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소설에 불과한 나관중의 ‘삼국지’가 세월을 거듭하여 베스트 셀러가 되고 있는 까닭은 뭐니뭐니해도 시간을 초월한 인간의 정권욕과 그에 따른 대소사, 그리고 정직성과 교활성 등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경우와 너무나도 정확히 오버랩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가령 유비를 중심으로 했던 촉한(蜀漢)의 세력을 지금 우리 주변에 실존하는 어느 하나의 정당(政黨)쯤으로 축소해 생각해보면 그 답이 빨리 나올 법하다. 예를 들어 공명과 관우의 관계를 말해 본다.
관우(關羽)는 유비당의 핵심 멤버이며 창당 위원이기도 하다. 말발 서는 중진이요, 최고위원의 보수파 수뇌쯤 되는 거물급이다. 게다가 그에게는 문무 겸비라는 강점이 더해져 있고 과묵한 성격과 늘 존경받아 마땅한 인격이 보태져 있다. 그에게는 한 번 당수로 모신 유비에 대해 목숨을 버리더라도 배신할 줄 모르는 충정이 있었다. 조조가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거액의 정치 비자금과 여러 가지 좋은 조건을 제시하며 꼬셨으나 그는 결코 탈당하여 조조당으로 이적하지 않았다.
유비가 서촉에서 왕잡고 나서 내려준 ‘당5인 최고위원’이라는 직함도 황충, 마초 등과 같은 서열이라하여 달가워하지 않았을 정도로 관우의 우월감과 자존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손권이 정략결혼의 아이디어를 짜내어 자기의 아들과 관우의 딸과의 혼인 제의를 했을 때도 그의 단 한 마디, 거절의 답변은 이랬다는 것 아닌가. “누가 범의 딸을 개새끼에게 준다더냐!” 그게 다 애당심에서 나오는 자존심인 것이다.
제갈량을 말해보자. 본시 무소속으로 아직은 정계에 나서지 않았던 인물이었는데 그의 정치 수완을 높이 산 유비가 세 번씩이나 찾아가 입당을 졸라서 모신다. 처음부터 당내 총무직을 주었으니 구주류의 관우와 장비가 유쾌하지 않았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공명은 조조와의 첫 전투에서 단 6000명의 병력으로 적의 30만 대군을 깨끗이 격퇴시키는 능력을 보이며 당내 선임들의 콧대를 누르기 시작한다.
나관중의 의도대로이건 아니건 간에 삼국지의 문장, 내용 중에는 공명의 관우에 대한 라이벌 의식과 그에 따른 탄압의 징후가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뒤늦게 합류한 공명으로서는 당연한 조치일지도 모를 일이다.
공명의 관우 길들이기는 치밀하고 집요했다. 적벽대전의 마무리 소탕전에 임해서도 관우로 하여금 조조와 맞닥뜨리게 만들어놓고는 신사도를 지키고 빈 손으로 돌아온 관우를 미리 받아놨던 군령장을 빌미삼아 철저하게 짓밟아 주지 않던가.
뒤늦게 합류한 공명은 조자룡, 마속 등을 자기 심복으로 삼는다. 그래서 언제나 히트치는 임무는 조자룡에게 맡긴다. 유비가 드디어 형주를 차지하고 영토를 넓히는 사업을 벌일 때 그 첫 삽에 해당되는 계양 정벌 임무도 조자룡 차지가 되고, 조조군과의 전투에서는 그 선봉장이 언제나 조자룡이다. 적벽대전 직후 동오에 들어갔던 제갈량이 몸을 빼어 탈출하는 중차대한 작전에서도 쾌속선 상에서 대기하던 특공대 장교 또한 조자룡이다.
중앙당 청사를 성도에 차려놓고 유비의 대선 출마를 기획하면서 관우만은 단신으로 최전방 DMZ를 지키게 한 공명의 인사 배치가 그저 우연이었을까? 조조·손권의 연합군 틈에 끼여 상대도 안 되는 소수의 병력으로 고전분투하던 관우에게 전략의 귀재라던 공명이 단 일개 소대의 응원군도 파병해주지 않은 것도 병가지상사의 실수였을까?
나관중에게는 다소 미안하지만 나는 나의 ‘만화 삼국지’를 그런 잣대로 재어가며 만들었다. 관우가 죽는 순간 나의 삼국지에서도 밤 하늘에 장군별 하나 길게 떨어지는데 쳐다보는 제갈 공명의 말풍선에 적어넣은 대사는 이렇다.
(드디어) “떨어졌군! 그러나, 허탈하구먼.”
/고우영·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