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비콘 강은 로마에 없다. 2000년도 더 전에 카이사르가 건넌 운명의 강이 로마나 근교에 있지 않음을 확인하자 조금 이상했다.

“카이사르는 원로원에 대항해 군대를 이끌고 강을 건넜다. 그 결과 로마를 장악했다. 한번 결정한 일, 죽음을 무릅쓰고 최선을 다한다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도 그때 나왔다.”

성베드로 성당 쪽에서 바라본 바티칸 광장



루비콘 강에 대한 착각의 뿌리는 박정희와 한강의 관계에서 시작한다. 스스로 성립되지 않는 가설을 세운 셈이다. 늑대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가 테베레 강변에 나라를 세웠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로마의 주된 강은 테베레 강이니까 루비콘은 그 지류쯤 되는 모양이지"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루비콘은 로마로부터 동북 방향으로 350㎞ 떨어진, 리미니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강을 건넌 지 24시간 이내에 성패가 결판난 박정희의 쿠데타와 장장 3년에 걸친 내전을 치르고서야 집권한 카이사르의 쿠데타는 양상이 자못 다르다. 굳이 비교하자면 카이사르의 루비콘 도강은 박정희보다 나폴레옹에 가깝다.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군 사령관으로 있다가 파리의 정세가 심상치 않자 지중해를 건너 프랑스에 상륙, 파리로 들어가 권력을 틀어쥐었다.

나폴레옹이 영국 해군의 봉쇄를 뚫고 이집트를 탈출한 것이 1799년 8월 22일, 파리에 도착한 것이 10월 14일이니 두달 가까이 성패를 알 수 없는 인생의 항해를 거듭해야 했고 카이사르는 그게 3년 이상에 걸쳤다. 그 기간중 그들이 졸였을 가슴와 간장,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나 증권시장의 정보지처럼 무수히 흩날렸을 정보와 역정보, 상황의 호전과 역전을 생각해보았다.

로마에서 루비콘으로 가는 길은 카이사르가 행군해온 루트를 거슬러가는 것이다. 이탈리아 반도를 따라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는 아펜니노 산맥을, 반도의 서남부에서 동북부로 비스듬히 횡단하는 이 길은 21세기에도 울퉁불퉁하다. 로마인들이 도로와 치수, 도시계획의 전문가였고 그 후예가 이탈리아인들이라는 얘기는 절반만 맞다. 이탈리아 안에서 뚜렷한 개발지역과 저개발 지역의 경제력 편차는 도로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밀라노에서 출발해 로마를 거쳐 나폴리에 이르는 A1 고속도로의 현대성은 그 길과 주변 지역에 그칠 뿐이다. 그것도 로마~나폴리 구간은 최근에야 완공됐다.

로마에서 리미니로 가는 길은 지리적으로 볼 때 서울에서 국도를 이용해 경상북도 영덕으로 가는 길과 비슷하다. 교통량도 적고 도로는 절반 이상이 편도 1차선 내지 공사중이다. 숲이 울창하고 때로 산속 깊숙한 곳에서 도로가 실종되는 경우도 있다. 태백산맥만큼은 아니지만 반도의 동쪽에 치우쳐 있는 이 이탈리아의 등뼈를 넘으면 기다리는 것은 대리석이다. 석회암이 변성한 이 동네의 대리석은 품질과 빛깔에서 대단히 앞서간다.

그렇게 해서 루비콘 강에 섰다. 강은 없었다. 말라버린 실개천이 있고 그 위에 서울의 수표교, 내가 사는 전주의 다가교보다도 훨씬 작은 다리가 있었다. 다리 한 쪽에는 그 사나이, 이탈리아 발음으로 율리우스 체자르의 동상이 아침 햇볕 아래 실개천에 실린 자신의 결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BC 50년 카이사르는 공화정이라는 제도와 1인 독재 불가라는 관행에 정면으로 맞서 있었다. 원로원 중심의 의결 구조는 이미 커질대로 커진 대 제국을 통치하기에 한계를 드러냈고, 민중과 국가는 대혁명 10년차의 프랑스처럼 강력한 통치자를 찾고 있었다. 군인 정치가들이 그 대안으로 주목받았다. 이런 류의 군인은 술라가 처음이다. 그의 사후 야심있는 군인들은 서민층을 파고들며 사방의 전선에서 업적을 쌓아가고 있었다.

카이사르가 제갈공명이라면 폼페이우스는 주유쯤 된다. 주유가 죽기 직전 “하늘이시여, 왜 저를 낳고 다시 제갈량을 낳으셨느냐”며 원망했듯 폼페이우스도 그 당시의 기준으로는 흠잡을 데 없는 장군이요, 정치가였다.

로마의 후반기 역사를 바꾼 카이사르, 당년 51세의 장년이다. 로마가 탄생한 이후 처음 보는 매력과 처신으로 이 나라의 지도층을 당혹시키고 있었다. 무엇보다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가는 과도기의 체제인 3두 정치의 출범부터가 카이사르의 작품이다.

카이사르의 양자인 아우구스투스 시절의 로마 영토. 로마의 영토가 최대치에 달한 티베리우스 황제 때에는 이보다 약간 더 넓었으나 대체로 로마가 무리없이 지켜낸땅은 사진에 나와 있는 정도다. 이중 갈리아, 게르마니아 일부는 카이사르의 몫이다.

카이사르가 처음부터 공화정을 무너뜨릴 정교한 정치 기획력을 갖고 있었는지는 회의적이다. 그가 남긴 여덟 권의 갈리아 전기는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냉정한 관찰력과 생사의 고비에서도 잃지 않은 객관성의 상징일 뿐 과도기의 방략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은 아니다.

원로원 체제의 비효율성과 간섭에 대항해 그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에게 3두정치를 제안했다. 둘은 적고, 넷은 많다. 둘은 사이가 어긋나면 돌이킬 수 없고 넷은 방정식이 너무 복잡해진다. 제갈량은 그래서 유비에게 조조, 손권과의 천하 3분지계를 제안했고 흐루시초프 실각 이후 브레주네프는 코시킨, 포드고르니와의 트로이카 체제를 고안했다.

카이사르는 3두 체제하에서 독자적 정치-군사 공간의 확보에 성공했다. BC 58년부터 8년간의 갈리아 (오늘날의 프랑스) 전쟁을 통해 오늘날의 프랑스와 벨기에 지역을 대부분 로마에 복속시켰다. 영국까지 원정군을 끌고 갔다 왔다.

프랑스 땅이 토양좋고 산출 많기는 2000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비가 많고 척박한 게르마니아는 로마인들에게 계륵 같은 존재였지만 따뜻하고 비옥한 갈리아는 생산력 측면에서 제국의 근간인 이탈리아나 스페인 땅보다 뛰어난 보고였다. 지금도 “프랑스가 풍년 들면 온 유럽이 먹고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 아닌가.

그가 단순한 군인이었다면,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막시무스나 소설가 김훈이 작품 ‘칼의 노래’에서 다시 살려 낸 이순신처럼 전쟁 1등, 정치 꼴찌의 보편적 이상적 군인이었다면 이야기는 길지 않다. 카이사르는 여러 방면의 능력을 갖춘 다중 탤런트였다. 기본적으로 권력신을 유일신으로 섬기는 열성 교도였다.

그는 정복지에서 취득한 돈과 재물을 로마에서의 권력기반 강화에 올인했다. 갈리아에서 긁어모은 재산은 로마에서 앞잡이를 고용하고,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는데 대부분 쓰여졌다. 에세이를 쓸 줄 아는 군인, 선전 선동의 중요성을 아는 정치가였다. 투자가라면 소로스나 워렌 버펫보다 더 큰 투자가였고, 도둑이라면 세상 어떤 일보다도 나라를 훔치는 일에 더 재미를 붙인 큰 도둑이었다.

루비콘 가는 길에 들른 산마리노 공화국의 케이블 카. 산마리노 공화국은 11세기부터 존속해왔으며 돌깍는 석공들이 만든 아름다운 나라다.

명분 혹은 권력이 있으면 돈은 생긴다는 신념, 돈은 써야 또 생긴다는 믿음을 가진, 장군의 용기와 상인의 감각을 보유한 정치기계였다. 얼굴은 못 생겼다. 글래디에이터의 러셀 크로나 트로이의 브래드 피트보다 뻑둥새의 잭 니컬슨에 가깝다.

3두 정치 10년은 결과적으로 카이사르 1인의 강대함으로 귀착됐다. 다른 두 명의 권력자는 점점 카이사르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똑같은 지분으로 로마의 행정권, 군권을 나눠 가진 사이지만 최고권력을 위해 무한 질주하는 이 사나이에게 동업 주주들은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민중은 성실성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동방 원정에 나섰던 크라수스가 패전후 사망한 것은 이 즈음이다. 남은 둘은 생사투의 상황에 내몰렸다.

서민층이 미남장군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사이에서 카이사르에게 좀 더 많은 마음을 줄 때 중상층은 폼페이우스 쪽으로 기울었다. 그가 더 만만했기 때문이다.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많은 권력과 돈, 인기가 집중되면 그를 제거하는게 원로원 전반의 정치적 정서요 전통이었다. 술라도 그락쿠스 형제도 이 고비를 넘지 못했다. “마땅히 죽어야 할 자여, 그대 이름은 강한 자이니라” 브루투스의 이 심정은 로마 상층부의 보편적 정서다.

폼페이우스도 카이사르처럼 쉬지 않고 뛰었다. 안티 카이사르 정서는 원로원과 폼페이우스를 한 몸으로 묶어줬다. 바로 이 때 내부 평화의 닻이 부러졌다. 폼페이우스의 아내이자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가 기원전 54년 사망했다. 루비콘 4년 전이다.

카이사르가 루비콘을 건너기 직전인 기원전 50년 로마 정가는 ‘카이사르냐, 아니냐’는 내부 논쟁이 최고조에 달했다. 표면적으로는 카이사르가 속주 총독에서 일단 사임한 뒤 집정관에 취임해야 한다는 쪽과 현안의 처리와 장군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는, 원로원-폼페이우스 진영과 친 카이사르 진영의 의견이 첨예한 대립이었다.

공백을 둔다면 카이사르는 그동안에 어떤 공직도 갖지 않은 민간인으로서, 무방비 상태로 적들의 수많은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으면 그는 정치적으로 파멸할 것이고, 어쩌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카이사르는 유사시에 대비해 최소한도의 물리력은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군사력이 있는 속주 한 곳의 군 지휘권은 집정관 취임날까지 갖고 있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상황을 정면 대결로 몰고 간 사람은 BC 50년의 집정관 (2인) 가운데 하나인 마르켈루스였다. 그는 임기가 끝나는 날짜에 카이사르가 지휘권을 내놓아야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같은 날 동시에 지휘권을 내놓지 않아도 된다는 결의를 원로원에서 얻어냈다. 폼페이우스의 칼로카이사르를 치기 위한 의도였다.

그러자 친 카이사르 진영의 평민 호민관 쿠리오가 작용했다. 쿠리오는 그해 12월초 두 사람이 동시에 지휘권을 내놓아야 한다는 결의(찬성 370표, 반대 22표)를 원로원에서 얻어냈다. 원로원은 어쩌면 창녀였다. 중심을 잃고 비틀대고 있었다. 그러자 이튿날 마르켈루스는 원로원의 허가 없이 이탈리아에 있는 모든 부대의 지휘권을 폼페이우스에게 넘겨주고 덧붙여 추가 모병권까지 넘겨주었다. 모순된 정령의 남발 또한 내전으로 가는 길목에서 빼놓을 수 없는 메뉴다.

카이사르는 마지막까지 화해의 형식을 추구했다. ‘폼페이우스와 동시에 군 지휘권을 내놓겠다’고 제안했다. 명분 축적의 목적도 있지만 내심 원로원, 통령과의 정면 충돌이라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카이사르가 BC 49년 1월 1일 이 제안을 내놓자 원로원의 친 폼페이우스 기류는 더 강경해졌다. 카이사르가 고개를 숙인다고 생각했다. 원로원은 카이사르가 '정해진 날짜까지' 지휘권을 내놓지 않으면 그는 마땅히 공공의 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제 카이사르는 선택에 몰렸고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는 이때 자신이 오랜 기간 거느려온 갈리아키살피나 군단과 함께 이 군단의 방어선 최남단인 루비콘에 머무르고 있었다. 갈리아 키살피나는 알프스 지역, 아펜니노 산맥의 북부, 아드리아해 인근 등을 망라한 군관구 지역이다. 지금의 이탈리아 북부, 동부, 스위스 일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지역이다.

카이사르는 여기서 뽑은 병력으로 멀리 갈리아 정벌에 나섰고 군단의 장교와 병사들은 그가 친 자식처럼 아끼는 용사들이었다. 예컨대 평안도 병력을 데리고 만주를 복속시킨 사나이가 이제 정치적 위기에 처하자 임지인 평안도 최남단에서 서울을 향해 창끝을 겨눈 채 마지막 제의를 던진 것이다. 루비콘 강이 로마에서 한참 먼 곳에 위치한 이유는 바로 여기 있다. 그는 반란의 깃발을 임지에서 쳐든 것이다.

원로원의 강경 카드가 나온 일주일 뒤 카이사르는 강을 넘었다. 공화정의 적이 됐다. 루비콘에서 만난 카이사르의 동상에서는 BC 49년 1월9일 밤의 고민을 읽을 수 없다. 정형화된 얼굴이다. 동상을 세운 지방자치단체의 문화적 역사적 상상력 빈곤이 아쉬웠다.

어떤 역사가는 1월11일이 도강일이라고 하니 1월10일 밤일 수도 있는 그날 밤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공화정 로마에서 태어나 그 안에서 성장한 사람이 공화정과 전면으로 대결하게 도리 경우 심중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더구나 그는 무조건 부수는 야만의 무리는 아니잖은가.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은 어쩌면 자기 자신에 대한 다짐의 맹서다. 타협하고 싶은 마음도 적지 않았을텐데.

카이사르는 그 후 3년 동안 제국의 모든 지역에서 정부군과 싸워 이겼다. 오늘날의 이탈리아, 그리스, 발칸 반도, 이집트 등 지중해의 주요 지역마다 카이사르 군과 폼페이우스 군의 대결이 차례로 벌어졌다. 이집트 전투에서의 승리 후 알렉산드리아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연인이 된 것은 유명하다. 귀로에 보스포루스의 왕 파르나케스를 단숨에 제압하고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하고 큰 소리친 것도 이 즈음의 일이다.

그 몇 년 뒤 그는 공화주의자들의 칼에 찔렸다. "브루투스, 너마저"(Et tu, Brute)라는 말은 믿고 사랑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이의 특별한 고통을 표현한 말로 유명하다. 카이사르는 개인 브루투스에게 배신당했다고 믿었지만 그를 찌른 60여명의 동지들은 카이사르가 공화정을 배신했다고 믿었다.

카이사르는 공화정을 창조적으로 파괴하고 1인 통치 제정의 사회적 기초를 닦았다. 그의 이름은 서방권 모든 나라에서 권력자를 지칭하는 보통 명사가 돼버렸다. 독일어의 카이저, 슬라브어의 차르, 이슬람권의 여러 언어에서 쓰이는 카이사르의 어원이 모두 한 사람의 이름에서 나왔다. 서방권 첫 권력자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전국 시대 말기 천하를 통일한 진 나라의 영정이 시황제라는 호칭으로 불리다가 그의 사후에는 ‘하늘의 아들’인 권력자를 황제로 불렀듯이.)

루비콘을 빠져 나오는데 마침 장날인지, 날씨가 좋아서인지 광장마다 거리마다 장이 섰다. 흑인 상인이나 차도르를 두른 무슬림 상인도 심심찮게 보였다. 무슬림은 루비콘 앞바다인 아드리아 해를 건너 알바니아에서 온 사람들이고 흑인도 비슷한 경로를 건너 넘어온 사람들일 것이다. 이탈리아 땅에서 현지인들과 여러 인종, 여러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어울려 물건을 사고 파는 모습은 역사를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카이사르 사후 로마는 1인 독재의 황제국가, 전 영토에 대한 중앙집권적 통치력을 가진 제국으로 급속히 변모해갔다. 지금의 많은 역사가들은 “로마가 공화정에 머물렀으면 제국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을 것”이라고 효율성의 문제를 들어 카이사르의 손을 들어준다.

어쨌든 중앙집권적 황제국가 로마는 데나리우스 화폐를 지중해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3 대륙에 걸친 제국의 전 영토에서 단일화폐로 사용했다. 가롯 유다가 은 30 데나리온에 예수를 판, 바로 그 데나리우스 화폐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함께 유럽 땅에서 단일화폐는 사라졌다가 요즘 다시 나타났다. 유로화다. 1600년만의 일이다.
루비콘 카이사르의 동상 아래에서 상인들이 사용하는 화폐는 당연히 유로화였다.

(김현종·전주대 역사학과 객원교수 )