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6월 21일(양력 7월 23일ㆍ이하 모두 음력) 새벽 4시20분, 동이 터오는 여명 속에 경복궁 건춘문 앞에서 총성이 울렸다. 반대편 영추문에서는 궐문을 깨는 폭약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고종을 손에 넣으려 궁궐을 공격해온 일본군이었다.
전주화약으로 동학농민항쟁이 가라앉은 지 이미 두 달. 세상은 겉보기로 조용해졌으나, 이를 빌미로 조선 땅에 상륙한 청군과 일본군 사이에는 전운만 짙어갔다. 일본은 지금이야말로 청을 쫓아내고 조선에서 주도권을 잡을 때임을 잊지 않았다. 그러러면 무엇보다 임금을 손에 넣어야 했다. 조선이 ‘자주국’임을 그로 하여금 천명토록 해야 했다. 엄연한 주권 국가의 궁궐을 이른 새벽 무력으로 침입해 들어가는 테러 행위에 대해서는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용산 주둔지를 떠난 지 4시간. 일본군은 남대문을 거쳐 경복궁까지 일사천리로 달려들었다. 폭약으로 문을 깨는 데에 실패한 일본군은 긴 장대를 벽에 걸어 궐 안으로 들어간 후 문의 안팎에서 칼과 톱으로 빗장을 절단하고 도끼로 대문을 깨부수었다. 왕궁의 벽과 소나무 뒤로 몸을 숨긴 조선 병사들이 목숨을 다해 총격을 가하였으나, 돌아온 것은 죽음뿐이었다. 조선 병사들의 몸에 뚫린 총알 구멍에서 쏟아져나온 피가 7월의 아침 햇살 아래에서 참혹하게 붉었다. 제3대대장 야마구치는 마지막 작전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이제 자기들 것이 된 왕궁을 뒤지고 다녔다.
고종과 민비는 그때 피신도 하지 못한 채 함화당에 있었다. 야마구치는 군주의 지척에서 칼을 휘두르며, 조선 병사들의 무장해제를 지시했다. 마침내 사색의 얼굴이 된 군주가 함화당의 문을 열었다. 야마구치는 칼을 칼집에다 꽂지도 않은 채로 군주에게 말했다. 전하를 지켜드리러 왔으니 이제 안심하시옵소서. 침입자의 거만한 목소리였다.
고종은 침입자가 할퀴어 놓은 궁궐을 보았다. 그곳은 그의 궁이고, 그의 백성들의 궁이었다. 무너져서는 안 되는, 침해당해서도 안 되는 마지막 성소였다. 군주는 이제 자신이 싸워야 할 것이 공포와 두려움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조선은 자주국인가, 아닌가. 군주가 그 순간 던진 질문은 일본이 종용하였던 질문이 아닌, 그 자신의 질문이었으리라.
그 아침,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일본공사관에서 펼쳐진 작전지도 위 빨간 깃발 표시가 격렬하게 펄럭이는 듯하다. 격렬하게 불어오는 청일 전쟁의 바람이었다.
일본은 지난 10년간 국가 예산의 50%를 군비 강화에 쏟아부었다. 제국의 확대를 위한 투자였다. 동학 농민군의 항쟁이 멈추었던 6월과 7월, 일본은 조선에 본국 낭인들을 보내 농민군의 재봉기를 부추겼다. 동학 농민 항쟁을 빌미로 비로소 조선에 진출할 수 있었던 일본군이었다. 전쟁의 개전 구실을 찾기 위해선 조선 땅에서 소요가 계속되어야 했다. 청이냐, 일본이냐, 조정 대신들뿐 아니라 나라 전체가 갈가리 찢겨 싸워야 마음놓고 한판 붙을 수가 있다는 계산이었다. 조선을 차지한 후 그들의 발길은 만주로, 중원으로 향할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조선을 장악해야 했다.
파열의 기회가 빨리 오도록 부추겨 먹구름이 낀 하늘로부터 세찬 비가 오게 하라. 일본 외무대신 무쓰는 조선을 압박했다. 내정개혁을 촉구하는 것으로 시작한 일본의 압박은 청국과의 종속 문제를 해결하라는 부추김으로 이어졌다. 농민 봉기가 인 뒤 두 달 동안 일본대리공사 스기무라가 고종과 대신들을 만날 때마다 던졌던 질문, 아니 압박은 “조선은 자주국인가, 아닌가”였다. 만일 자주국이라고 말하면 조선을 속방 취급하는 청군을 몰아내라 할 것이었고, 자주국이 아니라고 하면 18년 전 강화도 조약의 제1항에 조선이 자주국이라 명시했던 것을 들어, 맹렬한 압박을 가할 것이다. 모든 것은 이제 뜻대로 되었다. 경복궁의 모든 문이 일본군에 의해 활짝 열린 것을 바라보며, 스기무라는 낮고 조용히 외친다. 자주 조선 만세. 조선은 이제 일본 것이다.
그 새벽, 총성은 경복궁 건너편 운현궁에서도 들렸다. 수없이 많은 군홧발이 문 앞으로 밀려드는 소리가 들렸고, 일본의 낭인들이 운현궁의 뜰 안으로 몰려드는 소리도 들렸다. 일본에 적대적인 민비와 민씨 척족을 약화시키기 위해 대원군을 재집권시킨다는 것이 일본의 구상이었다. 새벽 2시, 일본공사관의 오카모토와 대원군의 심복 정운붕이 운현궁을 찾았다.
그러나 대원군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완고한 보수정치가였다. 일본의 손을 잡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한때는 철두철미한 양이론자였고 모화주의자였으나, 세상은 바뀌었다. 대원군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개화를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일본을 배척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이 치욕적인 새벽에 임금의 아버지이자 정적인 그가 일본의 손을 잡을 수 있을 것인가.
오카모토는 대원군 앞에서 칼을 뽑아들고, 그 칼 끝을 자기 배에 겨누었다. 대원군이 나서지 않는다면 할복을 하여 조국에 사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때를 맞춰 정운붕의 호소가 이어졌다. “저하, 기회를 놓치지 마시옵소서. 어떤 말을 타고 가든, 나라를 구하러 가시는 길이옵니다.”
어린 아들 고종을 대신하였던 10여년간의 섭정, 그리고 임오군란 이후 차지하였던 정권, 그러나 3년여에 걸친 중국 보정부에서의 유폐생활. 많은 것이 변했으나, 끝내 변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아침이 밝아오는 가운데, 대원군은 그를 움직이기 위해 달려온 스기무라를 바라보았다. “귀국이 일으킨 이번 사건이 의거인가?” 스기무라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그는 얼마든지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저하, 진실로 그러합니다. 망설이지 마시옵소서. 저하가 이 막중한 대임을 거절한다면, 우리는 다른 방법을 강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방법이라니. 얼마나 더 큰 전쟁을 말하는 것인가. 청나라는 개전을 피할 구실만 찾고 있었고, 위안스카이는 전쟁의 조짐 앞에서 아무도 모르게 서울을 탈출해버렸는데.
조선을 전쟁터로 만들 수는 없다. 대원군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대원군은 스기무라에게 일본 천황을 대신하여, 조선 땅을 한 치도 요구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할 수 있겠는가 물었다. 스기무라는 이번에도 “그렇다”고 대답했다. 천황을 대신할 수는 없으나 오도리 공사를 대신하여 서약서를 작성할 수 있다 했다. 그 자리에서 서약이 쓰였다. 그러나 그 시간, 일본은 한 치의 땅도 아닌, 조선 왕궁을 가졌다. 이제 그들은 더 많은 것을 가지러 조선에서 청과 격전을 치를 것이다. 조선 땅은 백성들의 피로 물들어갈 것이다.
(소설가 김인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