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 서정주는 신라시대 여인들의 연애 방식에 대해 관심이 지대했던 것 같다. ‘애를 밸 때, 낳을 때’란 시가 있다.
‘신라 상대(上代) 여자들 가운데는/ 밤에 어둔 밤길을 가다가/ 하늘의 별빛을 ?어먹고 와서/ 사내하고 같이 잠자리에 들어/ 애기를 배는 색시도 있었네/ …/ 그래서 애기가 생겨날 때는/ 열달 전에 ?어먹은 그 별 내음새가/ 창구멍 빵빵 나게 풍겼다는데…’.
미당은 무엄하게도 이 천년왕국 시조(始祖)의 어머니 사소(娑蘇)부인의 미혼 출산을 암시하는 시도 썼다. ‘나 사소(娑蘇)는 몽땅 조숙하고 그리움 많은 처녀라, 시집도 가기 전에 애기를 배서 법에 따라 마을에서 쫓겨났지만…산골에 널려 여무는 선도(仙桃)를 따 팔기도 하고, 매 사냥을 해먹고 살면서, 내 외아들 박혁거세를 낳아 큼직한 신선으로 길러냈도다.
‘내 자식은 그만 알로 깐 것이다’고 소문을 퍼트린 건, 물론, 거짓부렁이라면 거짓부렁이지만서두, 내 정과 슬기로써 느끼고 안 정신적 이해의 푼수에 비쳐보자면, 그 애가 하눌의 알이라는 게 으째서 아닐꼬?’
기원전 69년 6촌의 촌장들이 왕을 추대하기 위해 경주 알천 언덕 위에 모였는데 남쪽 양산 및 우물(나정·蘿井) 곁에 이상한 기운이 비쳤다. 흰 말 한 마리가 붉은 알 하나를 품고 있다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알을 깨어보니 사내아이가 나오기에 동천에 목욕시켰더니 천지가 빛났다. 그래서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 짓고 왕으로 삼았다는 게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역사학자들에 의해 사료로서 가치를 의심받던 때가 있었다. 실증을 내세우는 일제 식민사학이 “내용이 황당무계하다”고 평가절하한 탓이었다. 해방 후에도 한때 중·고교 역사교과서에서 박혁거세와 주몽 온조 등 삼국의 건국 시조 이름마저 사라지기까지 했다. 그런데 바로 이 나정 근처에서 서기 6년 무렵의 박혁거세 제사 유적과 우물 터가 발굴됨으로써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진실성이 새삼 인정받게 됐다.
근대 고고학 최고의 발굴로 일컬어지는 트로이 유적의 발굴은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신화로만 치부하지 않은 슐리히만의 꿈같은 상상력 때문이었다. 현대는 신화가 없고, 신화를 읽어줄 꿈이 없어서 삭막하다. 미혼모의 궁색함을 “애 아빠는 하늘”이라고 둘러대고는, 선도를 따 팔며 씩씩하게 아이를 왕으로 키웠을 사소부인의 모습이 문득 살아 돌아오는 것 같다.
(김태익·논설위원 tikim@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