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를 준비하던 조선 후기 실학(實學)의 움직임은 여성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산 정약용·연암 박지원·추사 김정희 등 한국문화사를 빛낸 실학 인물들이 활동하던 18세기 말~19세기 초에 여성 실학자 빙허각(憑虛閣) 이씨(李氏·1759~1824)가 있다.
그가 쓴 ‘규합총서’(閨閤叢書)는 요리법뿐 아니라 한국 가정에서 전해지던 모든 지혜와 지식을 담고 있는 책으로 지금도 실제 음식으로 재현되는 등 널리 읽히고 있다. 독서량이 많고 시문(詩文)에도 뛰어났던 빙허각 이씨는 ‘여성들을 위한 일반 백과사전 ‘청규박물지’(淸閨博物誌·전4권)를 썼다.
‘청규박물지’는 그러나 일제시대 말기 일반에 알려지자마자 분실돼 안타깝게도 이름만 전해져왔다. 바로 그 ‘청규박물지’가 최근 일본 도쿄대 문학부 도서관 ‘오쿠라(小倉) 문고’에서 발견됐다. 이 대학에 교환교수로 가 있던 서울대 국문과 권두환(權斗煥·고전문학) 교수 팀이 찾아올린 개가다. 오쿠라 문고를 만든 오쿠라 신페이(小倉進平·1882~1944)는 경성제대와 도쿄제대 교수를 역임했고 향가 연구의 문을 연 인물. 수천권에 이르는 그의 장서는 그가 죽은 후 도쿄대 도서관에 기증됐다.
이번에 찾아낸 ‘청규박물지’는 제1권 천문·지리, 제2권 역시(曆時)·초목(草木), 제3권 금수(禽獸)·충어(蟲魚), 제4권 복식·음식으로 이루어졌다. 일월(日月)·해(海)·조석(潮汐)·곤충·주(酒)·서화(書畵)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 각종 자료에서 뽑은 관련 지식을 한글로 상세히 기록했다. 권 교수는 “다양한 백과전서가 나오던 당시 시대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져 양반 부녀자 사이에서 널리 읽혔던 것으로 생각된다”며 “광범위한 지식을 담은 청규박물지는 규합총서를 만들면서 참고한 자료 외에도 남편 서유본(徐有本)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아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청규박물지’는 1939년 연희전문에 재학 중이던 민영규(閔泳珪·연세대 명예교수) 등이 황해도 장단에서 찾아냈다. 조선일보 1939년 1월 30일자는 “발견된 청규박물지-130년 전 규중부인(閨中婦人)의 문화 유산”이라는 제목으로 이를 크게 보도했다. 그러나 이 귀중한 자료는 발견자들이 출간을 준비하던 중 6·25 전쟁을 거치며 분실되고 말았다.
권 교수 팀은 또 ‘오쿠라 문고’에서 18세기 경상도 지역에서 전해지던 설화 50편을 일본인 역관이 한글로 기록한 ‘유년공부’(酉年工夫)도 발견했다. 지은이는 쓰시마 섬 출신의 역관(譯官)으로 출발해 외교관·유학자·교육자로 광범위하게 활동한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1668~1755)로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1703~1705년 부산 초량의 왜관(倭館)에 머물면서 들은 한국 설화를 옮겨 적었다. ‘유년공부’는 완전한 한국어 구문으로 기록돼 이 시기 한국어의 모습을 잘 보여주며, 중하층민 사이에서 전해지던 성애담(性愛談)을 많이 담고 있어 민중문화와 문학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평가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