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번 마(馬)가 앞서는 가운데, 6번·12번 2마리의 팽팽한 2위 접전…. 8번 마가 뒤쪽에서 치고 나옵니다!”
지난 6월 10일 밤 11시 서울 종로구 A스크린 경마 게임장. 담배 연기가 자욱한 게임장에는 30개 좌석 중 24개가 차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100인치짜리 3차원 대형 입체 화면에 고정돼 있었다. 2분여의 경기가 끝날 무렵 곳곳에서 탄식이 터져나오는 모습은 실제 경마장과 마찬가지였다. ‘스크린 경마’란 실제 경마가 아니라 화면에서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한 가상 경마를 벌인 뒤 배당금으로 상품권을 지급하는 게임. 경기가 끝나자 여기저기에서 지폐를 500원짜리 동전으로 바꾸는 소리가 들렸다.
1분30초 남짓한 베팅 시간, 가상 경주마의 상태·전적 등 정보를 분석하고 돈을 거느라 정신들이 없었다. 밤 11시30분쯤 맨 뒷자리에 앉아 있던 40대 남성이 밖으로 나가더니 소시지 20여개를 사들고 들어왔다. 그는 저녁도 거르고 7시간째 게임을 하는 중이라고 했다. 게임기 위에는 500원짜리 동전이 수북했다. 자정이 지났지만 게임은 계속됐다. 이 남성은 “오늘 하루만 30만원 날렸다”며 “하루에 100만원 넘게 잃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지난 3개월 동안 800만원 정도 잃었다”는 그는 “현금서비스도 받고 적금도 깼는데 본전 생각이 나 자리를 뜰 수가 없다”고 말했다.
당첨땐 상품권… 현금 교환 10% 떼어
스크린 경마 게임장은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다. 복권·경마·카지노 등 사행산업이 불황 여파로 주춤하는 사이 지난해부터 늘기 시작한 스크린 경마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하루 수십만원을 잃는 중독자들이 생기면서 사행성을 조장한다는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허가를 내준 정부가 규제를 강화하기로 해 업계가 강력 반발하고 있다.
스크린 경마는 실제 경마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고른 말의 등수와 베팅한 돈에 따라 배당을 받는다. 1등 말을 맞히는 단승식, 3등 이내 말 중에서 1마리를 맞히는 연승식, 순서에 상관없이 1·2등 2마리를 맞히는 복승식 등 경마의 방식과 똑같다. 500원을 넣으면 10점이 주어진다. 1계좌 당 최소 1점(50원)에서 50점(2500원)까지 베팅할 수 있다. 매 게임마다 출전마 수가 다르며, 14마리 출전시 모든 계좌에 베팅할 경우 30만원까지 베팅이 가능하다. 배율은 업소에 따라 999배에서 최고 9999배까지 있다. 예를 들어 복승식 1계좌에 2점을 걸어 110배짜리 배율을 맞혔다면 220점이 되는 것이다. 배당 점수가 100점이 되면 게임기에서 5000원짜리 문화상품권을 인출하고 남는 점수로는 베팅을 할 수 있다. 상품권은 근처 상품권 판매대 등에서 현금으로 바꿀 수 있다. 사실상 현금을 따는 것이다.
6월 11일 오후 11시 서울 서대문구 B스크린 경마장. “구경 좀 하라”는 아르바이트생 말에 게임장 안으로 들어서 자리를 잡자 ‘보너스’ 100점(5000원 상당)을 줬다. 100점을 잃는 데는 40분 정도 걸렸다. 옆에서 게임을 하고 있던 일용직 근무자 이모(45)씨는 “6시간째 게임하고 있는데 이번 주에 번 돈은 벌써 다 까먹었다”며 “며칠 벌어 하루에 다 날리고 말지만 가끔씩 한 번 따는 게 언젠가 크게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계속 오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전세금을 날린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시·군·구에 등록만 하면 운영 가능
지난 6월 17일 공기총을 들고 전북 완주의 시골우체국에 침입, 5600만원의 현금을 탈취해 달아난 박모(34)·한모(35)씨 등 2인조 무장강도가 사건 발생 일주일 만인 6월 24일 붙잡혔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탈취한 현금을 2800만원씩 나눠가졌으며 이 중 박씨는 스크린 경마장에서 3일 동안 2800만원을 탕진했다. 경찰 조사 결과 친구 사이인 이들은 유산 등 5억여원을 수년 전부터 성인오락실·경마장 등에서 탕진한 뒤 카드·사채 빚까지 지게 되자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스크린 경마는 한 게임당 3분 정도가 소요되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많은 돈을 날릴 수 있다. 한 업소에서 많게는 하루에 500회 정도 게임이 진행된다. 이에 따라 중독자들은 수천만원을 잃는 경우도 생겨나는 것이다.
이렇듯 스크린 경마는 사행성을 띠고 있지만 ‘게임’으로 분류되고 있다. 영상물등급위원회(영등위)가 스크린 경마를 ‘성인용 게임’으로 분류한 것. 경마·복권 등 사행성이 높은 업종은 ‘사행 행위 등 규제 및 처벌 특례법’에 의해 시행 횟수나 베팅 금액에 대한 규제를 받고 있다. 이에 비해 스크린 경마는 ‘음반·비디오물 및 게임물에 관한 법률’의 적용을 받아 사행 행위로서의 규제를 받지 않는다.
스크린 경마장은 관할 시·군·구에 등록하면 운영이 가능하다. 한국컴퓨터게임산업중앙회에 따르면 현재 스크린 경마 게임장은 전국적으로 500여곳에 이른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시장 규모가 5000억~6000억원을 상회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많이 버는 곳은 하루 매출이 3000만원을 웃돈다. 기계는 30석 기준 1세트당 3억3000만원 수준이다.
6월 12일 오후 5시 서울 중구 C스크린 경마장. 보너스 점수 100점으로 게임을 시작해 여섯 번 만에 118점이 되자 게임기에서 문화상품권 1장이 나왔다. 상품권은 전국에서 사용 가능한 대신 일부 서점과 식당에서만 사용이 가능해 사실상 ‘게임장 전용’이었다. 상품권을 갖고 게임장 옆에 있는 상품권 판매대에 가자 10%를 떼고 4500원에 바꿔줬다.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일부 업소는 상품권을 현금으로 바꿔주는 일에 직접 관여하고 있다. 이들 업소들은 손님이 게임기에 넣는 돈 외에도 상품권 수수료 10%를 더 챙기는 것이다.
이권 놓고 조직폭력배 개입하기도
거액의 현금이 왔다갔다하다보니 조폭이 관련되기도 한다. 지난 4월 23일 하루 3000만원의 매출을 올리는 서울 동작구 소재의 한 스크린 경마 게임장의 이권을 둘러싸고 다툼을 벌이던 조직폭력배 12명이 경찰에 붙잡혔다.
정부는 뒤늦게 스크린 경마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유관 부서인 문화관광부 게임음반과 전승일 사무관은 “2년 전부터 스크린 경마의 폐단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규제의 필요성을 건의했지만 영등위는 올해 들어서야 문제 해결에 나섰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영등위 관계자는 “스크린 경마는 2000년부터 시작돼 큰 문제 없이 운영됐으나 2002년 문화관광부 고시로 게임업소에서 문화상품권·도서상품권·국민관광상품권을 경품으로 제공할 수 있게 되면서 스크린 경마가 문제를 안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영등위는 1게임당 최대 베팅 가능액수를 현재 30여만원에서 3000원으로 대폭 낮추고 배율도 100배로 하는 한편 1게임의 최대 당첨 점수를 2만점으로 제한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한 개정안을 마련했다. 문화관광부 관계자는 “스크린 경마를 계속 ‘게임’으로 분류하되 사행성의 기준을 2만원으로 잡고 이 범위 내에서 게임을 운영하도록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영등위 장은숙 위원은 “베팅 액수와 당첨 액수를 제한함으로써 사행성이 상당 부분 억제될 것”이라고 말했다. 영등위는 지난 5월 경마 게임 업계, 전문가 등이 참여한 가운데 공청회를 갖고 개정안을 마련, 조만간 공고할 계획이다. 영등위 관계자는 “규제개혁위원회 검토 등 절차를 거쳐 개정안이 확정될 경우, 이르면 10월 중순부터 강화된 개정안이 적용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사회적 문제를 바로잡으려는 것이며 업계 입장에서는 당장 손님이 줄어 불만이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약이 될 수도 있다”며 “스크린 경마가 게임 본질로 돌아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또다른 이해 당사자인 마사회는 “우리야말로 스크린 경마의 피해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상당수 스크린 경마 게임장이 ‘○○경마’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어 마치 마사회에서 운영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쉬우며, 경마 게임장의 피해자들이 마사회에 대해 나쁜 이미지를 갖게 된다는 설명이다. 또한 마사회의 수입에도 적지 않은 영향이 있다는 것. 마사회는 올해 1분기 하루평균 매출이 지난해의 667억원에서 503억원으로 164억원이나 줄었다. 대표적 사행사업인 경마를 관장하는 마사회가 스크린 경마의 사행성을 지적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건우 마사회 법조팀장은 “스크린 경마를 사행 행위로 규제해야 하며 당첨금도 상품권이 아닌 사이버 머니 등으로 지급, 게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사회 “우리야말로 피해자” 하소연
스크린 경마 업계는 “허가를 내줘 수억원을 투자해 가게를 열었는데 이제 와 제재를 하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으란 얘기냐”며 “소송도 불사할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안양에서 지난해 5월부터 스크린 경마 게임장을 운영하고 있는 황인복(42)씨는 “회사 퇴직금과 전재산을 털어 10억원을 투자해 영등위의 허가 조건에 따라 합법적으로 운영하고 있다”며 “일부 업체와 중독자들의 잘못으로 마치 업소 전체가 불법을 저지르는 것처럼 매도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황씨는 “이론상 배당 금액이 높을 뿐이지 실제로는 한 게임당 문화상품권 1장만 받을 수 있어 일각의 주장처럼 사행성이 크지 않다”며 “게임 자체에 문제가 없다는 것은 허가를 내준 영등위 스스로가 인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강남에 14억원을 투자해 2개월째 스크린 경마장을 운영하고 있는 이계옥(47)씨는 “영등위의 개정안대로라면 스크린 경마장은 살아남기 어렵다”며 “업자 대부분이 게임의 전망을 보고 전재산을 털어 정부의 허가 기준대로 기계를 샀는데 이제 와서 무책임하게 규제하고 법을 개정하는 것은 거리에 나앉으라는 얘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씨는 “이렇다할 성인 놀이 문화가 없는 국내 현실에서 스크린 경마는 그동안 음성적으로 진행되던 슬롯 머신 등 불법 도박을 대신해 건전한 게임으로 정착시킬 수 있다”며 “일부 문제가 있다고 해서 다잡는 것은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라고 말했다. 그는 “마사회가 운영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며 게임장 간판에 ‘경마’라는 용어는 물론 심지어 말 그림도 붙이지 못하도록 단속이 강화돼 위반할 경우 벌금 500만원을 내야 한다”며 “힘 없는 개인들만 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컴퓨터게임중앙회 김민석 회장은 “성인 게임은 사행성과 오락적 성격의 경계선이 모호하다”며 “스크린 경마를 도박이라고 단정짓는 것도 무리지만 설령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이렇게 급작스럽게 규제를 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주 5일제에 대비, 스크린 경마를 건전한 게임 문화로 정착시키기 위해 지난해 말부터 자체적으로 자율지도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광보 게임아카데미 교수는 “스크린 경마의 사행성을 바로잡으면서도 레저 활동으로서 스크린 경마가 갖고 있는 순기능을 끌어내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개정안이 마련돼도 정부와 업체의 사후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문제는 또다시 발생할 것”이라며 “정부는 게임 산업 전반에 대한 장기적 운영 계획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 이 기사는 주간조선의 허락을 얻어 게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