 밥 먹고 월급 받아가며 실용적으로 음악하려고 많은 실험을 했지요. 당시 공연 횟수가 포함된 겁니다.”
하지만 이번 공연을 마지막으로 당분간 단독 공연은 쉬려고 한단다. 전씨는 “소리 하나만 갖고 ‘싸구려 공연’을 한다는 느낌이 들기도 해서”라고 말했다. 6월에 다른 가수들과 함께 무대에 선 뒤에는 “새로운 모양을 만들고 연출해서 공연 스타일을 바꿔야하지 않을까” 고민할 것이라고 했다.
-요즘 대중음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17세의 일기장을 보는 것 같아 무안할 때가 많습니다. 소설에도 일반적인 소설도 있지만 헤밍웨이의 소설도 있잖아요. 인간이니까 질서나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마련인데 헤밍웨이의 소설을 많이 띄웠으면 좋겠어요.”
그는 작년 노무현 대통령 후보 시절 ‘노무현을 사랑하는 문화예술인 모임’에 가입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그때 노 후보가 다른 후보자들보다 ‘촌티’ 나고 보호본능을 일으키게 생겼잖아요. 그래서 공연장에서 ‘젊은 후보가 좋다’고 말했던 것이 전부에요. 마약 전과 4범인데 괜히 나섰다가 안 좋을 수도 있고….”
지금도 가끔 TV에서 정치 토론은 본다고 했다. “국회의원들이 총리에게 쏘아대는 모습이 재미있더라고요. 정치 이야기하면 사실 무슨 이야기인지 하나도 모릅니다. 하지만 토론 프로그램을 켜면 싸울 때까지 기다리지요. 싸우는 모습이 나오면 재미있으니까요.”
그는 강금실 법무부장관과도 인연이 있다. 과거 마약 투약 혐의로 재판 받던 시절, 강 장관이 당시 그의 변호를 맡았다. “이후에도 자주 만났어요. 공연때마다 왔었고 술도 마셨어요. (강 장관은) 변호사 시절 나를 잘 이해해줬어요. 아주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사람이지요. 사람을 편하게 해줄 때는 자신이 먼저 일어나 춤도 추는 면도 있고….” 하지만 “요즘엔 만나면 폐가 될 것 같다”고도 했다.
1953년생인 그도 어느덧 하늘의 뜻을 알 나이인 ‘지천명(知天命)’이다. 턱수염 사이사이로 흰 수염이 드문드문 보였다. 대학을 졸업한 딸은 서양화를 공부하고 있으며 초등학교 6학년생인 아들은 피아노를 치고 있다고 했다.
“남들은 이상하게 보겠지만, 우리 나름대로 룰을 만들어 재미있게 살고 있어요. 아침엔 아이들을 내가 깨우고 저녁땐 전화해서 ‘밥 먹었냐’ ‘어디있냐’고 꼭 물어보니까, 아이들은 믿음을 갖게 돼죠. 딸은 무조건 내 편을 드니까 가족애를 느껴요.” ‘수학 공부도 잘하고 영어도 잘한다’며 아들 자랑을 하는 모습에서 ‘보통 아버지’이다.
"나이 먹기 전엔 40~50대에도 '그것만이 내 세상'을 부를 수 있을까, 어색하지 않을까 걱정이 많았죠. 하지만 지금은 그 나이에 맞는 재미를 찾아요. 또다른 세계가 열리는 기분이죠."
음악을 빼고 나면 아무 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그는 "음악은 나의 낙(樂)이고 사랑 받고 싶은 것이고, 칭찬 듣고 싶고 자랑하고 싶은 것"이라고 했다. 65세가 될 때까지 15년간 음악활동을 열심히 한 뒤에는 세계를 돌아다니는 갬블러가 되고 싶다고도 했다. 인터뷰가 끝날 즈음에야 짙은 선글라스 속에서 그의 눈빛이 보였다. 그가 그린 자화상 속의 눈빛처럼 선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